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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Jun 08. 2024

심야편의점 : 그여자 그남자의 사정 2


지수는 수영의 재치있는 답변에 살짝 웃었다. 수영은 지수가 꺼내온 캔맥주의 바코드를 찍었다.


“이거 투플러스원인데 하나 더 사시죠. 냉장고에 둔다고 상할 리도 없고 번거롭게 편의점까지 또 나올 필요도 없고.”


“왜요, 나 자꾸 보는 게 싫어요?”


“아니 그런 뜻은..”


“농담이에요. 그럼 수영씨라고 불러도 되죠? 나이도 비슷한 것 같은데. 그런데 수영씨는 심야 편의점 알바를 왜 해요? 원래 직업 아니죠?”


다시 보니 지수는 조금 취한 것 같았다. 새벽까지 혼자 술 마시다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취했다는 것을 빌미로 수영에게 얘기를 걸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질문이 많아서 어느 것에 답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아하, 의외로 깐깐한 분이시구나? 좋아요. 그럼 편의점 심야 알바를 왜 하는지만 알려줘요.”


지수는 계산이 끝났지만 금세 나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캔맥주는 가져갈 생각도 없고 수영을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이유가 있어야 하나요?”

“이유 없는 게 있나요?”


수영은 고민했다. 얼마나 진지하게 답할 것인가? 마음 같아서는 대충 대답하고 지수를 돌려보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더 시간을 뺏길 것만 같았다.


“잘 자기 위해서요.”

“네?”


“말 그대로에요. 잘 자기 위해서 심야 편의점 일을 한다구요.” 


불면증이라 해서 잠을 한숨도 못 자는 건 아니었다. 가장 나쁜 점은 아침에 일어나기가 죽을 것처럼 힘들다는 것이었다. 출근하려면 일주일에 5일은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수영은 일주일에 5번, 거의 매일 죽을 것 같은 졸음의 무거움을 감내하고 있었다.


간신히 출근에 성공해도 부팅이 덜 된 컴퓨터처럼 머리는 안 돌아가고, 모니터를 보는 눈에는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또렷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진한 커피를 흡입하다보면 원치 않는 각성효과 때문에 정작 침대에 누웠을 때 잠이 오지 않았다. 완벽한 불면의 악순환이었다. 


“주말에 실컷 자면 되잖아요.”


“이론적으로는 그렇죠. 하지만 주말에는 약에 취한 것처럼 하루종일 멍하게 있다가 일요일 오후가 되면 내일 출근해야 한다는 공포에 시달렸어요. 어떨 때는 토요일 밤부터 출근할 걱정에 잠이 안 오는 거 있죠? 웃기죠.”


“아뇨. 하나도 안 웃겨요.” 


지수도 최근에 불면증을 겪고 있었다. 심야 편의점에서 수영을 알게 된 이유도 불면증 때문이었다. 잠이 안 오면 안 자면 된다는 속편한 생각으로 혼자 맥주를 홀짝거리다가 해 뜨는 것을 보고 출근한 적도 있었다. 그런 날은 반쯤 자면서 하루를 보냈고 보내야 할 서류를 보내지 않아 담당부장에게 정식 경고를 받기도 했다.


“나도 요즘 잠을 못 자거든요. 안 그러면 왜 이 시간에 여길 오겠어요?”


수영은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럴 만큼 친한가?


“이유 안 물어봐요? 내가 그렇게 별로인가? 아니면 맨날 새벽에 와서 맥주나 사가니까 한심하게 보여서?”


“그게 아니라.. 왜 잠을 못 자요?”


어쩔 줄 모르겠다는 수영의 표정을 보면서 지수는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풋, 귀엽게 왜 그런 표정을 짓고 그래요?”

“화난 것 아니었어요?”


“화가 나긴 했지만 수영씨 때문은 아니에요.”

“그럼 누구에게?”


“있어요. 어떤 남자.” 


지수의 남자친구는 결혼을 원했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그랬다. 그러나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것도 그냥 핑계 아니었을까?


“우리 결혼할까?”

“왜?”


“왜라니 사귄지 오래됐잖아.”

“오래되면 결혼해?”


“야.. 무슨 말이 그래?”

“농담이야. 뭘 정색해? 영화 때문에 그런 거야?”


둘은 영화를 보고 나오던 길이었다. 괜한 예술영화, 동맥경화로 반신불수가 된 부인을 간호하다가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부인을 죽이고 자기도 죽는 서글픈 영화, 연기를 하는 노부부가 어찌나 연기를 잘하던지 리얼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아서 보는 내내 불편했다. 

남자친구 회사가 배급한 영화만 아니었다면 공짜 VOD로도 보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가 무슨 상관이야? 그냥 결혼하기 싫으면 싫다고 해!”


“하기 싫은 게 아니라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래. 그리고 이게 뭐야? 이벤트도 없이, 영화보고 집에 가다가 길에서. 프러포즈할 거면 제대로 하든가.”


지수는 이번에도 대충 넘어갈 줄 알았다. 남친이 결혼 비슷한 얘기를 한 것이 처음이 아니었으니 그녀를 떠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이벤트 싫다며? 그런 거 하면 연락 끊고 다시 안 볼 거라면서?”

“내가 그랬어?”


허무하게도 그게 진짜 끝이었다. 연락을 끊은 쪽이 지수가 아니라 남친이었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녀가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말이었다. 

오래된 연인들의 가장 흔한 스토리... 그런데 2년 반 사귄 것도 오래된 연인인가?


그날 그렇게 헤어진 게 민망해서 하루 이틀 연락 안 했는데 그도 연락하지 않았다. 일주일까지는 자존심 대결이라고 생각했고 2주째가 되자 짜증이 나서 연락하지 않았다. 3주째부터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내가 결혼을 안 받아줘서 헤어진 거니까 자존심은 지켰어’ 


“그게 뭐 다행이에요?”


수영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지수에게 물었다.


“내가 프러포즈했다가 헤어진 것에 비하면 진짜 다행이죠. 자존심이 얼마나 중요한데.”


수영은 편의점 벽에 붙어있는 시계를 봤다. 지수가 온 지도 30분이 넘었다.


“그래도 잠이 안 오는 것 보면 남자친구를 사랑한 것 아닐까요?”

“잠이 안 온다고 꼭 사랑일까요? 그냥 생각이 많아서 그래요.”


“어떤 생각?”

“결혼한다고 했으면 정말 결혼했을까? 그 인간 진심이 뭐였을까? 결혼하자고 할 만큼 사랑한다면 내가 좀 미적댄다고 연락을 끊어요? 그것도 말이 안 되잖아요!”


“지수씨도 연락 안 했다면서요?”

“나랑 같아요?”


수영이 멀뚱멀뚱한 눈으로 쳐다보자 지수가 또 웃었다. 원래 웃음이 많은 스타일인가?


“다 식었네. 이거 여기서 마시면 안 되죠?”


지수가 캔맥주를 잡으며 물었다.


“네. 안돼요.”


“성격 참 일관적이네요. 좋겠어요. 원래 무슨 일했어요? 국정원 같은 거 아니면 말해줘요. 나는 다 말했잖아요.” 


계속)



"A Lannister always pays his deb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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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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