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어찌하여 저희를 당신 길에서 벗어나게 하십니까?
세상의 시간이 흘러가듯 교회의 시간도 흘러갑니다.
매년 반복되는 대림시기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반복은 다람쥐가 뛰는 챗바퀴가 아니라,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나선형 계단이라고 합니다.
나선형 계단을 올라갈 때는 계속 제자리를 돌고 있는 것 같지만,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교회력의 시작인 대림시기가 저에게 주님께로 다가가는 나선 계단 위의 한자리이기를 희망합니다.
“주님, 어찌하여 저희를 당신 길에서 벗어나게 하십니까?” (이사야 63,17)
주님의 길에서 멀어지는 것조차 주님의 뜻이라는 듯한 이 말씀이 마음에 걸립니다.
마치, 주님이 저를 놓아주셔서, 제가 주님에게서 멀어지고 있었구나 변명을 정당화시키는 것 같습니다.
저는 아들이 둘 있습니다.
언제나 그들이 잘 되기를 기도하고,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잘 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저는 본인 스스로의 삶에 감사하며, 만족해서, 다른 사람에게 온기를 전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잘 되게 하기 위하여, 때로는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고, 가끔은 성취한 것 이상으로 칭찬도 해주고, 또 어떤 때는 제 기준 또는 사회의 기준에 맞춰 야단을 치기도 했습니다.
돌아보면, 왜 이리 해야 할 것은 많고, 안 되는 것도 많았는지 아쉽기도 합니다.
아이가 제 삶을 대신 사는 것도 아닌데, 성공과 실패를 제가 정의하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강요했었을까요?
잠시 먼저 살아보니, 어떻게 사는 것이, 어떤 길을 가는 것이 성공이라고 제 기준을 만들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지금은 많은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실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선택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 선택을 지지하는 것이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고 있습니다.
아이의 삶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옆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어렵습니다.
아이가 성인이 되었는데도 자꾸 아이의 삶으로 들어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마, 하느님도 같은 마음이 아니셨을까요?
저보다 더 강한 의지와 사랑과 믿음이 있으시기에, 우리의 삶을 판단하고 강요하지 않으시고, 옆에 묵묵히 함께 서계시는 것은 아닐까요?
저희가 당신 길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이 아니고, 그 길에서 멀어지는 우리 곁에서 계속 함께 하시며, 우리의 선택을 존중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저희가 당신 길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이 아니고, 당신 길에서 벗어나는 것조차 저희에 대한 사랑과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허락하신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언제든 제가 마음만 고쳐먹으면 바로 제 손을 잡아주시기 위해 지금도 가장 가까이에 함께 하신다고 믿습니다.
제가 아이가 손을 내미는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항상 눈을 떼지 못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손길이 항상 따뜻하게 저를 감싸고 계심이 느껴집니다.
그날이 언제인지 모르니,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어째 오늘은 제가 지쳐 잠이 들면, 어깨를 빌려주시고, 다시 눈을 뜰 때까지 기다려주실 것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