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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Jun 07. 2024

심야편의점 : 그여자 그남자의 사정 1

밤 11시 정각, 휴대폰 알람 소리가 울렸다. 알람 소리는 작은 소리부터 시작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커지는 것이었는데 수영은 보통 첫 소절에 눈을 떴다. 그나마 알람을 듣고 눈을 떴다면 다행이다. 다섯 번에 네 번 정도, 수영은 알람이 울리기 전에 잠을 깨고 알람이 울리길 기다렸다. 눈을 떴다면 그냥 일어나도 되지만 그에겐 규칙이 있었다.


‘알람 소리 전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샤워와 면도를 하고, 스킨에 로션, 에센스까지 정성 들여 얼굴에 발랐다. 아무래도 밤낮이 바뀐 야간 알바를 하다보면 피부가 망가질 수 있다는 편의점 경력자들의 조언을 따르는 것이다. 물론 그 경력자들은 모두 인터넷 블로그에만 있었다.


그래도 태양을 볼 일이 없어 아침에 출근할 때 비하면 선크림을 바르는 절차가 빠졌다. 일주일에 3일 정도는 가벼운 남성 향수를 뿌리기도 했지만 그나마도 지금은 하지 않는다.


“이거 무슨 냄새야? 술 냄새?”


술은 지가 마시고 들어와서는 편의점 종업원에게 술 마셨냐며 시비를 거는 진상 손님을 몇 번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매번 출근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지하철 막차를 타고 직장으로 향하는 아이러니라니.. 습관적으로 스마트폰 유튜브 앱을 열었다. 이제 그가 관리하는 채널도 아니면서 조회수와 댓글, ‘좋아요’를 확인하고 유사한 채널의 동영상을 체크했다. 쓸데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화면을 스크롤하고 동영상을 누르는 습관을 서둘러 고치지는 않기로 했다.


‘그럼 다른 일들은? 쓸데 있는 일인가?’ 


수영의 전 직장은 한 가지만 빼면 나름 괜찮은 곳이었다. 유튜브 채널의 수익을 분석하고 콘텐츠 저작권을 관리하는 전형적인 사무직이지만 시간이 남을 때는 파일럿 삼아 직접 제작한 동영상을 업로드하면서 나름 창의적인 작업을 할 수도 있었다.


월요일과 수요일, 정기회의를 빼면 동료들과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좋고 근무시간 중에 ‘최신 트렌드’ 파악을 핑계 삼아 각종 동영상을 자유롭게 시청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세상 전부였다. 27인치 모니터 3개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그가 얻을 수 있는 정보도 모두 그 속에 있었다. 너무 많은 동영상을 보다 보니 가끔은 동영상 속의 세상이 실제 세상 같은 착각도 생겼다. 그러던 즈음 불면증이 재발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5분쯤 걸으면 주거용 오피스텔이 밀집한 상업지구가 나왔다. 그중 중간 크기의 오피스텔 1층에 위치한 편의점이 수영의 새 직장이었다. 수영은 금요일과 일요일, 화요일까지 주3회 심야편의점에서 일하며 최소한의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었다.


11시 55분, 도착. 교대를 기다리던 편의점 종업원이 세상에서 가장 환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오늘도 정확히 5분 전 도착이네요.”


수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대답하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그저 인사 같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수영은 그저 고개를 꾸벅하고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수고하세요.”


딸랑하는 방울소리와 함께 앞선 근무자가 편의점을 떠났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그녀는 이제 집에 가서 휴식을 취한 뒤 아침 일찍 학원으로 향할 것이다. 수영은 그녀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처음 인사할 때 이름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한데..


가장 먼저 할 일은 유통기한이 끝난 폐기상품을 정리하는 일이다. 다행히 오늘은 그리 많지 않았다. 김밥 둘에 도시락 하나, 도시락은 수영이 좋아하지 않아 그냥 버리고 김밥은 챙겼다. 점주는 웬만하면 폐기상품을 먹지 말라고 하지만, 김밥은 먹기도 간편하고 영양성분도 골고루 들어있는 편이어서 수영이 좋아하는 메뉴였다.


수영의 앞 근무자는 경력도 많고 성실한 편이어서 수영이 할 일은 별로 없는 편이었다. 새벽 3시쯤 주마다 발주해서 들어오는 물품이 도착하면 창고에 넣고 정리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 후에는 운이 좋다면 아침까지 손님 하나 없이 혼자만의 차분한 시간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었다.


수영은 카운터에 앉아 허리를 펴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잠을 자려는 것이 아니었다. 유튜브에서 본 대로 ‘명상과 호흡’을 하려는 것이었다. 아랫배에서부터 호흡을 천천히 끌어올려 정수리에 가두고 숨을 멈춰 온몸에 숨이 퍼져나가게 하는 방식이다. 이런 호흡법이 무협만화처럼 단전에 내공이 쌓이게 하거나 불교의 깨달음으로 인도하지는 않겠지만 불면증에는 도움이 됐다. 호흡에만 집중하고 머릿속을 계속해서 비우다보면 의식이 빠져나가고 무의식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다.


여기저기 찾아본 바로는 꿈속의 세상은 무의식의 세상이었다. 그곳에서 ‘나’라고 인식하는 주체는 객체로서의 ‘나’, 언제나 주체인 현실에서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


‘딸랑’ 소리와 함께 편의점에 손님이 들어왔다. 명상은 끝났다. 수영이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였다.


“미안해요. 잠이 오지 않아서.”


지수는 수영의 호젓한 시간을 자신이 방해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들어오기 전 유리창 너머로 수영이 눈을 감고 꼿꼿이 앉아 있는 것을 봤던 것이다. 그녀는 건너편 오피스텔에 거주하고 있는 30대 초반 직장인이었다.


“오늘도 늦었네요.”


수영은 손님에게 필요없는 잡담을 하지 않지만 지수에게는 가벼운 미소로 답했다. 그가 야간 편의점 일을 시작한 후 지수는 꼭 새벽 비슷한 시간에 편의점을 방문했다. 지수는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며 수영에게 물었다.


“이름 정도는 물어도 되죠? 오해하지 마세요. 꽤 자주 보는 것 같은데 볼 때마다 그쪽, 이쪽, 이렇게 호칭하려니 그게 더 부담이어서 묻는 거니까요. 가짜 이름도 상관없으니까 아무거나 알려줘요. 전 지수에요. 윤지수. 보다시피 잠 못 드는 직장인이구요.”


“김수영입니다. 잠자길 포기한 직장인이죠. 보다시피.”


지수는 수영의 재치있는 답변에 살짝 웃었다. 수영은 지수가 꺼내온 캔맥주의 바코드를 찍었다.


계속)


"A Lannister always pays his debts"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구독에는 구독!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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