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에게 적당한 거리는 어느 정도일까
보행자와 쉬는 자, 모두를 위한 길
하노이 생활을 시작하며 처음 맞닥뜨린 생활의 난제는 '길 건너기'였다. 지극히 당연한 일상적 행위에 골몰했던 까닭은 좁디좁은 길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가는 오토바이의 낯섦 때문이었다. 쉽게 해결되지 않던 이 문제를 토로하노라면 혹자는 오토바이 주행자와 눈을 마주치고 신호를 보내라, 차는 조심하되 오토바이는 스스로 보행자를 피해 가니 겁먹을 것 없다고 말했다. 이상하게도 이곳 생활에 단련되신 분들과 함께 건널 땐 적용되던 이 법칙이 혼자 할 때면 꽤 오랜 기간 비껴갔다. 결국 적절한 타이밍을 찾기보다 최대한 통행량이 빠지기를 기다리는 편을 택했고 폭이 4m 남짓한 동네 메인 도로의 그저 반대편으로 이동하기 위해 1-2분씩 정지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겨우 이 새로운 습관에 적응할 무렵에도 널따란 4차선 이상의 도로를 건너야 할 때면, 마치 바다를 가르는 모세 같은 기적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 흔하던 횡단보도의 당연함이 그리웠다. '걷는 것은 개와 외국인뿐' 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오토바이는 베트남 사람들의 다리가 된 지 오래였다.
이따금 Grab 오토바이 택시에 올라 더운 공기를 가로지르는 시원한 바람과 리듬을 타는 균형감에 매료되기도 했지만 점차 추억이 되어버리는 '걷기'를 되찾고 싶었다. 서울 명동을 연상시키는 최대 중심가 '호안끼엠'은 주말이면 교통을 통제하고 보행자 거리를 조성했다. 전설의 검을 품은 호수 주변의 도로 일대가 또 하나의 시민공원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곳에서 하노이 사람들은 Kpop과 스포츠 댄스를 췄고 여럿이 원을 둘러 토스하는 릴레이 제기를 찼다. 토요일 오전이면 출퇴근길에 흘끗 보이던 울창한 식물원과 공원을 찾았고 크고 작은 박물관의 한적함을 즐겼다. 도저히 차량은 진입이 어려운 좁은 골목 안을 작정하고 헤매다 뜻밖의 널따란 공간을, 거리 예술가의 작품을, 작고 예쁜 카페를 발견하며 미로처럼 신비롭게 연결된 길의 끝을 쫓았다. 같은 길이라도 크기에 따라 đường (드엉 / 대로), phố (포 / 거리), ngõ (응오 / 골목)로 달리 표현되는 그들의 언어에도 익숙해져 갔다. 내겐 건너기 난이도가 낮고 다양한 의외성을 품은 골목이 가장 아끼는 걷기의 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이곳엔 조금 다른 의미의 스트릿 문화가 존재한다. 한국인이라면 '목욕탕 의자'를 떠올릴법한 작은 플라스틱 의자들의 런웨이가 그다지 넓지 않은 보도블록의 절반쯤을 차지한다. 거리와 골목 곳곳에서 목격되는 그 의자들의 소속은 바로 인근의 식당과 카페들이다. 도시를 중심으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요즘에도 많은 베트남 사람들은 전통적인 거주형태로 '주택'을 선호한다. 18세기 중반 프랑스 식민지 시절 주택 세금을 길에 면한, 건물의 가로 면적 기준으로 부과했다고 한다. 이러한 영향으로 절세를 위해 정면에서 보면 좁고 측면에서 보면 넓게 지은 주택이 많은데 보통 1층은 상가로, 2층부터 5층까지 주거공간으로 활용된다. 그 1층 공간에 들어선 식당과 카페들이 좁은 실내공간을 극복하고자 마치 마당처럼 길가에 간이 의자와 테이블을 펼쳐 놓는다. 그곳에 옹기종이 모여 앉아 쌀국수와 치킨구이와 에그 커피와 쩨 (베트남식 빙수)를 나누는 것이다. 일행을 마주하기보다 옆으로 나란히 앉아, 간혹 행인과 눈을 마주치며 실내와 다른 야외의 여유로움을 즐긴다. 제법 다른 감성의 풍경이지만 유럽 노천카페의 베트남 버전이기도 하다. 좀 더 좁은 골목에서는 완전히 간의 시설로만 운영되는 노점상 형태의 분식집들도 있었고, 의자 하나 거울 하나로 게릴라처럼 열리던 바버샵도 목격되었다. 코로나 이후 종적을 감추다 이따금 출몰하던 그 많던 거리의 명물들이 내게 각인된 베트남의 첫인상이었다. 베트남의 길은 보행자만을 위해 비워지지 않는다. 그곳은 상인에게도 쉼이 필요한 이에게도 함께 할 수 있도록 열린 공간이었다.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집
베트남의 집들은 아름답고 신기하다. 어린 시절 만화와 장난감을 통해 누적 학습된 유럽식 '인형의 집'을 연상시키는 아기자기한 장식 요소가 담겨있다. 첨탑 같은 원뿔의 지붕, 아치형의 입구와 창문, 발코니에 놓인 꽃 화분이 그러하다. 좁은 대면으로 인해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모듈로 5층 높이를 쌓아 올린 모습은 일본식 반복된 정갈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처음엔 지붕 정가운데 뾰족한 침 같은 막대의 존재가, 붉은 주황빛이 많긴 하지만 제법 다양한 모양과 색상의 지붕이 눈에 띄었다. 그다음엔 정면이 아닌 측면으로 공간을 확보한 구조에서 얼굴은 정말 작은데 뒤통수가 발달한 그런 사람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러다 도시 봉쇄 단계가 높아지며 창밖 풍경에 의존한 나날을 보내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사실을 발견했다.
19층 방에서 내려다보니 이 가지각색의 개성적인 집들이 서로 너무 가깝게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나의 입체 건물로서 천장과 바닥을 제외한 4면이 노출될 수밖에 없는데 2면 혹은 겨우 1면만 확보된 집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아파트도 아닌 주택인데 내 집 바로 옆에 거의 딱 붙어 남의 집이 있는 것이다. 조망권, 사생활 침해 등 한국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이격거리를 받아들인 채 내 동네의 집들은 너무나 가까이 서로가 서로에게 포개지고 의지하며 붙어있었다. 미로 같은 골목의 탄생에 이런 기묘한 집들의 배치가 한몫한 것이다. 종종 집에서 마이크를 켜고 노래하기도 하고, 더운 날씨에 상의를 탈의한 남성들이 적지 않은 이곳에서 어떻게 이런 좁은 이웃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동네 이웃주민으로 서로 다른 골목에 살고 있는 친구들의 집에 방문하며 그에 대한 약간의 힌트를 얻었다. 접근성과 안전을 우위에 두고 큰 골목에 위치한 레지던스 원룸을 선택한 나와 달리, 좀 더 넓은 공간을 우위에 둔 친구들은 베트남 집주인의 아파트를 렌트하여 살았다. 저마다 면적과 구조와 위치가 다른 3개의 집들에서 발견한 공통점은 다른 집과의 그 애매한 거리에 키가 높은 식물을 배치했다는 점이다. 일종의 '수직정원'이라고 할 수 있는 그것은 구조에 따라 외부 창문을 통해 보이기도 하고, 실내 중정을 이용하여 구성되기도 했다. 완전히 차단될 수 없는 민망한 거리를 나뭇잎 너머로 바라보며 베트남의 집들은 그렇게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고 있었다.
열린 형제자매의 사회
에머이. 꽤 유명했던 베트남 식당의 상호였던 이 단어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베트남 식당에서 보통 종업원을 찾을 때 외치게 되는 이 단어는 동생 (Em) + ~아 (ơi)의 조합으로 연장자가 자신보다 어린 사람에게 '여기요!' 정도의 의미로 쓸 수 있다. 따라서 식당 종업원의 성별과 예상되는 나이에 따라 에머이는 사용이 적절할 수도 있고, 부적절할 수도 있는 호칭이다. 그런데 대체될 수 있는 호칭들도 모두 언니/누나 (chị ơi), 오빠/형 (anh ơi), 삼촌 (chú ơi) 같은 친족관계에 기반한 단어들이다. 오늘 처음 본 사이에서도, 심지어 외국인에게도 이 단어들은 호칭으로서 유효하게 적용된다.
회사에서 베트남 직원들에게나, 나보다 어렸던 베트남어 선생님에게 불렸던 내 호칭도 chị ơi 였다. 제법 활발한 택시기사를 만난 날이면 으레 나이와 결혼 유무, 얼마나 이곳에 살았는지 등의 호구조사가 이뤄졌고 묻기도 전에 그의 정보도 서슴없이 나눠줬다. 서구권 튜터들과 주로 진행했던 화상영어 시간에 많이 받았던 질문 중 하나가 컬처쇼크에 대한 경험이었다. 프라이버시에 대한 기준치가 다른 그들에겐 이것이 정말 쇼킹한 에피소드로 받아들여졌다. 거의 전 사회 구성원이 서로를 친족처럼 부르는 호칭의 범용성은 내게도 놀라운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생각보다 쉽게 잊혀가는 과거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이것은 우리에게 남아있기도 사라지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음식점에서 불리던 '이모', '언니' 같은 호칭은 되도록 '사장님'으로, 택시나 택배기사님들께 쓰던 '아저씨'란 말은 '선생님', 또는 '기사님'으로 깍뜻해졌다. 그렇게까지 할 수 없는 어떤 애매한 순간엔 '저기요'라는 만능어가 기다리고 있다. 이건 너무 가깝다는 서로 간의 거리에 동의하며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코로나라는 미래로의 고속열차와 베트남이라는 과거로의 타임머신이 교차하는 어느 지점에서 망각을 자각하는 순간을 만난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공존
동네 골목을 무심히 돌다가 보물 대신 꽤 당황스러운 의외의 것을 만났다. 크고 작은 집들의 중간 지대에 자리 잡은 아담한 공동묘지. 각기 다른 형태로 다채롭게 꾸민 서양의 양식과 전통적 요소를 담은 동양적 장식이 어우러진 그것은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겨우 5분이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내 기억의 시작점을 향해 내려가 봐도 이렇게 지척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평지 상에서 공동묘지를 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가끔 도시를 떠날 때면 창 밖으로 보이는 널따란 시골 들판 가운데 드문 드문 공동묘지가 출몰하기도 했다. 도시든 시골이든 이곳에서 만난 산 자와 죽은 자의 공간은 멀리 있지 않았다.
공식적인 국교가 없는 베트남에서 귀신의 존재감은 꽤 강렬했다. 아무리 금싸라기 땅에 위치했더라도 한번 귀신이 나왔다는 소문이 돈 건물은 그 어떤 시설이 들어서도 버텨내지 못한다고 들었다. 실제 회사 오피스 근처 대사관이 밀집한 미드타운 한 복판에도 오랫동안 방치된 폐 건물이 있었다. 그리고 좀 더 흔하게 포착된 일상의 풍경은 아파트 단지 앞의 대형 '화로'와 거리에서 자전거 뒤에 꽃을 한 아름 지고 있는 '플라워 셀러'였다. 베트남의 가정마다, 가게마다, 심지어 백화점의 매장 마다도 습관처럼 한 곳에 마련된 작은 '제단'이 있기 때문이다. 신선한 꽃을 바치고 향을 피우는 부지런한 정성으로 조상을 기리고 특별히 조상신을 선별하여 복을 빈다. 공부를 하러 왔다가 베트남인 아내를 만난 한국인 동료의 사례를 들면, 무당을 찾아가 가정을 위해 어떤 조상신을 골라야 할지 상담을 받았는데 외국인인 동료의 할아버지를 지목했다고 한다. 국적을 초월한 조상신 선별의 기준은 알 수 없지만 오래도록 이런 전통을 매일의 습관으로 살아가는 이곳 사람들의 바지런함이 새삼 놀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