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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Jun 14. 2024

심야편의점 : 그여자 그남자의 사정 4

“고양이 밥을 안 줘서 헤어졌다구요.”

“네에..”


“뭐에요? 그 표정은?”

“아, 저는 그냥 고양이 밥을 안 줘도 이혼당할 수 있구나, 하고. 그럴 리 없지만 혹시 결혼하면 고양이 밥은 잘 챙겨줘야겠다는..”

“호호, 그거 농담 맞죠?”


외부손님과 저녁식사를 겸한 미팅이 끝나고 조금 늦게 귀가한 날이었다. 지수는 집에 오자 고양이부터 찾았다.


“뚜비야. 어딨니?”


그녀의 남편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그는 어차피 방에 틀어박혀 게임을 하고 있을 테니.

고양이는 금세 발견됐다. 힘없이 비실비실, 입에서는 거품이 조금 나온다. 지수는 화가 치밀었다. 남편방 문을 열어제치고 소리 질렀다.


“자기 또 밥 안줬어? 게임하더라도 뚜비 밥은 챙겨주라고 했잖아?”


마지못해 게임을 멈춘 남편은 짜증나는 표정으로 지수를 돌아봤다.


“어차피 잘 먹지도 안잖아? 고양이 밥 한 끼 안 줬다고 오자마자 잔소리야?”

“벌써 몇 번째야? 이번 주만 세 번이잖아!”


“세 번? 그럼 니가 세 번이나 술 마시고 왔다는 얘기네. 그것도 다른 남자하고.”

“다른 남자? 일 때문에 저녁식사에 간 걸 가지고 그렇게 꼬아서 얘기한다 이거지? 집에 오면 맨날 게임이나 하는 주제에.”


게임 얘기를 꺼내자 남편은 의자를 완전히 돌려 지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내가 게임하는 건 안 건드리기로 하지 않았나? 결혼 전에 약속했잖아. 서로 사생활은 터치 안 하기로!”


지수는 목구멍이 간질거리는 걸 느꼈다. 이제 이 말을 하면 좋게 못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혼 전에 게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예상을 뛰어넘었다. 야근 때문에 집에 늦게 오는 경우가 많아서 모른 체 넘어갈 때가 많았지만 더는 참기 힘들었다.


헤드폰 뒤집어쓰고 온라인상의 다른 게이머와 상스런 게임언어를 주고받으면서 밤 1시, 2시까지 ‘사생활’에 몰두하고 있는 남편이라는 남자. ‘모니터 뒤로 보이는 뒤통수가 꼴 보기 싫어!’


“게임중독자하고 결혼할 줄은 몰랐지! 기적의 검인지 기저귀 검인지 그거 나도 좀 보여줘봐. 그깟 게임 아이템에 24만원이나 쓰고, 그걸 싸게 샀다고 자랑했지? 진짜 한심해서.”


그날 밤, 남편은 집을 나가 시댁에서 잤다. 게임 전용 키보드와 마우스, 헤드폰까지 챙겨서.


“진짜 웃기지 않아요? 나가서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있지도 않은 가상세계에 빠져서는.”


자신의 이혼사를 간략히 설명하고 지수는 멋쩍어서 피식 웃었다.


“난 게임 하는 사람들 이해되던데.”

“네에?”


지수는 장난으로 분개하며 수영을 쳐다봤다. 수영은 조금 당황하며 말했다.


“그게 말이에요. 현실이라는 게 참 싫잖아요. 지수씨는 안 그런지 모르겠지만 현실에서 아무 재미도 없고, 위안도 얻지 못하면 가상세계에서 즐거움을 찾는 게 나쁜 걸까요?”


수영의 진지한 대답이 나오자 지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편의점에서 알게 된 남자가 자기 편 들어주지 않았다고 화를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고양이 밥을 안 줬는데..”

“그건 잘못했죠. 그리고 혼자 사는 것도 아닌데 밤낮없이 게임만 하는 것도 같이 사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아니죠.”


수영의 담담한 대답에 지수는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그..그런 거죠?”

“사실 이런 말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아뇨. 안 이상해요.”

“아직 말도 안 했는데.”


“무슨 말을 하든. 나보다는 덜 이상할 거 아니에요. 새벽에 편의점에 들러서 남친이랑 헤어졌다는 등 고양이 밥 때문에 이혼했다는 등 이런 얘기나 늘어놓고. 원래는 이렇지 않은데 너무 잠을 못 자서.”


“괜찮아요. 저도 정상은 아니니까요.”

“왜요? 아무리 봐도 정상으로 보이는데. 편의점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만 빼면.”


아마 편의점 조끼만 벗는다면 당장 대기업에 출근해도 괜찮을 만큼 깔끔한 옷차림이 나올 것이었다. 누가 심야 편의점 일을 하며 이렇게까지 단정하게 차려입을까.


“전 잠자기 위해 살아요. 모든 일상생활을 질 좋은 수면을 할 수 있게 맞춰놨어요. 회사도 잠 때문에 그만두게 됐구요. 이래도 안 이상해요?”


휴가를 떠났다. 수영은 어렵게 짜낸 휴가 내내 밀린 잠이나 푹 자볼까 했지만, 설악산으로 향했다. 잘 잘 수 있다는 확신도 없는데 이불하고 레슬링 하느니 산에 올라 맑은 공기를 좀 마시면 불면증을 줄일 수 있겠다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속초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고 첫 휴게소를 지나칠 무렵 풋잠에 들었다. 평일이라 고속버스는 거의 빈 차나 다름없었고 그르렁 대는 엔진소리와 아스팔트에 타이어 구르는 소리가 소뇌에 기분 좋은 진동을 가져다 줬다.


숙소에 도착했을 즈음, 수영은 너무 졸려서 저녁도 먹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눈을 떴을 때는 자정 근처였다. 어중간한 시간에 자버렸으니 또 잠들긴 어려울 것이고 배고프지 않았지만 가져온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머리는 어질어질, 잠을 잤다고는 하나 자는 건지 아닌 건지 의심하면서 십여 분에 한 번씩 돌아눕기를 반복했으니 숙면이라 할 수는 없었다. 평상시와 비슷하게 불량한 잠을 청했던 것이다.


케이블TV를 켜고 처음부터 끝까지 돌려보기를 서너 번, 어떤 것도 흥미를 끌지 못했다. TV를 끄고 베란다 창으로 하늘보다 더 컴컴한 산을 보며 생각했다.


‘내일은 저 산을 오르자’


언제 잠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수영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오전 10시도 넘은 시각이었다. 커튼 사이로 빔처럼 쏟아지는 강한 햇살 때문에 잠을 깬 것이다. 처음에는 10시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새벽 2시에 잠들었다 가정해도 8시간 동안 깨지 않고 내리 잔 것이다.


‘이리 오래 잔 것이 언제였더라..’


그 다음은 산에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바쁘게 씻고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간단한 배낭을 챙기는데 마음이 바빴다. 꼭 출근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드는 생각.


‘서두를 필요 있을까?’


정상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려면 이미 출발시간이 늦긴 했지만, 꼭 정상까지 올라가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를 만큼 오르고, 적당한 시간에 하산하면 될 일이었다.


나갈 채비를 하는 동작이 굼떠졌다. 느릿느릿, 거실 창을 열고 날씨를 확인했다. 화창했다. 너무 덥지는 않을까? 미세먼지를 확인했다. 초미세먼지가 나쁘다고 한다. 마스크를 쓰고 올라야 하나? 자외선이 강할 테니 모자를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거울 앞에 선 순간, 모든 게 귀찮아졌다.


설악산에 왔으니 꼭 산에 오르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그래야겠다고 생각했을 뿐. 생각은 생각이고 다르게 생각하면 된다. 한번 귀찮다고 생각하니 몸이 무겁고 침대에 눕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깔끔하게 씻고 나니 몸이 개운해서 더 잠이 오는 것 같았다.


잠시 갈등했다. 졸음을 물리치고 원래 목적을 달성할 것인가, 아니면 즉흥적으로 계획을 수정하고 누울 것인가?


미쳐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수영의 몸은 침대로 향하고 있었다. 천천히 걸으면서 배낭을 내려놓고, 윗옷을 벗었다. 잠자는데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하나하나 떼어내고 아무렇게나 바닥에 버렸다. 침대에 눕는 순간 그는 한 가지만 생각했다.


‘산에 안 가도 돼.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아. 지금 잘 수 있어 다행이야.’



“그래서 설악산까지 가서 잠만 자다 왔어요?”


지수는 눈이 동그래져서 수영에게 물었다. 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인가요?”

“아니, 잘못은 아니지만. 좀 뭐랄까. 힘들게 휴가 낸 게 아깝기도 하고.”


“저도 돌아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좀 허무하긴 했어요.”


수영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래서 불면증은? 불면증은 나았어요?”


지수는 기대를 가지고 물었다. 그녀가 최근 겪고 있는 불면증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수영이 말해줄 것 같았다.


“그게 애매해요. 잠을 못 자는 건 아닌데, 아침에 일어날 수가 없었어요.”

“어쨌든 잠은 잘 잔다는 거 잖아요. 좋아진 것 아니에요?”

“그렇지 않은 게, 일어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정말로. 너무 힘들어서 회사를 그만둬야 했으니까요.”


계속)


내일 마지막회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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