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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Jun 02. 2024

파란하늘에 종말코드가 써 있어


이 이야기는 얼마 전 세계에서 동시에 발생한 종말(The END) 사건에 대해 탐사전문 노경희 기자가 사회 각 계층의 여러 인사들의 인터뷰를 통해 그 과정을 촘촘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세상이 멸망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이와 같은 심층인터뷰를 진행해주신 노경희 기자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The END  3 일전 : 3일 2시간 38분 44초..


강우열(직장인) : 언제 처음 봤냐구요? 당연히 나타나자마자 봤죠. 나도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습니다. 말이 안 되니까요. 갑자기 하늘에 그렇게 큰 글씨가 나타났는데 그게 진짜라고 어떻게 믿어요? 기자님도 봤으니 알 거 아니에요? 하긴 안 볼 수가 없지. 하늘만 보면 전 세계 어디서든 볼 수 있는데. 


신혜윤(직장인) : 저는 퇴근할 때 처음 봤어요. 일할 때는 개인 사무실에서 혼자 작업하는 편이라. 집중하기 위해서 sns도 무음으로 하고 급한 거 아니면 전화도 절대 받지 않거든요. 그러다 보니.. 저녁 먹으러 나갈 때 하늘에서 처음 봤어요. 


기자 : 처음 하늘에 떠 있는 The END 글씨를 봤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신혜윤(직장인) : 새로운 스타일의 광고라고 생각했어요. 밤하늘에 그렇게 밝은 글씨가 켜졌는데, ‘The END’라고 적혀있고 그 옆으로 빠르게 초시계가 카운트다운 되잖아요. 그래서 대형 게임업체에서 신규 게임 출시를 앞두고 하늘에다가 대형 이벤트를 하는 줄 알았죠. 하지만 좀 이상하긴 했어요.


기자 : 뭐가 이상했어요?


신혜윤(직장인) : 소형 드론 수천 개로 하늘에 글자를 만든 거면 보는 위치에 따라 글자의 각도나 사이즈가 변해야 하는데 그 큰 글씨가 항상 정면에서 보는 것처럼 똑같은 모양으로 보였거든요. 나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항상 정면으로 보일 수 있는 방법이 있겠어요? 


강우열(직장인) : 당연히 난리가 났습니다. 어딜 가나 그 이야기뿐이었어요. 저게 뭐냐? The END가 뭘 의미하는 거냐? 카운트다운이 다 끝나서 0이 되면 어떻게 되는 거냐. sns도 온통 그 이야기뿐이고 유튜브에서도 The END가 뭔지 추측하는 방송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기자 : 제일 처음에 The END 종말론을 제기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기억나세요?


강우열(직장인) : 유튜버 키리에.


신혜윤(직장인) : 키리에가 맞는 것 같아요.  


기자 : 그 종말론을 믿었어요?


강우열(직장인) : 에이, 말도 안 됩니다. 그런 걸 누가 믿겠어요?


기자 : 그래도 동영상 조회수가 엄청났었는데.


강우열(직장인) : 재미로 보는 거죠. 댓글도 재밌고. 사실 댓글 때문에 보는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기자 : 유튜버 키리에가 제기했던 종말론을 다시 한번 설명해 주시겠어요? 


신혜윤(직장인) : 제가요? (조금 머뭇거린다. 그러다가 결심한 듯) 가장 처음 버전 말하는 거죠? 그때는 별 거 없었어요. 카운트다운이 끝나서 0이 되면 그냥 세상이 셧다운된다는 거였죠.


기자 : 셧다운이요?


신혜윤(직장인) : 세상의 종말이요. 저도 게임업계에 종사하다 보니 ‘종말’이라는 말보다는 ‘셧다운’이 먼저 나오네요. 후후. 


강우열(직장인) : 그런데 하필 남은 시간이 정확하게 일주일이었던 게 문제였습니다. The END가 처음 나타났을 때 마침 하늘을 찍고 있던 개인 유튜버가 공개한 영상인데요. 이것 보세요? 보이죠? 처음에는 정확히 7일 0시간, 0분, 0초로 시작했어요. 더 말도 안 되는 건, 이건 우리나라 버전이고 미국은 7days, 0 hours, 0 minutes, 0 seconds 로 표시됐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유튜브 보면 일본어 버전, 스페인어 버전 전부 다 있어요.


기자 : 남은 시간이 7일부터였다는 게 왜 문제가 되는 걸까요?


강우열(직장인) : 기자님도 아시면서 묻는 거죠? 이건 방송이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내가 말할 테니 틀리는 것 있으면 그쪽(신혜윤)이 정정해 주는 걸로. 자, 생각해보세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는데 7일 걸렸다고 돼 있잖아요. 


신혜윤(직장인) : 6일 동안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제7일에는 안식함으로써…


강우열(직장인) : 아 참. 세상이 다 망한다는 판국에 그거나 이거나. 어쨌든 쉬는 날 포함해서 일주일. 이러면 맞는 거죠? 그런데 7일이 다 지나고 The END면 뭐겠어요? 세상의 종말 아니냐 이거죠. 만드는데도 7일, 끝내는데도 7일, 앞뒤가 딱 맞잖아요!


기자 : 카운트다운 시간, 그러니까 종말까지 남은 시간은 나라별로 언어를 다르게 했는데 그러면 ‘The END’는 왜 다 영어로 돼 있을까요?


강우열(직장인) : 사실 그것도 논란이 되긴 했어요. 우리나라는 ‘끝'이라고 하고 프랑스는 ‘fin’, 독일은 ‘Das Ende’가 맞는 거 아니냐. 그래서, 이런 실수가 있는 것 보면 역시 이건 어떤 천재적인 인간의 장난이다는 말이 돌기도 했습니다.  


기자 : 천재의 장난이요? 


신혜윤(직장인) : 사실 하늘에 글씨를 쓰는 건 굉장히 고난도의 테크닉이 필요하거든요. 어두운 밤하늘에는 그나마 대규모 드론을 날린다든가, 미세화약을 쓴다든가 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지만 밝은 대낮에 글씨를 쓰려면 홀로그램을 만드려고 해도 빛이 산란할 수 있는 최소단위의 입자가 필요한데 그런 입자는 바람에 날아갈 테니까 특정 공간에 가둬두기 어렵구요. 눈으로 관측하기 어려운 나노머신을 사용한다면 가능하기는 해도, 그런 나노머신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지만, 그렇다 해도 언제 어디서 봐도 같은 크기, 같은 각도의 글자를 구현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니까요. 


강우열(직장인) : 하지만 그런 건 지금 우리가 아는 수준의 테크닉이고 아인슈타인이나 애드거 튜링 같은 역대급 천재가 나타났다면 가능하지 않겠느냐, 자신의 기술을 뽐내고 자랑해서 나중에 대박을 터트리려는. 진짜 누가 한 거지? 빨리 거기 취직해야 하는데.


기자 : 강우열씨는 아직도 종말론을 안 믿으시는군요?


강우열(직장인) : 그건 아니고 반반이에요. 망할 수도 있고, 안 망할 수도 있고. 


기자 : 그런 것 치고는 굉장히 태연하신데. 


강우열(직장인) : 뭐 세상이 정말 망하면 나 혼자 죽는 건 아니니까 상관없고, 안 망하면 안 망하는 거니까 심각해질 필요 없는 거라 생각합니다. 



The END  2 일전 : 2일 4시간 55분 21초..


베르나르도(신부) : 우리에게 남은 건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뿐입니다. 세상의 종말을 앞두고 나약한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게 없기 때문입니다.


기자 : 신부님 말씀대로 이제 이틀 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모두 거둬들이시는 것이라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베르나르도(신부) : 하나님의 역사에 이유를 묻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기자 : 그래도 하나님의 과업이라고 확신하는 이유를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베르나르도(신부) : 저기 하늘에 새겨진 The END 라는 선명한 글씨. 저것 이상으로 뭘 말하라는 말입니까?


기자 : The END에 대해서는 아직 과학자들 사이에서 논쟁 중입니다만 이론적으로 하늘에 글자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베르나르도(신부) : 나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정부에서 아무리 지워보려고 해도 성공한 나라가 하나도 없다면서요? 저게 만약 나노머신이든 뭐든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면 조금이라도 손상이 돼야 정상인데 안 그렇잖아요? 게다가 어젯밤 밤하늘에 별이 전부 사라진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 실제 하늘의 The END 카운트다운이 2일 0시간 0분 0초 남았을 때 밤하늘에 모든 별이 일시에 사라졌다. 역시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현상이었다. :: 


기동식(물리학자) : 밤하늘에 별이 사라진 이유를 알고 싶다구요? 너무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현재 전 세계 물리학자들이 연구하고 있으니까 조만간 합리적인 이유가 밝혀질 것입니다. 다만, 하늘에 별이 없어진 현상이 지구종말과 관계있다는 증거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기자 : 그래도 전 세계에서 관측되는 별이 하나도 없다는 건 미세먼지 같은 단순한 기상 이상 현상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 아닌가요? 더구나 하늘의 달은 밝게 보이는데 말이에요.


기동식(물리학자) : 여러 가설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암흑물질 이상현상이라는 의견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기자 : 암흑물질 이상현상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시죠.


기동식(물리학자) : 우리 우주는 5%의 보통물질과 25%의 암흑물질, 70%의 암흑에너지로 이뤄져 있습니다. 즉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5%에 불과하고 나머지 95%는 존재하지만 우리 눈에 관측되지 않는 것인데요. 그중 암흑물질이 태양계 외부와 우리를 격리 시키고 있어서 태양계를 벗어난 천체는 관측되지 않는다는 가설입니다. 실제 육안으로 잘 보이지 않아도 목성이나 토성 같은 태양계 내의 행성들은 여전히 잘 보입니다.               


기자 : 그러면, 별이 사라진 것과 관계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밤하늘을 밝히고 있는 The END 현상에 대해서는 하실 말씀이 없으신가요?


기동식(물리학자) : 저건 사회혼란을 목적으로 조성한 음모이거나, 다른 목적의 개인이나 단체가 저지른 장난이 분명합니다. 종교계에서는 자꾸만 저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보고 종말론과 연결하고 있는데 그건 넌센스입니다. 아니, 어떤 하나님이 몇 시간 후에 지구가 망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하늘에다 카운트다운을 한답니까? 대피할 시간을 주는 것도 아니고. 


기자 : 그럼 박사님은 The END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보고도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까?


기동식(물리학자) : 과학자 입장에서 근거가 없는 것을 두려워할 수는 없습니다. 솔직히 인류가 그렇게 쉽게 없어지거나 망할 수 있나요? 소행성이 오는 것도 아니고 초대형 화산이 터진 것도 아닌데요. 다만 하늘에 글자를 만든 저 기술이 궁금하기는 합니다. 저런 기술이 앞으로 상용화되면 이제 밤하늘도 맘대로 못 볼 겁니다. 하늘에 온통 광고가 깔린다고 생각해봐요. 별이 안 보이는 건 아마 문제도 안 될 겁니다.



키리에(유튜버) : 잠시만요. 지금 기자 인터뷰나 할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지만 그래도 워낙 유명한 분이라고 하시니 같은 유명인 입장에서 돕겠습니다. 그럼, 최대한 짧게 물어보세요. 시간 없으니까. 


기자 : 종말론 최초 유포자로서 지금 이 혼란에 대해 책임을 느끼지 않나요?


키리에(유튜버) : 유포자라니요? 지금 이 상황에서 가짜뉴스 뭐 이런 얘기라도 하게요? 그리고 내가 왜 책임을 져요? 이 세상이 쫑나는게 내 책임이라도 된답니까? 


기자 : 확실하지도 않은 현상을 놓고 이 세상이 셧다운될 거라고 계속 방송하고 있으니까요.


키리에(유튜버) : 종말이 오고 있으니까 종말이라고 말하는데 뭐가 안 확실해요? 하늘에 저렇게 크고 정확하게 적어 놨잖아요. The END, 어디 보자. 지금은 얼마 남았나? 같이 볼까요? 저기 봐요. 1일, 16시간, 0분, 5초 4초 3초 2초 1초, 땡. 자, 이제 종말까지 딱 40시간 남았네요. 곧 방송할 시간인데 계속 물어볼 건가요? 나 진짜 시간 없는데. 


기자 :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요. 오늘 방송에서는 지금까지 제기된 종말론과는 완전히 다른 종말론에 대해 얘기할 거라고 들었는데. 


키리에(유튜버) : 기자님도 예고편 보셨구나! 거봐, 그거 다 보시면서. ㅋㅋ. 진작에 그렇게 말하지. 뭐, 곧 방송이니까 셀프스포 못할 것도 없죠. 오늘 방송이 뭐냐하면, 우리가 사실은 게임 속에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저 The END는 게임이 끝난다는 일종의 ‘공지’ 에요. 시스템 셧다운까지 40시간 남았으니 준비해라. 어때요? 맞는 거 같죠?


기자 : 이 세상이 게임이다? 그러면 우리가 게임 캐릭터라는 말인가요? 만약 게임 캐릭터라면 실제 우리는 다른 세상에서 게임을 하고 있다는 인식이 있어야 하는데 저는 전혀 모르겠는데요. 


키리에(유튜버) : 우리는 플레이어가 아니라 NPC니까요. 롤 안 해봤어요? 보기에는 플레이어와 똑 같지만 게임을 수행하는 게 아니라 플레이어를 도와주고 같은 일만 반복하는 게임 속 가짜 캐릭터!


기자 : 그러면 우리가 진짜 살아있는게 아니라 일종의 인공지능이라는 거죠? 심지어 자기가 인공지능이라는 것도 모르고 진짜 인간이라고 생각하면서.


키리에(유튜버) : 바로 그거죠. 원래 NPC가 자기가 NPC인 거 알 것 같아요?


기자 : 그래도 그건 좀 오버 같은데요. 우리가 게임 속 캐릭터인데 그걸 모른다고 쳐도 이렇게 크게, 이렇게 정교하게 세계를 만들 필요가 있을까요? 그래봐야 게임인데. 게다가 우리가 전부 NPC라면 이 광대한 게임의 플레이어는 누굴까요? 게임이면 가장 중요한 플레이어가 있어야죠.


키리에(유튜버) : 굿포인트! 꽤 유명한 탐사전문 기자라고 하더니 진짜구나. 당연히 플레이어가 있죠. 


기자 : 플레이어가 누구인데요?


키리에(유튜버) : 본인이 말 안 하면 정확히는 모르는데. 다만 추측은 하고 있는데. 이를 테면 빅스타들 말이에요. 재벌2세 같은 사람들도 그렇고, 잘나가는 연예인들, 그런 사람들은 전부 플레이어라고 보면 돼요. 그동안 이상하지 않았어요? 왜 저들은 인생을 즐기면서 뭐든 하기만 하면 잘되고 성공하고 돈도 펑펑 버는데, 우리는 맨날 노력해도 여기서 여기, 이 모양 이 꼴인지. 답 나오죠? 왜다? 우리는 NPC고, 저들은 플레이어니까. 저들은 이 게임을 즐기는 게임의 주인공이고 우리는 플레이어를 즐겁게 만들 목적으로 만들어진 엑스트라니까. 다 설명되죠?


강우열(직장인) : 그게 말이 되는 소리에요? 기자님도 그 헛소리 믿는 거 아니죠? 내가 게임 캐릭터라니. 그것도 NPC. 말도 안돼. 이렇게 생생한 NPC가 어딨어요? 그러면 그동안 내가 쓴 수많은 보고서랑 결재서류, 그 전에 대학 가려고 본 수능, 모의고사도 전부 가짜라는 것인데. 어이없다. 내 여자친구는요? 사랑에 빠지는 NPC가 있나요? 내가 여친 사랑하는게 다른 플레이어 게임 진행에 아무 상관도 없는데 그런 걸 왜 합니까? 


기자 : 하늘에 별이 없어졌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강우열(직장인) : 별 좀 안 보이는 게 뭐 대수라고요. 별이 없다고 불편한 것도 없잖아요. 달이 없으면 조수간만이나 뭐 이런 거 때문에 큰일이 나겠지만. 별이 없으면 그냥 없는 거잖아요.


키리에(유튜버) : 별이 없어진 것도 이 세상이 게임 속이라는 증거에요.  과학자들은 암흑물질 이상현상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암흑물질도 원래 안 보이는 거라면서요? 그럼 보이지도 않는 걸로 별이 안 보이는 것을 설명한다구요? 그거야 말로 넌센스 아닌가요? 


베르나르도(신부) :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이 모든 건,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경고 하시는 겁니다. 그분의 권능으로 하늘의 반짝이는 것들을 가리고 우리가 스스로 죄를 깨우치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겁니다. 하루빨리 우리 모두 회개해야 합니다. 오! 주여!


키리에(유튜버) : 별이 없어진 건 게임 시스템에서 가장 필요없는 리소스부터 감축하고 있는 과정입니다. 우주단위로 게임을 운영하다가 이제 태양계 단위로만 운영하면 되니까 리소스를 얼마나 줄일 수 있겠어요. 이제 점점 더 줄어들 거에요. 달도 없어지고, 구름이 없어지고, 바다에서 물고기가 없어질 수도 있겠죠. 두고 봐요. 내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강우열(직장인) : 난 진짜 방송에서 저 X만 안 봐도 소원이 없겠어요. 저런 건 왜 정부에서 안 막죠? 저 자식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시위가 얼마나 많은 줄 아세요? 시끄러워서 밖에 나갈 수가 없어요.


/NPC도 인격이 있다. 시스템 관리자는 응답하라/ 

/게임 셧다운을 반대한다. 일방적인 게임 중단을 중단하라/


이게 다 뭐에요? 우리가 진짜 NPC라고 믿는 거잖아요. 


신혜윤(직장인) : 프로그래머 입장에서 키리에의 주장이 완전히 말도 안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보다 월등한 기술력을 가진 상위의 존재가 있다면 우리를 가지고 게임을 하고 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꼭 게임일까요? 애초에 이 모든 것이 게임이라고 생각하는 게 우리의 선입견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기동식(물리학자) : 우리가 게임 속 NPC다. 기발한 아이디어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론적으로 완전히 불가능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 정도 정교하게 구현하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리소스가 필요한 건 분명합니다. 확실한 건 저는 플레이어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전혀 그런 인식이 없으니까요. 기자님은 혹시 플레이어를 만나 보셨나요? 그렇다면 확실해질 텐데. 


IW(배우 겸 가수) : 제가 이 게임 플레이어라구요?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요? 저도 하늘의 숫자를 볼 때마다 섬뜩하고 무서워 죽겠어요. 이제 The END가 하루 정도 밖에 안 남았는데 정말 종말이 오면 어쩌죠? 여태까지 한 거라곤 노래 연습하고 춤 배우고, 콘서트하고.. 지옥 같은 스케줄 소화하느라 먹고 싶은 것도 맘대로 못 먹고, 즐기지도 못하고, 여행도 많이 못 가봤는데 이대로 세상이 끝나면.. 말도 안돼. 진짜 아니겠죠? 저거 그냥 장난 같은 거겠죠?


한재윤(S그룹 재벌3세) : 내가 게임 플레이어? 그런 헛소리 할 거면 바쁘니까 여기서 인터뷰 끝냅시다. 내가 플레이어라면 뭐 하려고 M&A 한다고 이렇게 개고생합니까? 그냥 몰디브에 개인 섬이나 하나 사서 왕처럼 살지. 우리 회사 주가 보세요. 4일 만에 주가가 30% 넘게 빠졌어요. 내일 모레가 지구종말이고 내가 플레이어고 게임 셧다운이면 내가 한가하게 주가나 보고 있겠습니까? 



The END  1 일전 : 1일 2시간 37분 10초


키리에(유튜버) :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 하고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고 내 방송을 중단해요? 정부가 그럴 권리가 있나요? 


기자 : 사람들이 스스로 NPC라고 믿게 된 게 키리에씨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하나요? 


키리에(유튜버) : 그러면 기독교 믿는 사람이 자살하면 전부 설교한 목사 탓인가요? 누가 믿으라고 강요했어요? 자살하라고 했냐구요? 그리고 어차피 내일이면 다 알게 될 텐데 궁금하지도 않나? 죽긴 왜 죽어? 세상이 끝나는 걸 볼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된다고..


기자 : 만약 내일 종말이 안 일어나면 책임질 건가요?


키리에(유튜버) : 기자님 진짜 이상하시다. 종말이 안 일어난 게 왜 책임질 일이에요? 모두에게 좋은 거지. 


강우열(직장인) : 솔직히 하루 남았다니까 조금 쫄리긴 해요. 일도 손에 안 잡히고, 오늘 내일 휴가 냈습니다. 다들 비슷해요. 부서에 절반은 휴가 냈다고 하던데. 어쨌거나 내일만 지나면 이것도 다 끝이니까 하루종일 TV 보면서 배달음식 시켜 먹고 시간 보내다 보면 다 끝나겠죠. 설마 진짜 세상이 끝나기야 하겠어요? 내일 망할 거면 지금쯤 전조가 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하늘에 별만 안 보인다 뿐이지. 달라진 것도 없고. 자살하는 사람 많다고 뉴스는 봤어요. 그리고 실종자들이 많이 늘고 있다고 하지만, 그야 심약한 사람들이 어디 숨어 있는 것일 수도 있고. 


기자 : 여자친구는 뭐라고 해요? 강우열씨와 똑 같아요?


강우열(직장인) : 제 여자친구요? 모르겠어요. 어제부터 연락이 안 돼서. 잘 있겠죠. 지금 연락해 볼까요? (전화 건다) 안 받네. 왜 이러지? 지금 꼭 전화해야 하는 건 아니죠? 왜요? 전화 좀 안 받는다고 혹시 실종이나 자살했을까 봐 그래요? 어휴, 절대 아니에요. 전혀 그런 스타일 아니거든요. 그제도 클럽에서 완전 재밌게 놀았다던데. 정말 세상 끝날 것처럼. 


베르나르도(신부) : 실종자가 늘고 있는 것, 그건 실종이 아닙니다. 휴거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쓸모를 찾은 인간들을 미리 거둬 들이는 것이죠. 축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아멘. 


기자 : 그러면 신부님은 왜 휴거를 안 받으셨다고 생각해요?


베르나르도(신부) : 저는 다른 쓸모가 있으니까요.


기자 : 어떤?


베르나르도(신부) : 끝까지 이곳에 남아서 기자님을 포함해서 여러분 모두가 구원 받을 수 있게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키리에(유튜버) : 대규모 실종이 아니라 플레이어들이 하나둘 로그아웃하는 거에요. 이제 게임이 곧 끝날 거라는 공지 나왔으니까 캐릭터 정리하고 나가는 거죠. 우리도 망겜 들어가면 그러잖아요.


기자 : 그동안 방송에서 한 주장대로라면 재벌이나 유명인사들은 플레이어고 게임이 끝나기 전에 로그아웃할 테니 다 실종됐어야 하는데 아직 그런 뉴스는 없는데요. 남아있는 셀럽도 많구요.


키리에(유튜버) : 에이, 그런 인싸들이 나 없어져, 이러면서 없어지나요? 그들이 사라져도 아무도 모르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리고 남아있는 셀럽들이야 나름의 사정이 있을 수도 있고. 솔직히 게임 끝날 때까지 로그아웃 안 한다고 실제 죽는 건 아니잖아요.


기자 : 이제껏 내가 인터뷰한 사람들 중 플레이어라고 말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 중에는 톱가수 IW도 있어요.  


키리에(유튜버) : 당연하죠. 그럼 플레이어가 나는 플레이어고 너희들은 NPC다 이렇게 말하나요? 


신혜윤(직장인) : 제 생각은 좀 달라요. 만약 이게 정말 어떤 가상세계 속이라면, 플레이어도 자신이 플레이어라는 인식 자체가 없을 수도 있어요. 


기자 : 그게 무슨 말씀이죠? 좀 더 자세히 설명을.


신혜윤(직장인) : 꿈을 꾸다 보면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모를 때가 더 많잖아요. 키보드 같은 디바이스를 이용하는 게임이 아니라 루시드 드림 장치 같이 의식을 직접 연결하는 방식이라면 게임 중에 게임을 하고 있다는 생각 자체를 잊을 수도 있어요. 가상세계에 완전히 몰입하게 만드는 거죠. 기술적으로 가능해요. 


기자 : 그러면 셧다운될 때까지 본인도 자기가 플레이어인지 NPC인지 알 수 없을 수도 있다는 말씀이네요. 


신혜윤(직장인) : 이론적으로 그렇죠. 만약 로그아웃이 꼭 필요한 서비스라면 특별한 방식으로 암시를 걸어서 자각하게 만들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한데... 저 카운트다운이 그런 용도로 쓰이는 것이라면..


 

The END  당일 : 0일 0시간 0분 10초



전 세계인이 지켜보는 중에 The END 카운트다운이 정확히 10초 남았다. 전세계 모든 사람들이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숨죽여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보고 있다. 


9초

하늘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대부분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미세한 차이를 알아챈 사람들도 있다.


8초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그중 몇몇은 남들 눈치를 보며 슬쩍 자리를 피했다.


7초

대낮에 희미하게 떠 있던 달이 사라졌다. 모두 카운트다운만 보고 있어서 눈치채지 못했다.


6초

하늘에 모든 구름이 사라졌다. 맑은 날에 종종 있는 일이라 신경 쓰지 않았다. 


5초

미세한 바람까지 완전히 멈췄다. 카운트다운에 긴장한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4초

대기 온도가 정확히 상온 18도로 세팅됐다. 갑자기 바뀐 기온에 서늘함을 느끼는 사람이 많았다.


3초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완전한 정적상태! 전 세계에 소리가 사라졌다. 


2초

모든 사람들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화면이 정지한 것처럼. 그 어느 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1초

하늘이 꺼졌다. 완전한 블랙이다. 


0초

순식간에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공중에 떠 있던 카운트다운 글씨가 사라졌다.


“뭐야? 어, The END가 없어졌다! 카운트다운이 사라졌어!”

“그냥 없어지면 끝이야? 종말 아니야? 결국 장난이야?”


거짓말처럼 전 세계적인 The END 현상은 하늘에서 사라졌고, 밤하늘에 별도 다시 나타났다. 연구자들은 전무후무한 The END 현상의 원인에 대한 조사를 진행 중이고, 유튜브와 sns에서는 여전히 각종 해석과 음모론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또한 실종된 사람들 중 일부는 돌아왔지만 여전히 실종 상태인 사람들도 많았다. 


The END 현상의 후유증은 상당해서 원래의 일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복귀가 어려운 구성원이 많았다. 특히 전문영역에서 업무수행능력은 심각하게 떨어져 재교육을 실시하는 기업과 기관이 급증했다. 


한 설문에 따르면 전체 사회 구성원의 51%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증에 시달리며 업무와 일상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구체적인 실종자 신원이 집계됐는데 그중에는 이번 인터뷰 조사에 응했던 신혜윤씨가 포함됐다. 또한 인터뷰를 진행한 노경희 기자 역시 연락두절 상태로 현재 소재 파악이 되지 않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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