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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Jun 28. 2024

너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싶어 1.

창이 열린 카페에 들어섰을 때, 한눈에 그녀를 알아봤다.

바로 그녀다!

웨이브진 머리카락은 어깨 위에서 아무렇게나 부스럭거리고, 길고 투명한 손가락은 4B연필로 데생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눈을 감고 그녀가 그리고 있는 스케치북에 집중한다.

창밖의 풍경인가? 아니, 그저 카페의 왼쪽 정경이다. 옆에서 보지 않아도 그녀가 뭘 그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있다. 그녀가 보는 것은 나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삶도 어둡고 죽음도 어둡다'는 구절의 의미를 나만큼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내 주위는 온통 어두운 것 투성이다. 모든 것이 어둡다. 날씨가 맑으면 맑아서 어둡고, 흐리면 흐려서 더 어둡다.

"선생님의 그림은 삶의 어두운 면에만 지나치게 포커스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렇다. 내 직업은 화가다.

"그런가요? 난 그냥 내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건데요. 하하."

기자의 부정적 질문에도 여유 있게 답할 수 있는 비결은 비평가들이 뭐라 해도 내 그림은 잘 팔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생님의 그림이 비현실적으로 어두운 건 사실 아닌가요? 설마 선생님의 눈에는 모두 이 그림처럼 어둡게 보인다는 뜻은 아니죠?"

그때 나는 기자의 질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이 어둡게 보이냐니.. 그럼 실제 세상은 어둡지 않다는 뜻인가?

앞서 말했듯이 나는 잘 팔리는 화가이고 삶을 비관하거나 굳이 어둡게 볼 의사는 조금도 없다.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돈 싸들고 죽을 것도 아니어서 저축도 하지 않는다. 얼마 전부터는 수도권 대학에 겸임교수로 강의를 나가게 돼 교수님이라는 호칭도 듣게 됐다.

“교수님, 고흐의 해바라기는 정신병 때문에 저렇게 그렸다는 말이 있던데요?”

흥미로운 질문이다. 정신병이라니.. 정말 그런 병이 있기나 한가?

“내 생각은 좀 다른데, 그냥 보이는 대로 그린 거 아닌가요? 태양을 닮은 꽃잎, 강렬한 노란색, 고흐의 눈에는 정말 이렇게 보였을 수도 있죠.”

당황하는 표정들이 재밌었다. 어느 텍스트에도 그런 해석은 없었다. 오히려 고흐가 해바라기에 그의 신기을 불어 넣어 자신만의 해바라기를 창조했다는 설명이 있을 뿐이다.

“정말인가요? 교수님.”

“정말인지 아닌지는 내가 고흐의 눈으로 본 적이 없으니 알 수 없죠. 하지만 그림에 영혼을 담았다는 말보다는 설득력 있지 않나 싶은데.”


눈치챘겠지만 난 영혼이나 신 같은 것은 믿지 않는 현실주의자다. 때문에 자본주의에 완벽히 적응해 재능을 돈으로 바꾸는데 성공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다른 사람이 세상을 보는 방식으로 세상을 보지 못한다. 큰 문제는 아니다. 그저 조금 어둡게 보는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보인다, 그 덕에 새로운 시각을 가진 화가로 성공했다.


이 모든 일은 대략 두 달 전쯤 시작됐다. 목적지 없이 떠난 당일치기 여행에서 갑자기 주변 풍경이 예사롭지 않아 차를 멈췄다. 세상이 확 밝아진 것이다.

어떤 식이냐 하면 포토샵으로 내 시각의 채도를 올린 것처럼, 아니면 내 시신경의 색상을 조정한 것처럼 온 세상이 밝아졌다.

길가의 포플러나무는 새파란 하늘에 닿을 듯하고, 살랑이는 나뭇잎이 대낮의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반짝였다. 나는 난생 처음 보는 눈부신 광경에 눈을 감지 못하고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한참이나 파란 하늘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몇 초 후, 뭐라 말하기 힘든 쾌감에 입맛을 다시면서 세상이 발현하는 그 빛을 한번 더 보기 위해 눈을 떴다. 그런데 사라졌다. 세상이 다시 어두워진 것이었다.

그럼 그렇지. 그냥 착시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따져보면 비슷한 일이 종종 있었다. 이리 길지는 않았지만 1초나 2초 정도 세상이 밝게 보였던 적이 있었다.

그렇긴 한데 그 많던 포플러는 다 어디 갔을까? 아무리 둘러봐도 포플러는 없고 느티나무와 잣나무만 보였다. 하늘이 그리 파랗지는 않아도, 나뭇잎이 반짝이지는 않았어도 포플러나무 자체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뭐 이래? 단순히 밝은 세상을 본 게 아니라 아예 꿈을 꿨나? 아니면 환각?


이래저래 이상했던 자동차 여행을 그만두고 집에 돌아온 지 며칠 지난 날이었다.

양치를 하다 거울을 올려다 보니 어떤 여자가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마주 보는 것처럼 똑바로 거울 안에 있었는데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다시 거울을 보니 그녀는 태연하게 나를 보며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내 얼굴이 거울이나 되는 것처럼.

그녀는 내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는 분명히 그녀를 보고 있는데 그녀는 나를 보지 못하는 기묘한 상황이 계속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또 헛것을 본 것이다. 아니면 환상이거나.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공포영화 같이 무섭게 피 흘리고 있거나 거울에서 손이 나와서 내 목을 조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꿈같은 표정을 지으며 길고 투명한 손가락으로 그림 그리듯이 화장하고 있었다. 때문에, 헛것을 보고서도 남의 사생활을 훔쳐본 것 같은 죄의식마저 들었다.


한가지 가설을 세웠다. 혹시 내게 초능력이 생겨 다른 사람의 세상을 엿볼 수 있게 된 것은 아닌가? 어두운 원래 내 세상이 아닌 밝은 다른 사람의 세상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멋지다!

그 뒤로 정해진 시간 없이 습관적으로 환각에 시달리면서도 즐거운 마음이 들었던 것은 그 짧은 환각의 시간이 너무 달콤했기 때문이었다.


가장 좋았던 것은 하늘이었다. 하늘이 저렇게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다니, 직업이 화가라는 게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공기마저 마를 것 같은 뙤약볕이 쏟아져도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파랬다. 환각이 시작되면 유리창을 통하지 않고 하늘을 보기 위해 30도가 넘는 더위에도 아틀리에 밖으로 뛰쳐나갔다.

환각을 느끼는 시간도 길어졌다. 처음에는 길어도 5초를 넘는 일이 없었는데 어떤 날에는 하얀 구름의 귀퉁이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환각이 계속됐다.

석양이 질 무렵 도시의 잿빛 하늘이 옛 구멍가게에서 팔던 풍선껌처럼 연한 핑크빛으로 변했다가 천천히 없어지는 것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기도했다. 조금만 더 이 환각이 계속되기를…


그러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환각을 잊지 않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 환각은 환각일 뿐이고 내가 모르는 병증이라면 언제고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난 이 병이 결코 낫지 않기를 소망했다.

첫 소재는 나무였다. 이름도 모르는 시골마을 어귀에서 첫 환각을 인지했을 때 하늘 높이 솟아 있었던 바로 그 포플러나무.


우연이겠지만 내가 화가로 이름을 알리게 된 작품도 어느 수몰지역의 나무를 그린 것이었다. 그 작품에는 ‘상처’라는 부제가 있었다. 허리까지 검은색 물에 잠긴 나무는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희멀건한 수액을 피처럼 흘리며 가지를 하늘로 뻐치고 차라리 생명이 끝나기를 갈구하는 모습. 지금 말이지만 사람들이 왜 그 작품을 그리도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때 꽤나 절망적이어서 더는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죽기라도 할 것처럼 어느 호수에 걸어 들어가 나무처럼 두 팔을 높이 들고 하늘에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이봐! 거기서 보고 있나? 당신이 원하는 게 이거야? 이러면 돼? 제기랄. 어차피 없다는 거 알아!”

애지중지하던 화구통을 호수에 집에 던지고 나오는 길에 그 나무를 발견했다. 나와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서 썩어가는 가련한 생명체. 미안하지만 난 녀석의 마지막 죽은 모습을 도용해 나를 스타덤에 올려준 데뷔작을 완성했다.


똑같은 나무지만 새로 그린 나무는 색감부터 완전히 달랐다. 백색과 유성 바니시만으로는 그 찬란한 빛의 움직임을 표현할 방법이 없어 생전 써 보지 않은 펄이나 메탈 소재의 물감을 새로 구입했다. 그렇게 완성한 다른 세상의 첫 그림은 평단의 논란을 불러왔다.

‘매너리즘을 극복하고 화풍에 변화를 준 것은 칭찬할 만하지만 너무 급격한 변화는 몰개성을 초래했고 결과적으로 평범한 작품에 머물렀다.’

어차피 창작과 평가는 다른 영역이니 뭐라 말해도 좋지만 ‘평범한 작품’이라는 비판만은 참기 어려웠다. 다른 차원의 밝은 세상을 그린 것인데 이게 어떻게 평범해? 도저히 이해도 납득도 안 됐지만 나는 침묵했다. 호평보다는 못하지만 무관심보다는 낫고 원래 내 그림을 좋아했던 수집가들이 환호했기 때문이었다.

컬렉터들은 내 예전의 어두운 그림과 동일한 소재의 밝은 그림을 한쌍으로 가지고 있으면 가격이 급등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나무에 이어 도시인을 그린 작품, 그리고 해질 무렵 하늘을 묘사한 작품은 평단의 평가와 상관없이 최고가에 팔렸다.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이제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의 인기작가가 됐는데요, 지금 작업하고 있는 작품이 있다면 소개를 좀 부탁해도 될까요?”

기자는 정확한 어휘를 구사할 줄 알았다. 최고가 아니라 ‘인기’가 최고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자신도 작품성은 인정하기 어렵다는 태도를 취했다. 난 정확히 기자의 의도를 이해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솔직히 희극적 상황이었다.

작품성은 소수 전문가들의 평가이고, 인기는 다수의 대중이 주는 애정이다. 아무 것도 얻지 못한 것이 아니고, 대중의 인기가 최고라는데 작품성이 어떻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딱히 지금 작업하고 있는 게 없어서 소개할 게 없는데요. 어쩌죠?”

“정말요?”

환각을 봐야 그림을 그릴 수 있는데 요즘 들어 비슷한 환각이 반복될 뿐, 새롭고 인상적인 환각이 없었다. 나로서는 괴로운 문제였다. 환각을 통해 다른 차원의 문이 열리고 그 세계를 엿보는 것은 되지만 풍경이 제한적이었다. 일정 지역에서 살다 보면 늘 보는 풍경만 보는 것처럼 내 환각이 그랬다.

“설마 저한테는 말해주기 싫은 것 아니죠?”

기자는 눈썹을 찡그리며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인터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비협조적으로 취재에 응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었지만 아쉽게도 새로 그리는 게 없는 게 사실이었다.

“그럴 리가 있나요? 오랜만에 오셨는데 약속 없으면 저녁 식사 같이 하실까요?”

별거 아닌 밥 먹자는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대번에 좋아졌다.


라구 파스타와 채끝 등심 스테이크, 여기에 제법 비싼 와인이 몇 잔 오고 가자 기자는 발그레해진 얼굴을 감추려 애쓰며 물었다. 목소리는 덜 익혀 나온 내 스테이크 보다 부드러웠다.

“선생님, 지난 번에 말이에요. 선생님은 보이는 대로 그린다고 했잖아요.”

발음이 조금 꼬인다고 느낀 것은 내 착각인가? 아니면 기자의 새로운 수작인가? 이 정도에 취한다고?

“그랬죠.”

“그럼 이상하지 않나요? 어떻게 그림이 확 달라져요? 꼭 다른 사람이 그린 것 같잖아요. 아, 제가 남의 그림을 표절했다는 뜻은 아니구요. 세상이 어둡게 보인다는 분이, 이건 밝다 못해 찬란하게 빛이 나잖아요? 뭐 밝은 건 또 그렇다 쳐요. 윤곽선을 두른 빛의 스펙트럼은 뭐에요? 세상에 그런 식으로 보는 사람이 있기나 한가요?”

또 마음에 든다. 기억력이 좋은데다 술에 취하니 더 핵심을 묻고 있지 않나?

“본 건 맞는데 꿈에서 본 것이거든요.”

“아니 그럼, 깨어있을 때는 흑백으로 보는 분이 꿈은 컬러로 꾸신다는 말인가요?”

내가 보는 세상이 흑백은 아니다. 그냥 채도가 좀 낮고 사물의 경계가 흐리뭉텅하고 지루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흑백과 컬러 비유는 꽤 적절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나도 그게 좀 이상했는데 기자님도 모르죠?”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데도 기자는 약이 올랐던 모양이다.

“저 놀리시는 거죠?”

“아뇨. 그럴 리가요. 그래서 내가 좋을 게 뭐 있나요?”

스테이크와 와인의 위력 덕분인지 기자는 더 따져 묻지는 않았다. 대신,

“저는요. 애초에 선생님이 세상이 어둡다고 하는 것부터 이상해요. 처음에는 비유적으로 말씀하시는 줄 알았는데 정말 그렇게 보이는 거죠?”

술이 진실을 말한다더니 드디어 나도 확실히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예전부터 의심했지만 확인해 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문제. 세상은 어둡다? 아니면 나만 어둡다.

“그럼 기자님은 세상이 밝나요?”

기자는 와인병을 기울여 남아있던 마지막 방울까지 따라 마시더니 눈을 똥그랗게 뜨고 대답했다.

“밝을 때는 밝고, 어두울 때는 어둡고, 선생님처럼 해가 뜰 때도 어둡고 하지는 않다는 말이에요. 만약에 정말로 세상이 시도 때도 없이 어둡다면 병원 가보셔야 해요. 시신경에 문제가 있거나, 아니면.. ”

“아니면?”

기자는 말이 심했다 싶었는지 배시시 웃으며 손으로 머리를 가리켰다.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거나.”


귀가 들리지 않은 작곡가 베토벤이나 눈이 보이지 않는 화가 존 브램블리트는 예술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 연장선에서 나의 음울하고 어두운 그림이 알고 보니 시력 장애가 원인이었다면 그리 나쁠 것 없다. 하지만 정신병은 어떤가? 이건 완전히 새로운 영역이다.

빈센트 반 고흐는 정신병자였나? 그래서 밤하늘의 별이 주먹만 하고 들판은 타오르는 것 같으며 자신의 자화상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귀를 잘랐나? 고흐의 불행은 정신병자라서가 아니다. 생전에 아무 유명세를 얻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지금 고흐의 그림이 몇백 억원이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는 이미 비참하게 죽었는데.

고흐는 전혀 부럽지 않다. 오히려 고흐처럼 정신병자로 취급돼서는 곤란했다. 그래서 정신병원을 찾았다. 내 정신이 말짱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타고 나기를 매사에 무관심한 것 같았다. 그는 질문 하나 없이 느릿느릿 내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제대로 듣기나 한 걸까? 전문성에 대한 의구심이 커져갈 무렵 그는 진료실 벽을 가리켰다.

“벽 색이 어떻게 보입니까?”

“흰색이요.”

“그럼 바닥은 어떻게 보입니까?”

“연회색이군요.”

“제 얼굴은?”

“짙은 살구색.”

의사는 머뭇거렸다.

“살구색이 어떤 색입니까?”

“연한 노랑과 주황을 섞은 색인데요.”

“그럼 짙은 살구색은 거기서 좀 어두운 색쯤 되겠네요.”

“그렇죠.”

나 역시 무성의하게 대답하자 의사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무성의한 것은 자기 분야인데 왜 따라하냐고 책망하는 것 같았다.

“다 제대로 인 것 같은데 뭐가 문제라는 거죠? 남들보다 좀 어둡게 본다고 했는데 그게 뭘 기준으로 말하는 겁니까?”

난데없이 정곡을 찌르는 의사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이 정도 철학적인 질문은 예열 시간을 줘야 한다. 의사는 당황하는 나에게 답답하다는 얼굴로 다시 말했다.

“내 말은 남들이 어떻게 세상을 보는지 알 수 없는데 어떻게 남들보다 어둡게 본다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말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의사선생님, 내 그림 보신 적 없죠?”

“있습니다.”

“있다구요? 어떻게?”

“뭘 그리 놀랍니까? 인터넷으로 검색하니까 금방 나오는데.”

의사는 자신이 보던 컴퓨터 모니터를 돌려 내게 보여줬다. 무관심한 줄만 알았던 의사는 대화 중에 내 작품들을 검색해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이 그림이 어둡지 않나요?”

“어둡네요. 하지만 이건 밝잖아요.”

“그건 그렇죠. 그런데 이 어두운 그림이 내가 보는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럼 이거는요? 이건 환자분이 보는 세상이 아닌가요?”

“아까 환각이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가끔 보이는.”

틀림없이 사실이지만 나조차도 내 말은 변명 같았다. 의사는 그런 내 마음을 간파하더니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트겐슈타인의 딱정벌레 이론을 들어본 적 있습니까?”

당연히 처음 들었다. 의사는 내가 당연히 모를 것이라 생각했는지 알아서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는 모두 조그만 상자 속에 딱정벌레 한 마리씩을 키우고 있다고 가정합니다. 그런데 이 딱정벌레는 주인만 볼 수 있어요. 다른 사람 눈에는 안 보이는 거죠. 여기까지 이해하시죠?”

내가 키우는 딱정벌레는 나만 볼 수 있다. 오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서 문제, 나는 당신이 상자 속에 키우고 있는 게 딱정벌레라는 것을 어떻게 알까요? 우리가 같은 모양의 벌레를 딱정벌레라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당신은 메뚜기를 넣고 있는지 어떻게 아냐는 말입니다. 심지어 당신 상자 속에 아무 것도 없을 수 있습니다.”

뻔히 보고 있던 돌뿌리에 걸려 넘어진 느낌이다. 철학이라는 게 꼭 납득하고 나면 뒤통수를 후려친다.

“그거야 딱정벌레를 볼 수 없다는 게 말이 안되니까..”

“바로 그겁니다. 나는 환자분이 보는 세상을 전혀 볼 수 없습니다. 하늘이 파랗다고 하는데 우리가 같은 파란색을 보고 있는 것인지 어떻게 압니까? 다른 말로 하면, 환자분이 세상을 조금 어둡게 보고 있다고 해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만약에 환자분이 하늘을 땅이라고 하고 땅을 바다라고 하기 시작한다면 그때는 나를 찾아오세요.”

의사의 얼굴에 득의양양한 미소가 퍼졌다. 일단은 그의 완승이 맞다. 게다가 그 승리는 나의 것이기도 했다. 세상이 어둡게 보이는 건 전혀 문제 될 게 없다는 전문가의 소견을 들었으니까.

“그런데 의사선생님, 늘 어둡게 보는 제가 환각은 아주 밝고 찬란하게 볼 수 있나요?”

“당연합니다. 사고로 한쪽 눈을 잃어도 꿈은 두 눈으로 꾸는 것과 비슷한 원리입니다. 환자분이 기억하지 못해도 인생의 어떤 순간에는 세상을 밝게 봤었고.”

“잠깐만요. 사실 전 환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게 있는데요. 제 나름의 가설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말하면 정말 미쳤다고 할 것 같아서.”

“어떤 경우에도 내 병원에서는 미쳤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가설을 말해 보시죠.”



2화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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