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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Jun 01. 2024

Do u miss me

나의 이야기는 언제나 이 한줄의 경구에서 시작된다.

"거짓을 바라는 사람에게는 거짓을 팔아야 한다. 그래야 돈이 생긴다."


슬프게도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거짓이 아니다. 그래서 돈은 포기한다. 

추억은 아니며 감성팔이는 더더욱 아니다. 

후회이며 뒤늦은 고백일뿐이다. 


뭔가 잘못된 게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기억'의 책임이다.





장마와 함께 찾아온 무더위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 무렵, 그날 아침은 단 하루뿐이었지만 가을이 찾아왔다. 나는 여름 내내 굳건히 닫혀있던 작업실의 큰 창문을 열어젖혔다. 에어컨 필터를 통해 실내순환을 무한반복한 공기가 너무 건조해 입안이 갈라질 지경이었다.


창을 열고 오랜만에 맛보는 자연바람의 신선함을 목과 이마에 느끼려는 순간, 커다랗고 검은 물체가 휙하니 날아들었다.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라 놀랄 틈도 없이 무엇인지 살펴보니 그건 비둘기였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새 한 마리, 비둘기라는 것은 알지만 암컷인지 수컷인지도 분간할 능력이 되지 않는 나로선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이 작지 않은 크기의 무단 침입자를 창밖으로 쫓아내야 했다. 그러나 그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양손에 책과 우산을 들고 비둘기를 몰아냈지만 녀석은 창이 아닌 쪽으로만 계속 날아다녔다. 더구나 눈앞에서 퍼드득거리는 비둘기의 날개짓은 생각 보다 훨씬 위협적이어서 나는 비둘기가 아니라 꼭 독수리를 쫓아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설픈 내 손놀림을 비웃는 것처럼 작업실 곳곳을 유유히 날아다니던 비둘기는 마침내 컴퓨터 키보드 앞에 안착했다. 


“그건 안돼!” 


컴퓨터는 조금 전 종합편집을 끝낸 광고동영상 최종본의 랜더링을 돌리는 중이었다. 자칫 비둘기가 키보드를 건들기라도 해서 잘못된다면 며칠 치의 작업분량이 사라지는 것이다.


비둘기가 사람말을 알아들을 리 없지만 절박한 내 외침이 통했는지 녀석은 목을 뱅그르 돌려 나를 힐끔 보고 눈을 한번 깜빡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날개를 펼쳐 창밖으로 휘리릭 날아갔다. 그렇게 쫓을 때는 꿈쩍도 않더니.


잠시 멍한 기분으로 비둘기가 날아간 파란 하늘을 눈으로 쫓았지만 녀석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말 없이 사라진 여자친구와 똑같이. 


/어디 좀 다녀올게. 찾지마./ 


그녀는 어디로 갔는가? 처음 며칠은 늘 그렇듯 짧은 여행을 떠났다고 생각했다. 내가 편집작업에 들어가면 최소 이틀은 밤낮없이 작업실에 틀어박힌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녀도 종종 말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일주일째 연락되지 않자 그녀가 남긴 쪽지를 유심히 살펴보게 됐다.


어디 좀 다녀온다더니 ‘어디’가 어디지? 전화는 꺼져있고 카톡도 읽지 않았다. 일단 잠수타면 연락이 끊긴 적도 꽤 있었던 터라 2주가 넘을 때까지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3주가 넘어가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나, 차인 건가? 아니다. 쪽지에는 다녀온다고 돼 있다. 아무리 이별통보의 문법이 변했다고 하나 이런 식의 쪽지는 돌아오겠다는 의미가 분명했다. 다만 맘에 걸리는 것은 ‘찾지마’란 세 글자였다. 


왜 찾지마? 곧 돌아올 테니 찾는데 기력을 쓰지 말라는 말이 아니었나? 혹시 영원히 떠나 찾아도 소용없으니 찾지 말라는 말을 잘못 이해했나? 


연락이 끊기고 한달이 훌쩍 지나자 포기하는 심정이 되었다. 이건 끝이다. 5년이면 충분히 사귄 것이다. 보헤미안 기질이 있는 그녀로서는 꽤 오래 버틴 것이다. 자상하지도 않고 딱히 매력도 없는 나와 그만큼이나 사귀었으면 질릴 만도 했다. 그녀가 좀 밉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지만 이해했다. 어쩌겠나? 


싫어서 떠난다는데. 아무리 나라도 나를 좋아하지 않은 사람을 되돌릴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다. 


자진해서 창밖으로 날아간 비둘기는 작업실을 완전히 떠난 게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날은 정탐이나 사전답사 같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다음 날 비둘기가 또 찾아왔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작업실 창문이 아니었다. 저녁으로 먹을 빵과 커피를 사기 위해 출입문을 열었는데 그때 비둘기가 날아 들어왔다.


이번에는 놀라지 않았다. 사전답사를 한 탓인지 비둘기는 거실을 가볍게 가로질러 곧장 작업실로 진입했다. 나도 비둘기를 쫓을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작업실 창을 열어두고 밖으로 나갔다. 한번 더 자진퇴장하기를 바라며. 

내 실력에 녀석을 효율적으로 쫓아낼 방법도 모르거니와 출입문을 열어 놓을 수는 없었으니까. 


디카페인 커피와 갓 구운 캄빠뉴를 손에 들고 돌아왔더니 비둘기는 여전히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나 날아갔을까 기대도 했지만 책상 위에서 나를 올려다보는 비둘기가 그리 밉지만은 않았다. 


고작 하루가 지났지만 비둘기와 나는 한층 가까와 진 것 같았다. 비둘기는 혼자 있는 동안 집안을 어질러 놓지도 않았다. 게다가 강제로 쫓아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눈치챘는지 날 보고 도망치는 대신 여유롭게 집안 곳곳을 틈틈이 걸어 다녔다.


내가 깜빠뉴를 먹는 것을 유심히 보기에 조금 뜯어서 던져줬더니 조금의 경계심도 없이 다가와서 빵쪼가리를 콕콕 쪼아댔다. 


“그래, 천천히 놀다 가라.” 


나는 비둘기의 존재를 잊고 작업 때문에 미뤄뒀던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2개쯤 보고 창을 닫을까 해서 비둘기를 찾았더니 녀석은 없어졌다. 심심했는지, 아니면 볼 일이 끝났는지 떠난 것이다. 간다는 말도 없이. 그것마저 누군가와 똑같다. 


올 때는 온다 말 안 해도 떠날 때는 간다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야 기다리지 않지. 이게 뭔가? 다녀온다고 했으면 와야지. 왜 안 와? 하긴 다녀온다고만 했지 언제 온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래 그녀는 죄가 없다. 


떠나지 말라 한 적도 없고 속박하지 않겠다고 여러 번 선언했었다. 그래도 완전히 떠날 거면 자기 물건은 다 챙겨가야 하는 것 아닌가? 저렇게 다 두고 가면 그걸 매일 봐야하는 나는 어떡하라고? 내다 버릴 수도 없기에 나는 그녀의 방을 없는 셈 치고 마음에서 봉인했다. 


새벽까지 드라마를 정주행 하느라 늦잠을 자고 있는데 창문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직감적으로 비둘기가 찾아왔음을 알았다. 


부지런도 하지. 꼭 그녀처럼. 그녀는 늦잠 자는 나를 깨우는 게 주요 일과였다. 애써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어주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렇게 한참을 더 자고 일어났더니 비둘기가 보이지 않았다.


이제 비둘기가 있건 없건 신경쓸 단계는 지났지만 궁금하긴 했다. 


“어딨어? 빵 줄까?”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비둘기 수색에 나섰다. 비둘기는 의외의 장소에 있었다. 바로 그녀의 방안에. 


“여길 어떻게 들어갔어? 너 방문도 따냐?” 


오래만에 그녀의 방문을 열었더니 눅눅하게 죽은 공기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으레 그녀의 방에서 나던 화장품 냄새는 거의 사라졌다. 


“야, 나가자. 여기는 이제 없는 곳이야.” 


그때 비둘기가 날개를 푸드덕 거리더니 그녀의 책장 꼭대기에 올라가 앉았다. 


“거기 전망이 좋아? 그만 했으며 이제 내려와서 나가지?” 


당연하게도 비둘기는 내 말을 듣지 않고 뭔가 끙끙거리더니 눈에 익은 노트 하나를 떨어뜨렸다. 그건 그녀의 다이어리였다. 여행을 떠났다면 당연히 들고 갔어야 할 필수품 1호!


그녀가 나를 떠나지 않았다면 결코 열어보지 않았겠지만, 다이어리도 나와 같이 버려진 것이라면 못 읽을 이유도 없다 싶어 페이지를 펼쳤다. 예상했던 대로 대단한 비밀이 적혀 있지는 않았다. 

다만 일기장 곳곳에 나타나는 외로움에 내 감정도 동조하기 시작했다. 


고아였던 그녀는 남들이 당연하게 가진 것을 자기는 없다고 투덜댔었다. 


“심지어 내 이름도 내 것이 아니래.”

“뭐? 그게 말이 돼?”

“고아원 원장이 원래 다른 애 이름으로 지어뒀던 것인데 그 애는 바로 입양되는 바람에 내 이름으로 썼다는..” 


아무렇지 않게 슬픈 비사를 얘기하는 그녀의 얼굴이 더 쓸쓸해 보였다. 그래서 즉흥적으로 위로한다고 한 말이었다. 


“우리 같이 살까?”

“난데없이?”

“내 집 너 가져. 그리고 보너스로 나도 가져가고. 비밀이지만 난 내가 필요없어.” 


그녀는 망설였다. 청혼은 아니니 도망치지는 않을 테고, 싫다 그러면 안 하면 그만이었다. 


“좋긴 한데, 대신 나간다고 잡기 없기다?”

“당연하지. 나 알잖아.” 


그녀가 가진 게 없다면, 난 집착할 게 없었다. 삶도 애정도 날 붙잡지 못한다. 

일로 하고 있는 광고편집도 밥 벌이일 뿐, 뭐든지 이보다 적은 시간에 더 많은 돈을 준다면 직업도 바꿀 수 있다. 

결말에 집착하고 싶지 않아 드라마도 끝까지 안 본다. 


“자기는 왜 나랑 살아?”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거지?”

“그럼 그것도 없어?”

“내가 왜 사는지도 모르고 살고 있는데 어떻게 일일이 다 이유가 있겠어?”

“날 사랑한다면서?”

“그렇지.”

“그럼 '사랑해서' 라고 말하면 안 돼?” 


그때 난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함정에 빠진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날 대화는 결과적으로 그녀가 날 떠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나는 그녀가 있어 외롭지 않았는데, 그녀는 나와 있어도 외로웠던 것일까? 


비둘기는 매일 나를 찾아왔다. 열어 둔 창으로, 열린 문으로, 아무렇게나 아무 때에 내 곁을 맴돌았다. 심지어 산책이나 커피전문점에 갈 때에도 비둘기는 나를 따라 나섰다. 반려조도 아닌 것과 거의 일상을 함께 하다보니 의문이 들었다. 


“어이, 너 무슨 목적이냐?”

“구구.”

“너 나 좋아해?”

“구구.” 


함께 사는 게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라면서 어느덧 나도 이유를 묻고 있었다. 


비둘기, 너! 왜 내 옆에 있지? 비둘기가 목적이 있어 내 옆에 날아든 것은 아니라 해도 범신론적인 관점에서 이런 괴이한 동거가 계속되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 


어떤 이유에서이건 내곁을 떠난 것만은 확실하니 그녀의 짐들을 정리해야 했다. 차라리 비둘기 방을 만들더라도 집 나간 여자친구를 위한 공간을 무한정 비워둘 수는 없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중요해 보이는 것은 모아 박스에 넣어둘 생각으로 그녀의 방에 들어갔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가 울렸다. 좀체 울지 않는 놈인데도. 


“이혜원씨라고 아십니까?” 


한마디만 들어도 경찰 같은 목소리로 전화기 너머 불친절한 남자는 다짜고짜 내게 물었다. 


“네, 그런데요. 누구시죠?”

“서울 경찰청 외사과인데요, 이혜원씨와 어떤 관계이십니까?” 


나는 그녀와 어떤 관계인가? 부부는 아니고 친구도 아니다. 이제 그녀가 나를 떠났으니 애인관계도 아니다. 


“그냥 좀 아는 사이인데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내 대답에 경찰은 머뭇거렸다. 그냥 좀 아는 사이에게 말해도 되는 일인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약간의 침묵이 몇 초간의 공백을 메우고 나서 그는 다시 물었다. 


“이혜원씨가 사망했습니다. 몇 가지 확인할 게 있는데 경찰청에 출두해 줄 수 있습니까?” 


그녀가 죽었다는 말에 멍해졌다. 그리고 그 다음은 기억나지 않는다.

전화를 끊고 시간이 정지한 것 마냥 꽤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녀의 시신은 아이슬란드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좀 다녀온다던 그 ‘어디’는 꽤 먼 곳이었다.

 

실은 그녀가 아이슬란드 여행을 제안한 적이 있었다. 


“왜 하필 아이슬란드야?”

“불과 얼음의 나라라니, 멋지잖아!” 


과장된 반응은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며 그 거짓말을 간파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됐고, 솔직히 말해봐.”

“블로그에서 봤는데 아이슬란드는 태초에 신이 만들다 만 곳이래. 그래서 개념없이 불과 얼음이 공존하고, 사막도 있고 빙하도 있고… 이제 와 인간들이 멋지다고 하는 거지, 실은 신에게 버려진 곳이었던 거야.” 


언제나처럼 그녀는 버려진 것들에 본능적으로 끌린 것이었다. 


“여름에는 온통 초록이라 원래 이름은 그린란드였는데 진짜 얼음 밖에 없는 북극의 그린란드를 팔아먹으려고 두 섬의 이름을 바꿨다나? 나랑 비슷하지?” 


왜 슬픈 사람들은 더 슬픈 사연을 찾아다닐까? 자기보다 더 슬픈 것을 찾아 위로받기 위함일까? 바로 그 이유때문에 나는 아이슬란드 여행에 반대했다. 


버려졌으면 자유롭게 살면 된다. 자기연민에 빠진다고 구해주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녀 혼자 아이슬란드를 헤매다 죽었을 생각을 하니 속이 아려왔다. 


나는 무슨 짓을 한 것인가? 같이 갔더라면 최소한 그녀는 아직 살아있을 것이다. 아이슬란드 여행이 마뜩치 않으면 어떤가? 그녀가 아이슬란드에 가고 싶은 이유가 고아로 자란 콤플렉스면 어떤가? 


내가 모든 것을 받아줄 수 없어도 그런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그녀는 살아있을 권리가 있다. 


비둘기마저 없었다면 완전히 혼자라는 기분을 떨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경찰청의 연락을 받은 뒤 종종 TV화면이 멈춘 것처럼 멍때리고 있으면 어느새 비둘기가 구구거리며 나를 깨우고 있었다. 


그녀가 떠나 영원히 보지 못하는 것이나 죽은 것이나 나에게는 같은 결과인데 느낌의 차원이 달랐다. 이게 왜 이렇게 다르지? 


차라리 작업에 몰두하면 좋은데 이럴 때는 일감도 없다. 혼자 있는 건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너무 적막하다. 그래, 버려진 느낌. 이것이었나? 그녀가 평생 떨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기분. 혼자 남겨진 느낌. X같다! 


지금까지 몇 명이나 되는 여자들이 나를 떠났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사람에게도 집착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신념이 되었고 신념은 내 일상을 지배해 왔다. 


‘내가 싫어 떠난 여자, 남아있는 감정의 찌꺼기는 있는 대로 내버려 둬! 난 변하지 않아! 시간이 지나면 결국에는 잊혀져. 흔들리지 말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작업하고 산책하고 커피 마시고 드라마 보면 또 그런대로 살아간다. 어차피 인생 뭐 없다. 무미건조한 게 인생의 맛이다! 


그런데, 날 떠났다고 굳이 죽을 것까지 있나? 내가 보기 싫으면 안 보면 되고, 맘에 안 들면 욕하고 떠나면 되지. 죽긴 왜 죽어? 이거 혹시 나에 대한 복수인가? 아냐, 누가 복수를 이딴 식으로 해? 


언제 마지막으로 식사했는지, 지금 보고 있는 드라마의 줄거리가 뭔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떻게 해도 원래 루틴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녀가 죽기 전의 내 일상, 정확히는 그녀가 죽었다는 것을 알기 전의 내 일상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숨쉬기도 귀찮아 몸 움직임을 최소화하며 눈만 간신히 깜박거리고 있는데 기척이 느껴졌다. 비둘기였다. 


맞아, 네가 있었지? 언제부터 거기 있었니? 내가 불쌍해? 니가 보기에도 내가 불쌍해? 


비둘기는 언젠가처럼 포로롱 날아 컴퓨터 키보드 앞에 내려섰다. 아무 작업도 하지 않은 내 컴퓨터는 모니터 위에 흰색 메모장만을 띄워놓고 있었다. 비둘기가 키보드를 쪼아도 상관없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비둘기는 키보드를 콕콕 쪼기 시작했다. 메모장에는 비둘기가 두서없이 입력하는 알파벳이 찍히기 시작했다. 


신경 쓰지 않았다. 열린 창문으로는 바람이 들어왔다. 선선하지도 덥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바람이 습기를 가득 머금고 내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멍하니 창밖을 보며 바람이 불어온 곳을 눈으로 쫓으며 또 시간을 보냈다. 


참으로 지겨운 시간은 가라고 가라고 노래를 부르면 더 느리게 간다. 그러다 비둘기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더이상 들리지 않는 것 같아 모니터를 돌아봤다. 녀석은 자신의 작업이 꽤나 자랑스러운지 의연한 포즈로 나를 보고 있었다.


뭘 썼는데 날 이렇게 보지? 


m m do iss u e 


뭐야? 비둘기가 쓴 낙서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넌센스라고 생각했지만 녀석의 진지한 눈빛 때문에 외면하긴 쉽지 않았다. 그래, 뭔가 뜻이 있다는 것이지?


나는 비둘기가 입력한 알파벳의 순서를 바꿔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do issue는 아니고, 이렇게 하면 m이 2개가 남는데... 


한동안 뚫어지게 모니터를 쳐다보다가 드디어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do u miss me 


우리말로 하면 내가 그립니? 아... 말이 된다. 


‘이제야 내가 그립니?’ 


나를 떠난 그녀가 하는 말 같다.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기에 만날 수는 없고 그리워할 수만 있는 대상, 

이혜원. 나는 그녀가 그립나? 


비둘기를 돌아봤다. 녀석은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는 듯이 머리를 몇 번 끄덕이고 창밖으로 날아갔다. 날개를 활짝 펴고 힘차게 날아가는 모습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난 일어나 그동안 꽤 오래 열려있던 창문을 닫았다. 


그녀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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