마음 탐사기

상실의 경험으로 만나는, 오래된 미지의 존재와 그 가설

by Ring finger

극도의 편집적 기억과 이성이 분투하는 시절. 결과적으로 썸에 준했던 애매한 사이가 종료된 지 꽤 시간이 흐른 지금도, 나는 아직 이 터널을 걷고 있다. 서로에게 차단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그땐, 공기 중을 떠도는 듯한 아직 망각되지 않은 실체적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좋은 것과 싫은 것과 판단이 어려운 것이 공존하던, 그저 날 것의 그인 채로. 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나를 위로하는 방식으로 그가 해체되고 걷잡을 수 없이 편집되는, 나만을 위한 모노드라마가 아메바처럼 무한 증식해나간다는 것이다. 요리를 하다가, 음악을 듣다가, 창 밖을 보다가, 심지어 회의의 집중력을 잃어갈 때도 불현듯 나타난 그는 오로지 내게 집중하는 시선과 내가 듣고 싶던 말을 건네며 내가 원했던 행동만을 한다. 그러다 무의식의 흐름을 타고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어진 미래에서 그를 재회한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나와 여전히 혼자인 그인 채로. 순도 100%의 내 의지로 창조되고 통제된 이 가상 세계에서 ‘아직 생각하고 있어’라는 그의 말을 나는 기어코 듣고야 만다.


생각하고 있다니. 바로 그 생각을 하고 있는 건 누구인가. 시도 때도 없는 나의 부름에 소환되는 그는, 1) 실재하나 이미 나를 떠난 그에게서 갈비뼈를 얻은 그의 분신인가 = 그 2) 나에 의해 새로이 창조되어 이미 자체로 생명력을 얻은 피그말리온의 조각상인가 = 제3의 인물 3) 앞의 가설들은 모두 헛소리이고 그냥 내가 내게 하는 말인가 = 나. 이렇게 머리를 쥐어뜯는 이 순간에도 현실의 그는 이 모든 부질없는 생각들과 관계없이 도도히 바쁘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헛헛하고 아프고 쓰라린 건 마음이다. 그런데 이 인과관계를 좀 더 들여다보면, 알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 같은 또 하나의 영원한 미스터리를 마주한 듯한 당혹감이 밀려온다. 조각난 현실 속 입체의 그를 데려다, 내가 감독이고 작가이자 배우이기도 한 세계 속에서 평면의 그로 단순화하는 이 ‘생각’이란 행위의 발현은 그의 부재를 견디지 못한 내 ‘마음’이 충동질한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마음을 낳고 그 마음이 또 생각을 만든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마음’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1) ‘마음이 생겼다, 마음을 먹었다’라는 말처럼 어떤 일, 생각을 하게 하는 의지, 동력, 그런 주체적인 ‘힘’에 가까운지 2) ‘내 안에 너 있다’라는 말처럼 무언가를 담아두고 그 안에서 살게 하는 ‘공간’이라고 봐야 할지 3) ‘힘’이라는 소프트웨어와 ‘공간’이라는 하드웨어가 결합된 ‘존재’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이런 마음의 묵직함과 복잡성과는 대조적으로 ‘생각’은 좀 더 단순하고 순간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해리포터와 마법사 친구들이 빗자루를 타고 즐기던 퀴디치라는 스포츠의 날개 달린 공 ‘스니치’ 같았다. 무시로 반짝 나타났다가 이윽고 숨어버리는, 날쌔고 가벼운 무언가. 그것을 붙잡아두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 바로 이런 글이 되고, 악상이 되고 영감이 되는 것이 아닐지. 그 날아다니는 바쁜 ‘생각’이 잠시 쉬어가는 곳이 ‘마음’이고, 그것은 심장에 가까운 어느 미지의 영역이다 라고 이만 정리해두고 싶었다. 그런데 그 날랜 ‘생각’이 출발하거나 도착하는 지점이 하나 더 있다는 게 또 생각났다.


흔히 ‘머릿속’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공간. ‘마음’보다는 좀 더 직관적으로 ‘뇌 구조’라는 다소 희화화된 이미지로 소비되고 있는, 좀 더 물리적 실체가 분명해 보이는 그곳. 그렇다면 ‘생각’은 뇌 어딘가의 이성적 영역과 심장 주변의 감성적 영역을 넘나들며 창조되고 분출되며 가공되고 변형되며 성장하고 확장되다 부정되고 소멸되는 그런… 것일까? 심리학을 떠올렸던 이 오래된 낯선 탐구는 어느덧 생물학까지 기웃거리는 당혹감을 준다. 이 단순한 듯 복잡한, 비슷한 듯 또 다른 존재들의 메커니즘을 정리하기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이 모든 고민이 결국 뇌와 심장이라는 인간의 장기가 주고받는 물리적인 화학작용일 따름이란 냉혹한 결론은 아직 거부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렇게 적기에도 오그라드는 것이 사실이나 ‘마음’의 위치가 어디인지에 대한 나름의 실존적 체험을 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제는 쉽지 않을 줄 알았던 떨림과 설렘 속에서 내 안의 그 보이지 않는 공간이, 어떤 특정 근육들이 활발히 운동하고 분명히 살아 있음을 체감했었다. 정말 그곳에 온도계를 대보고 싶을 정도로 데인 것처럼 뜨겁게 타던 그 현장은 당혹스러우리만큼 내 가슴의 정 가운데였다가 언젠가부터 왼편으로 이동하는 듯하다가 다시 원복하는 알 수 없는 위치 이동을 했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누군가의 자리를 탄생시키려 지각이 뒤틀리는 멘틀 운동이 일어났고 검붉은 연기를 내뿜는 활화산을 보았다. 그렇게 작고 작은 한 세계가 힘겹게 만들어졌다가 쑥쑥 자라나다 위협을 받다가 기어코 사그라질 때도 정말 문자 그대로의 ‘아픔’이란 신체 경험을 그 현장에서 겪었다. 그래서 그 ‘마음’이란 현장의 실존을 부인할 수 없었고 그 신비를 이해하려 온갖 잡스러운 생각들을 힘겹게 붙들고 있는 중이다.


그로 인해 꽤 오랫동안 괴로워하던 날, 칼럼니스트 곽정은 님의 영상에서 법화경 마음공부 책의 일부를 들었다. ‘실연과 파산은 슬픈 일이지만 두려운 일은 아니다. 원래 당신의 것이 아니었으므로 잃어도 상관없다. 세상에서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는 건 바로 당신 자신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세상의 득실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영상의 밑줄은 ‘잃어버리지 않는 건 바로 당신 자신’에 있는데, 나의 마음은 ‘원래 당신의 것이 아니었으므로’에 밑줄을 긋는다. 이렇게 외롭고 슬픈 날, 부지불식 간에 나를 찾아와 위로하는 ‘내가 만든 그’가 내 것이 아니라고? 나를 떠난 그는 내 것이 아닐지라도, 아직 내가 필요한 만큼 소환할 수 있는 그는 분명한 내 것이라는 창작자의 집착이 나를 놔주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나는 괴로움 속에 자발적으로 머문다.


이런 제멋대로의 생각과 마음에 잠시 거리를 두고 싶어 윤상 님의 플레이리스트를 켠다. 오늘의 선택은

「소심한 물고기」. ‘말 그건 물고기들. 내 머릿속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헤엄치고 있네, 캄캄한 내 머릿속의 바다를.’ 매번 감탄할 수밖에 없는 가사를 쓰신 박창학 님께 불쑥 질문이 든다. 그런데요, 물고기가 사는 그 바다요, 그 수온을 유지하고 바꾸기도 하는 건 저 심연의 펌프질이 아닐까요? 그럼 그 심연은 어딘지, 뭐라고 해야 좋을지 좀 알려주시면 안 되나요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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