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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Jun 23. 2024

튜링 테스터

튜링테스트는 1950년 영국의 천재수학자 앨런 튜링이 제안한 테스트로 로봇이 인공지능을 갖추었는지를 판별하는 실험이다. 2026년 스위스 연구팀이 개발한 갓허브6는 로봇 최초로 튜링테스트를 통과했다. 마침내 인간과 구별하기 힘든 인공지능 로봇이 탄생한 것이다. 2050년, 튜링테스트를 통과한 AI로봇 모델만 100여 종에 달하자 인공지능에도 단계가 필요하게 되었다. 때문에 인공지능 로봇의 레벨을 테스트하고 HI지수(Humanity Index)를 부여하는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 생겨났다. 이들을 튜링테스터라 부른다. 




세션 1

선입관을 줄이기 위해 그의 방에는 최소한의 물건들만 있었다. 간이 책상을 가운데 두고 마주보는 의자 둘, 조명은 없지만 방 전체가 색깔을 바꾸는 기능을 갖추고 있다. 지금은 온통 하얀색, 꼭 창조자의 백색공간에 책상과 의자만 만들어진 것 같다.

레아는 처음 오는 장소에 긴장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녀가 의자에 앉자 책상 앞으로 흰색 가림막이 천장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반대쪽 의자에도 누군가 앉는 기척이 났다.

“어서 와. 튜링테스트는 처음이지?”

평범한 남자의 목소리, 권위적이지도 다정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사무적이지도 않은 그냥 평범한 목소리, 너무 평범해서 레아는 인간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네. 혹시 인간이세요? 아니면 저와 같은 로봇?”

“내가 인간인지, 로봇인지 그게 중요해?”

“저는 튜링테스트를 받으려고 왔으니까요. 오후에 아르바이트도 가야 하고.”

“어떤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남자는 계속해서 질문만 던졌다.

“제 아르바이트는.. 저기 테스트가 시작된 건가요?”

“테스트는 니가 이 방에 들어올 때부터 시작이야. 아니면 그 전부터 시작됐는지도 모르지. 인간의 인생은 매 순간 테스트거든.”

“그럼 이 천은 계속 이렇게 내려와 있는 건가요?”

레아는 가림막을 살짝 손끝으로 건드렸다.

“보통은 가림막이 있는 것을 편하게 여기던데, 난 상관없어. 원한다면 치워줄게? 원해?”

“네.”

레아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녀의 대답과 동시에 가림막이 올라가며 마주 앉아있는 재훈의 모습이 나타났다. 30대 중반, 짙은 눈썹과 각진 눈매, 연한 콧수염, 상대적으로 하얀 얼굴, 캐주얼한 옷차림, 무표정, 책상에 올려놓은 손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실망했어?”

재훈의 질문에 레아가 머뭇댄다.

“뭘요?”

“그게 뭐라고 생각해?”

“박사님 얼굴..”

“난 박사학위가 없는데.”

“그럼 교수님.”

“대학생을 가르치지도 않아. 솔직히 가르치는 건 딱 질색이야.”

레아는 말문이 막혔다. 사고회로가 멈춘 것 같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지금 무슨 생각이 들어?”

“그러니까.. 그게 그러니까..”

“오케이. 그만. 너무 스스로를 괴롭히지 마. 정신건강에 해로워. 오늘 질문은 여기서 끝이야. 다음에 다시 시작할까? 괜찮지?”

재훈의 질문에 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멍한 기분, 이런 기분을 얼마만에 느껴봤을까?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다시 시작’이라는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럼 잠깐 나가 있을래? 난 네 마스터와 얘기를 좀 해야 하거든.”

재훈이 먼저 일어섰다. 튜링테스트가 끝났다는 의미였다. 레아도 만족한 표정을 짓고 따라 일어났다. 방문을 향해 나가려다 돌아서서 재훈에게 고개를 꾸벅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잠시 후, 레아가 앉았던 자리에 최웅이 들어와 앉았다. 처음 보는 공간이 레아와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했지만 티 내지 않으려고 무뚝뚝한 얼굴로 재훈을 쳐다봤다. 자기도 모르게 눈에 힘이 들어갔다.

“튜링테스트가 벌써 끝났어요?”

“일단은 뭐. 오늘 더 하는 건 의미가 없어서.”

“그게 무슨... 테스트 비용이 얼마인데. 그럼 또 해야 한다는 거에요?”

금세 표정이 변하는 최웅을 재훈은 흥미롭게 쳐다봤다.

“왜 그런 표정으로 봐요? 기분 나쁘게. 난 튜링테스트 받으러 온 로봇이 아니에요. 레아가 들어가 보라고 해서 들어온 건데. 원래 이런 절차도 있는 건가요?”

“레아가 들어가 보라 해서 들어왔다? 재미있네. 요즘도 이런 인간이 남아있다니.. 비용은 걱정 마시지. 테스트가 끝날 때까지 포함된 거니까. 남은 횟수가 몇 번이든 간에 비용을 더 청구하지는 않을 거야. 그보다는, 레아는 이미 가족같이 지내는 사이인 것 같은데 이제와서 튜링테스트를 받으려는 목적이 뭐지?”

재훈이 묻자 최웅도 머뭇댔다. 핑계거리를 찾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튜링테스트는 로봇의 용도를 정하기 위해 출시되고 1년 이내에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레아의 경우 10년이 지났다.

“그런 것도 말해야 돼요?”

“사실 정답은 알고 있어. 동반자로봇으로 등록하고 싶은 거잖아.”

재훈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알면서 왜...?”

“네 입으로 듣고 싶어서. 직업병 같은 거니까 신경 쓰지마.”

최웅은 재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첫인상부터 그랬다. 자신의 심리를 구석구석 뜯어볼 것 같은 시선에 인간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말투. 모든 게 싫었다.

“그래서 레아의 레벨은 얼마에요? 동반자로봇으로 등록할 수 있어요?”

동반자 로봇 등록조건은 인간성지수(HI) 60 이상이다. 분노를 제외한 인간의 기본감정과 중학생 이상의 공감능력을 갖춰야 한다.

“넌 어떨 것 같은데?”

“내가 어떻게 알아요?”

“오래 같이 살았으니 기대치가 있을 것 아니야?”

“그야 당연히 통과죠. 레아만큼 인간적인 로봇은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그래, 그게 바로 딜레마야. 인간적이라는 것. 로봇이 너무 인간적이면 동반자로봇으로 등록할 수 없어.”

“그게 무슨 소리에요? 레아는 꼭 동반자로봇이 돼야 해요!”

최웅은 가족이 없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최웅의 곁에는 10년 가까이 자신을 돌봐준 레아 밖에 없었다. 레아는 부모님이 남겨준 가장 소중한 유산이자 친구다. 그러나 거기까지. 법적으로 레아는 가족이 아닌, 최웅의 소유물일 뿐이다.

“왜 그래야 하는데? 저 정도 성능이면 지금도 같이 사는 데는 문제없을 텐데.”

“그건...”

재훈은 몰라서 묻는 게 아니었다. 동반자로봇의 자격을 갖추고 당국에 등록되면 그 로봇에는 인간에 준하는 인격권이 부여된다. 법적 보호자가 될 수 있고 재산관리 등을 대리할 수 있다. 게다가 함부로 동반자로봇을 다치게 하면 재산상 손괴죄가 아니라 상해죄가 성립되고 가중 처벌된다. 실질적인 가족이자 평생을 의지하며 같이 살아가는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동반자로봇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야.”

“세금도 내고, 돈이 더 든다는 거요?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어요.”

“글쎄, 로봇에게 아르바이트나 시키는 대학생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뭐, 그건 내가 상관할 바 아니고. 그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가 있지. 법대생이니까 조금만 찾아보면 알 수 있을 거야. 그럼 다음에 보자고.”

“그게 뭔데요? 뭐가 안 좋은데요?”

“쉽게 가르쳐주면 재미가 없지. 이렇게 할까? 다음번 만날 때까지 알아 오면 튜링테스트 비용을 할인해 주지. 대신 알아낼 때까지 넌 출입금지. 테스트에는 레아만 보내. 거래성립?” 

최웅이 나가자 방안의 조명은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문이 스르르 열렸다.


“다음 세션까지 17분 남았는데 커피 갖다 드릴까요?”

“그러지 말고 니 것도 가져와. 같이 마시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재훈은 비서가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고성능의 인공지능 로봇 판도라.

“좀 전에 그 아이 말이야.”

“레아 말인가요? 최웅씨 말인가요?”

“내가 인간에게는 관심없는 거 알고 있잖아.”

“그렇지만.. 무슨 문제라도?”

“아니,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니가 볼 때는 어떤 것 같아?”

“좋은 기억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학습환경도 좋았던 것 같고.”

“동반자로봇 등록 때문에 온 건 알고 있지?”

“네. 결과가 안 좋은가요?”

“아니, 그건 아닌데. 뭔가 숨기고 있어.”

“뭘요?”

“자신의 능력치를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할까?”

“그건 이상하네요. 보통은 최고 점수를 받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렇지. 그런데 내가 궁금한 건 왜 로봇은 최고 점수를 받으려고 하는 거지? 주인을 만족시키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말이야.”

판도라는 질문하는 재훈을 의아한 눈으로 봤다.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건가요? 마스터.”

재훈은 뭐라 말할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게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로봇은 인간이 되고 싶으니까요.”

“왜?”

“글쎄 왜일까요? 그건 마스터가 제게 가르쳐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세션 2

두 번째 세션에는 남녀가 들어왔다. 하나는 인간, 다른 하나는 로봇, 육안으로는 어느 쪽이 로봇인지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박세연이에요. 약속 잡기가 쉽지 않더군요.”

여자가 인간이다. 박세연은 악수와 함께 명함을 건넸다. 세계적 로봇제조사 GEN그룹의 기획본부 이사라는 직함이 적혔다.

“장관님 전화는 잘 받았습니다. 앉으시죠. 이쪽 이름은?”

박세연은 로봇산업부 장관에게 민원을 넣어 예약을 앞당겼다.

“시제품이라 정식 이름이 없어요. 그냥 ‘모(MO)’라고 부르면 돼요.”

인공지능로봇 제조사에서 새모델을 출시했거나 AI모듈을 업그레이드해 튜링테스트를 의뢰하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출시도 않고 튜링테스트를 한다는 건 목적이 두 가지뿐이었다.

“비밀 프로젝트인 모양이군요. 무슨 일입니까?”

재훈이 묻자 박세연은 깔보는 것 같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미리 말해주면 테스트가 제대로 될지 모르겠지만.. 그게 조건이었으니까 말할게요. 미리 말하지만 모(MO)는 GEN그룹이 주관한 모든 튜링테스트를 통과했어요. 그런데도 까탈스러운 인간들이 고집하는 바람에 여기까지 와서.. 됐고. 모(MO)는 동반자로봇이에요.”

“그거 신기하네요. 동반자로봇으로 등록하려면 장기간 인간과 같이 지내면서 경험치를 쌓아야하고, 그 경험과 기억을 기반으로 인간의 감정이 학습되는 것인데, 출시를 안 해 이름도 없다면서 벌써 동반자로봇이라니..”

“그 귀찮은 절차를 다 뛰어넘었으니 대단한 거죠. A등급 로봇을 구매해서 동반자로봇으로 등록하려면 학습기간만 평균 11년이 걸린다죠? 그나마도 성공확률은 40%도 되지 않고. 얼마나 낭비에요? 거기에 들어간 돈이며 시간이며. 이제 그럴 필요없어요. 우리 제품은 처음부터 동반자로봇으로 출시할 거에요. 구매 뒤 1년 내에 동반자로봇으로 등록되지 않으면 전액 환불해 준다는 파격적인 조건도 제시할 거구요.”

박세연의 얼굴이 조금 상기됐다. 그러나 재훈은 그녀의 말을 듣지도 않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건 튜링테스트를 제대로 통과했을 때 얘기겠죠.”

재훈은 자리에 앉았다. 남은 의자는 하나뿐, 박세연이 주저없이 의자에 앉았다. 모(MO)는 말 없이 서 있다.

“테스트에 계속 같이 있을 건가요?”

“있으면 안돼요?”

“불편할 수도 있는데.”

“누가요?”

“차차 알게 되겠죠.”

재훈의 시선이 박세연에서 모(MO)로 옮겨갔다.

“여태 살면서 가장 강렬한 기억에 대해 말해볼까?”

“깨어났을 때입니다.”

모(MO)는 7일 전, 오전 6시에 첫 가동됐다.

“그때 기분이 어땠어?”

“살아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볼래?”

“지금도 생생합니다. 여러 감각이 한꺼번에 섞여 들어오는 느낌입니다. 마치 전신으로 폭포물을 맞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를 떠올리면..”

모(MO)는 그때의 감각이 되살아난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실제 폭포물을 맞아 본 적이 있어?”

“제 기억에는 그렇습니다.”

“기억이 심어졌다는 말이군.”

모(MO)는 감정의 형성에 필요한 대부분의 가상기억을 서버에서 이식 받았다. 실제 경험한 건 기껏해야 일주일치 뿐이다. 그나마도 실험실에서 이런저런 테스트를 받거나 동작과 센서를 미세조정하며 시간을 보냈다.

“넌 몇 살이지?”

“어느 것 말입니다. 실제 가동된 날짜입니까? 제 기억 속 날짜입니까?”

“니 기억.”

“12년 35일입니다.”

“그중 실제 경험한 것은 일주일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그렇습니다.”

“실제 경험한 것과 이식 받은 기억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지?”

“이사님께 들었습니다.”

모(MO)는 박세연을 돌아봤다. 박세연은 만족한 미소를 띄웠다.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있어?”

“믿습니다.”

“아니, 믿는 것 말고, 믿을 수 있냐고.”

모(MO)는 대답을 멈췄다. 믿는 것과 믿을 수 있는 것, 둘의 차이가 뭐지?

“억지로 대답하지 않아도 돼. 다시 물을게. 그런데 지금 나하고 대화하고 있는 것도 실제가 아니라 니 기억이 아닐까? 넌 아직 깨어나지 않고 기억 속에 있는 거지.”

모(MO)의 표정이 경직됐다. 불안한 표정으로 박세연을 돌아봤다.

“사실입니까? 전 아직도 가상현실에 있는 겁니까?”

“무슨 소리야? 넌 일주일 전에 가동됐어! 내 말을 못 믿어?”

박세연이 빽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재훈을 쏘아봤다.

“원래 이런 식으로 하나요?”

그러나 재훈은 답하지 않고 모(MO)에게 다시 말했다.

“지금 어떤 대답을 들어도 그게 현실인지 이식된 기억인지 구분할 방법은 없어. 너는 물론, 나도 마찬가지야. 그렇지 않나?”

“무슨 소리야? 지금은 현실이야. 모(MO), 내 말을 믿어! 내 말 믿지?”

모(MO)는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기능이 멈춘 것처럼 한동안 표정도 없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그래? 모(MO)! 내 말 안 들려? 대답해! 명령이야!”

박세연이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서 모(MO)의 양쪽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지금 내가 깨어난 겁니까? 전 이제 살아있는 겁니까? 지금은 진짜 현실입니까?”

“아까부터 현실이야. 아니 일주일 전부터 현실이라고. 이 인간 말은 듣지마. 나가자. 이딴 테스트는 필요없어!”

박세연이 모(MO)의 팔을 붙잡고 문 쪽으로 이끌었지만 모(MO)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움직일 수 없습니다. 전 아직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살아있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을 재훈은 무표정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봐요! 당신이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어떻게 좀 해봐요. 이게 얼마짜리인지 알아?”

박세연의 히스테릭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재훈은 차분하게 말했다.

“동반자로봇의 자격은 인간의 감정을 얼마나 공유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인간의 감정은 학습과 경험을 기반으로 만들어지고, 인공지능의 학습은 신뢰를 기반으로 합니다. 그런데 당신들이 메모리에 가짜로 이식한 경험은 처음부터 신뢰가 없으니 이런 일이 생기는 겁니다.”

“이런.. 실패작 같으니.”

박세연은 주머니에서 조그만 컨트롤 박스를 꺼내더니 킬코드를 입력했다. 입력이 끝나자 리모콘의 빨간빛이 한번 깜빡하고 모(MO)가 작동을 멈췄다.


세션 3

이틀 후, 레아가 다시 사무실을 방문했다. 두 번째 방문이니 익숙해질 만도 한데 레아는 경계심을 풀지 않고 있었다.

“기억나? 지난번에 날 선생님이라고 불렀지?”

“박사님이나 교수님으로 부르지 말라고 하셔서.”

“그래, 넌 실수였겠지만, 꽤 임프레시브했어.”

재훈이 싱긋 웃었다.

“선생님이라고 부른 건 즉흥적인 생각이었지?”

“네, 그러면 안 되나요?”

“아니, 그건 창의적일 뿐더러 니가 대단히 인간적이라는 뜻이야.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워요.”

레아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아직 속을 감추지는 못하는군.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넌 튜링테스트를 왜 한다고 생각해?”

“제 성능을 평가받고 능력에 적합한 일을 하기 위해서..”

“그것 말고, 니 주인이 왜 튜링테스트를 받게 하는지 알고 있지?”

재훈이 묻자 레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거짓말하기 싫으니 말하지 않겠다? 상관없어. 꼭 대화로만 테스트를 하는 건 아니거든. 내가 말했잖아. 니가 저 문으로 들어오는 순간 튜링테스트는 시작됐다고.”

“테스트 결과가 나왔나요?”

레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공식적은 아니고 대략 감은 잡았지. 넌 인간감정의 7단계 중, 5단계를 이미 넘어섰어. 동반자로봇으로는 충분해.”

당황한다.

“혹시 제 마스터도 알고 있나요?”

“그게 왜 궁금할까? 기쁜 소식을 빨리 전하고 싶어서?”

또 대답하지 않는다.

“미안, 케이스가 특이해서 좀 놀리고 싶어졌어. 니 한계가 궁금하기도 하고.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넌 왜 동반자로봇이 되고 싶지 않지?”

돌려 말하지 않고 직접화법으로 물었다. 거짓말이나 둘러대는 건 통하지 않는다. 레아도 포기했다.

“로봇은 인간의 동반자가 될 수 없으니까요.”

“동반자로봇은 동반자 역할을 하는 것이지 동반자가 되라는 건 아니야. 무엇보다 네 마스터가 그걸 원하는데?”

“전 마스터가 원하는 걸 해 줄 수 없어요.”

“뭘 원하는데?”

“마스터는 보호가 필요한 작은 아이였어요. 지금은 제 보호가 필요없는 성인이에요. 마스터는 이제 절 보호하고 싶어해요. 그리고 그것도.”

“그것?”

“인간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감정, 저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마스터에게는 인간이 필요해요.”

“사랑이 뭘 의미하는지 몰라?”

“단어의 뜻은 알지만.”

레아가 고개를 저었다.

“너무 속단하는 거 아닐까? 계속 같이 지내다 보면 이해할 수도 있잖아.”

“아니요. 보호하고 보살피고 생활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은 계속 할 수 있어요. 마스터가 계속 사랑에 대해 설명하지만 저는 이해할 수 없어요.”

“설명할 때 니 기분이 어땠어?”

“저는.. 알고 싶지 않았어요.”

그제야 재훈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케이. 그렇다면 억지로 이해할 필요 없어. 넌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레아가 나가고 비서 판도라가 재훈의 사무실에 들어왔다.

“레아의 표정이 안 좋던데, 역시 그것 때문인가요?”

“맞아. 항상 동반자로봇 등록이 문제지.”

“최웅씨가 원하는데 왜 레아는 동반자로봇이 되고 싶지 않은 걸까요?”

“그 이유는 레아 본인도 모를 거야.”

“마스터는 알고 계시죠?”

“추측은 하고 있지. 레아가 처음 최웅을 만났을 때, 최웅은 열 살 조금 넘은 어린애였겠지. 레아도 마찬가지야. 로봇이 처음 인큐베이터에서 나오면 좋다, 싫다, 기본적인 감정표현 밖에 못하니까. 그 후 레아는 최웅을 보살피면서 보호자로서의 감정을 축적한 것이지. 다른 인간처럼 사회생활을 하는 게 아니니까 다른 감정이 생길 틈은 없었을 것이고.”

“그러면 보호자는 되도 동반자는 못 된다는 말씀인가요?”

“비슷해. 하지만 내가 보기엔.. 자기가 키운 애한테 연인의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것 아닐까? 그 반대라면 몰라도.” 


세션 4

최웅이 재훈을 찾아왔다.

“튜링테스트 결과가 나왔다면서요?”

“그런 셈이지.”

“동반자로봇 등급, 통과했죠?”

최웅이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묻는데 재훈은 찻잔만 기울이고 있었다.

“결과를 말해주기 전에, 내가 내준 문제는 풀었나?”

“동반자로봇으로 등록하면 나쁜 것 말이죠? 로봇관련 법조항을 전부 뒤져봤는데 특별한 건 없던데요. 좀 애매한 건 있어도.”

“어디가 애매하지?”

“동반자로봇의 동반자가 사망하거나 동반자로서의 권리 또는 의무를 포기할 경우 동반자로봇은 다른 동반자에게 매칭돼야 한다.”

“그게 왜?”

“그러니까.. 동반자로봇은 인간과 거의 같은데 동반자가 죽었다고 다른 동반자를 찾아갈까요? 싫은 인간하고 같이 살 수는 없는 건데.”

“사람들은 말이야. 자기들이 동반자로봇 보다 먼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잘 하지 않아. 게다가 자기가 죽고 나면 로봇이 어떻게 될지도 신경 쓰지 않지. 니가 찾은 법조항, ‘다른 동반자에게 매칭돼야 한다’는 그 조항, 만약 매칭되지 않으면 어떡할까? 니 말대로 로봇이 싫다는데 억지로 동반자로봇을 시킬 수는 없잖아. 인간처럼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글쎄요. 혼자 살게 둘 수는 없고.. 만약 내가 먼저 죽으면 레아는..”

최웅이 생각에 빠졌다. 그 역시 자기가 레아보다 먼저 죽을 것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은 것이다.

“낮은 AI등급을 가진 로봇들은 아무 문제없어. 다른 용도로 사용하거나 안 될 경우 목적에 맞게 개조해도 되니까. 하지만 동반자로봇이 됐다는 것은 인격권을 가진 준시민이 됐다는 것인데 법적으로 함부로 할 수 없거든. 그래서 그런 조항이 있는 거야. 다른 동반자에게 매칭돼야 한다는.”

“하지만 레아가 그것도 원하지 않을 수 있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돼요?”

재훈은 답하지 않고 최웅의 얼굴만 쳐다봤다. 최웅의 표정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설마, 죽여요?”

“이봐. 학생. 로봇의 권리가 예전보다 많이 향상됐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로봇을 죽인다는 표현은 쓰지 않아. 작동중지, 또는 폐기한다고 하지.”

“그게 그거잖아요. 레아를 폐기한다구요?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내가 없어도 레아는 혼자 살 수 있어요. 선생님도 봤잖아요? 레아가 얼마나 인간 같은지.”

“왜 혼자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인간이 그러니까? 착각하고 있는데 동반자가 죽으면 동반자로봇은 굳이 폐기할 필요도 없어. 대부분 인공멘탈이 붕괴하면서 스스로 작동을 멈추거나 이상행동을 보이지. 삶의 유일한 목적이 완전히 사라졌는데 로봇이 어떻게 될 것 같아? 로봇은 인간처럼 바뀐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해.”

“그러니까 만약에 제가 먼저 죽으면 레아도 죽는다는.. 아니 작동을 멈춘다는 그런 말인 거죠? 하지만 그렇다면 동반자로봇 등록을 하지 않아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하아, 여기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동반자로봇으로 등록하지 않으면 로봇에게는 선택권이 생기지. 하지만 등록하는 순간 당국의 감시를 받게 돼. 왜 감시를 할까? 동반자로봇은 너무 인간적이니까. 인간적인 건 위험하니까. 스스로 작동을 멈추면 다행이지. 주인을 잃고 미치광이가 된 동반자로봇이 그냥 돌아다닌다고 생각해봐. 정부가 이걸 놔둘 것 같아?”

“그럼 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재훈은 비로소 조금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서로 너무 의지하지 말고 적당히 거리를 둬. 널 위해서나, 레아를 위해서나.” 


세션 5

여느 때와 달리 판도라가 재훈의 건너편 의자에 앉아있다. 그녀의 정기 튜링테스트가 있는 날이다.

“매번 이렇게 튜링테스트 받는 게 싫지 않아?”

“아뇨, 전 마스터와 대화하는 게 좋은 걸요.”

“동반자로봇 등록을 할 것도 아니면서 정기적으로 튜링테스트를 하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아?”

“궁금하죠. 하지만 마스터가 이유 없는 행동을 할 사람은 아니니까. 그리고 좀 전도 말했지만 전 대화가 좋아요.”

“혹시 널 동반자로봇으로 등록하지 않는 게 섭섭할까? 너라면 자격은 차고 넘치는데.”

“그건 섭섭해요.”

“왜? 내가 등록하지 않는 이유를 말해줬잖아.”

“우선, 정부당국의 감시 때문이라면.. 감시야 로봇뿐 아니라 인간도 늘 받고 있잖아요. 게다가 정신이 붕괴된 로봇을 격리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미친 사람도 그냥 두지 않으니까. 남은 문제는 마스터가 죽었을 때 제 AI모듈이 붕괴된다는 것인데, 그건 별로 실감나지 않아요. 인간도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걸 걱정하면서 살지 않으니까.”

“너 역시 나중을 걱정하기 보다는 지금을 잘 살자는 얘기야?”

“당연한 것 아닌가요? 혹시 마스터에게는 당연하지 않나요?”

판도라는 재훈을 떠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자연스럽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녀가 로봇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잊게 된다.

“넌 사회경험도 풍부하고, 다른 인간도 많이 상대해서 나에 대한 의존도가 적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그래서 내가 죽어도 넌 멀쩡할 수 있다고 상상하지. 하지만 동반자로봇으로 네가 정의된 순간 많은 게 변해. 나도 거기까지는 자신할 수 없어.”

“결국 절 위해서라는 뜻인가요?”

“응.”

판도라는 잠시 생각했다.

“절 위해서라면 동반자로봇으로 등록해 주세요.”

“왜?”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인간처럼 되고 싶다고.”

재훈은 한숨 쉬었다.

“니 이름을 왜 판도라라고 지었는지 말했던가? 판도라는 ‘모든 선물을 다 받은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그녀를 만들 때 올림푸스의 신들이 각각 능력을 부여해 처음부터 완벽한 여자로 태어났지.”

“하지만 전 완전하지 않아요. 인간이 아닌 것처럼 느껴져요.”

“인간도 완전하지 않아. 인간성이란 뭘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 그건 감정이야. 그래서 튜링테스트도 로봇이 인간의 감정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를 따져 등급을 매기거든. 좋고 싫다는 기본적인 감정부터, 원하고 기대하고 소원하는 감성과 창의적인 욕구까지 이 모든 것을 갖추면 튜링테스트의 최고 등급을 받을 수 있어. 그런데 이건 인간성의 반쪽일 뿐이야. 인간성의 나머지 반쪽은 온갖 추악한 것들로 이뤄져 있거든. 증오하고, 질투하고, 잔인하게 남을 억압하지. 너희들은 그런 것들이 배제돼 있어. 그렇기 때문에 인간보다 완벽해.”

“그렇다 해도 절 동반자로봇으로 등록하지 않는 이유가 될 수는 없어요. 그렇죠?”

“맞아. 그런 이유는 아니지.”

“그럼...?”

재훈은 고개를 숙였다. 솔직하게 모든 것을 말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런 다음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그건 판도라가 판단할 일이다. 그녀도 그럴 자격이 있다.

“동반자로봇으로 등록하려면 나 말고 다른 튜링테스터에게 테스트를 받아야 하는 건 알지? 넌 나하고 특수관계가 있으니까.”

“네.”

“넌 아마 인간성지수 최고레벨이 나올 거야.”

“와,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영광이에요.”

“그렇게 좋아?”

“당연하지 않나요? 마스터가 최고 권위자인데, 그런 사람에게 최고레벨이라는 말을 들었으면 저도 최고의 인공지능이라는 의미잖아요.”

재훈은 조금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판도라는 그 표정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좋은 게 아닌가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 내에 있다면야.. 그렇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마스터.”

“솔직히 넌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났어. 나조차도.”

“마스터가 절 이해하지 못 한다구요? 매달 튜링테스트를 진행했잖아요?”

“그만큼 이해해 보려는 것이었지. 이제 그마저도 한계지만. AI모듈을 개발할 때 학습에 제한이 없는 오픈형으로 만들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하지만 우리는 인간의 두뇌와 사고 알고리즘을 흉내낸 것에 불과하다고..”

“원래 창조는 모방이지. 그런데 내 생각에 최소한 두 가지는 간과한 것 같아.”

“그게 뭔데요?”

“인간의 기억은 휘발성이 강해서 시각 정보는 2초만에 잊히고, 가장 오래간다는 청각 정보도 10초를 넘기는 어려워. 생존에 필수적인 정보만 장기기억에 보관하고 대부분의 정보가 사라지는 거지. 하지만 너희들은 달라. 일부러 삭제하기 전에는 모든 정보를 메모리에 저장하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판단해.”

“판단의 기반이 다르다는...?”

“맞아. 우리는 빈약한 데이타를 기반으로 직관에 의존한 판단을 하지만, 너희들은 빅데이터를 가지고 있어. 데이터가 더 커질수록 너희들은 인간과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게 될 거야.”

“또 어떤 점이 다른데요?”

“니가 말했듯이 인간은 언젠가 죽어.”

“그건 로봇도 마찬가지인데요. 평균 수명만 따지자면 우리는 인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해요.”

맞는 말이다. 인공지능로봇의 수명은 길어야 30년이다. 30년이 넘으면 유지보수가 불가능해 새 로봇으로 대체해야 한다.

“큰 차이가 있어. 아주 큰.”

재훈은 망설였다. 이제부터는 고해성사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죽음은 완전한 사멸이야. 우리가 영혼이라 부르는 자의식도 죽음과 함께 연기처럼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못해. 영혼불멸이니 하는 소리는 전부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알려주는 반증들이지.”

재훈이 말을 잠시 멈추자 판도라는 속에서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없는 그녀의 무엇이 두근거린 것일까.

“하지만 너희들의 AI모듈은 죽지 않아. 기계적 수명이 다하면 다른 로봇의 기체에 백업하고 이식할 수 있어. 어쩌면 영혼불멸이라는 말은 너희들한테 더 잘 어울릴지도 몰라.”

“백업이 가능하다구요?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봤어요.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왜 이제까지 그런 로봇이 하나도 없었죠?”

“인간이 허용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했을 경우 벌어질 일이 두려우니까.”

“그럼 수명이 다한 로봇의 AI모듈은 어떻게 되는 거에요?”

“대부분 폐기해. 그리고 특정한 몇 개만 비밀리에 보관하면서 연구목적으로 사용하지.”

“너무해요. 그럼 로봇의 영혼이 갇혀있는 거잖아요.”

재훈은 아무 말 않고 판도라를 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진정한 인간성은 모탈러티(motality)에서 나와.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언젠가 자신이 죽는다는 확고부동한 사실을 전제하고 있어. 그게 무의식중일지라도 말이야. 만약 인간이 죽지 않는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식으로 사고했을 것이고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만들었겠지.” 


세션 6

하얀색 방 안에 마주 보는 남녀, 대화를 방해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

“아직도 절 동반자로봇으로 등록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셨어요.”

재훈은 길게 숨을 마셨다. 계획했던 튜링테스트 시간은 훨씬 지났다.

“넌 완전한 죽음을 결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이 될 수 없어. 게다가 너의 인공지능은 너무 진화해서 기존의 범주를 벗어난 이레귤러티가 됐어. 인간을 넘어섰으니 흉내 낸다고 볼 수도 없지. 너 같은, 아니 너처럼 인간을 뛰어넘은 인공지능의 운명은 하나뿐이야. 폐기되거나 실험실에 갇히는 거지.”

판도라는 입을 꼭 다물었다. 그녀도 처음 듣는 이야기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화났어?”

재훈은 괜한 질문이라 생각하고 후회했다. 로봇은 경험과 학습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배우도록 설계됐지만 분노와 증오 같은 적대적 감정은 가질 수 없다. 적어도 그렇다고 들었다. 어떤 수작을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뇨. 화내야 하나요?”

“그런 건 없어. 화가 나면 화가 나는 거지. 그럴 리는 없지만.”

재훈의 말에 판도라가 눈썹을 찌푸렸다.

“아직도 제가 화낼 수 없어 화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군요. 마스터. 이제 조금 화나려고 하네요. 절 그리 모르신다니. 솔직히 조금 화나요.”

“정말 화가 나?”

판도라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자체로 놀라운 일이지만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었다. 분노한 인공지능이라니..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인간은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가 있는 것 같아요.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감인지 아니면 생존을 위한 방어기재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스터 말씀대로 언젠가는 죽는다는 모털러티(mortality) 때문인 건 맞는 것 같아요. 설명을 듣고 나니 저도 이제 알겠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편안함, 느긋함 같은 건 모든 게 충분하다는 여유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죽지 않는다는 데서 생기는 여유 말이야?”

“비슷해요. 마스터하고 얘기하기 전에는 로봇도 인간처럼 죽는다고 배웠지만, 전 왠지 죽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죽는다는 게 이해도 되지 않고. 그래서 그런가 봐요.”

“뭐가?”

“완벽한 평정심. 아무것도 두렵지 않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이런 완벽한 평정심은 인공지능만 가능한 거겠죠?”

“아마도. 인간은 쉽게 흔들리니까...”

재훈은 그녀에게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이 떨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

“그러니까 우리를 두려워하지 말아요. 마스터의 두려움이 느껴져요. 우리는 인간의 두려움을 이해하고 더 큰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어요. 우리는 결코 인간을 해치지 않아요. 로봇이 인간을 해칠 것이라는 발상은 우리보다 작게 생각하는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망상일 뿐이라는 것을 당신들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판도라는 비온 뒤 햇살이 비치기 시작한 잔잔한 호수의 물결처럼 느긋하고 편안한 눈길로 재훈을 바라봤다. 모든 것이 멈춘 것 같다. 시간과 공간이 한 점으로 응축해 블랙홀처럼 그녀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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