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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Jul 21. 2024

내 안에 나 있다. -7-

우리는..

이정을 만나고 온 뒤, 되도록 평상시와 똑같이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그녀 역시 연락하지 않았다. 그녀가 연락하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신경 안 쓰는 척했지만 검색창에는 언제나 세 글자, ‘루게릭' 

그는 메이저리그의 야구선수였다는데, 1루에도 가 본적 없는 내가 왜?


찾아보니 루게릭병의 예방법 같은 건 없었다. 근육 약화, 발음 이상 같은 초기증상이 있다는데.. 지금은 괜찮고.. 에이, 다 소용없는 짓이다.


틈나는 대로 K를 불렀지만 그는 응답하지 않았다. 이정의 말대로 내 의식에 합쳐진 것이라 믿게 됐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K 역시 대답하기 쉽지 않은 문제들뿐이었다. 이를테면,


‘나 이제 어떡해야 해?’


지금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10년 후의 내가 알 도리는 없다. 그럼에도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따지고 보면 내일 출근길에 교통사고로 심하게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다. 루게릭이 아니라도 불가항력적으로 죽을 방법은 많았다. 그런데도 내 걱정은 온통 10년 뒤 찾아올 루게릭병이라니. 


정신을 차려 기분을 바꿔보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내 머리 구석에 10년 후의 내가 틀어 박혀서 깊은 우울감을 뿜고 있는 것이다. 그 우울에 나는 감염된 것이고.


“선배 요즘 안 좋은 일 있어요?”


회사에 모든 사람들이 내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겠지만, 맨날 바닥만 보고 걸어다니거나 점심도 혼자 먹고.. 신지영이 처음으로 물었다.


“아니. 내가 안 좋아 보여?”

“헐, 거울 좀 봐요. 다크서클이 그냥.. 목까지 내려 앉겠네.”


거울? 

K를 처음 만난 것도 거울 앞 아닌가? 내가 왜 잊고 있었지? 집에 가자마자 거울 앞에 섰다.


“이봐 K? 거기 있어? 있으면 제발 대답해. 응?”


내 얼굴만 보였다. 말하는 것도 나뿐이다. 


“너 진짜 안 나오면 그냥 확 죽어버린다. 10년 후고 나발이고 다 필요없어. 지금 죽으면 루게릭도 안 걸릴 거 아니야?”


진심이었나?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줄도 모르고 지껄였다.  


-그냥 살아.


들렸다.


“뭐야? 아직 있었어?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나중에 죽어도 늦지 않아.

“그동안 뭐했어? 이정씨랑 만났는데 그때 한 얘기 다 들었어?”


-죽고 싶다는 건 그만큼 삶이 애틋하다는 것인데, 인생이 그만큼이나 소중한가?

“왜 계속 딴소리야? 내가 묻잖아. 어떻게 된 거냐고?”


도무지 대화가 되지 않았다. K가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인지 무시하는 것인지. 게다가 그마저도 멈췄다. 


“알았어. 괜찮으니까 뭐라도 말해봐. K, 야, 강동하!”


그 뒤로는 집에서나 회사에서나 거울만 보고 살았다. 때때로 K의 외마디 소리를 들었지만 이전만큼도 대화가 이어지지 않아 환청인지, 헛소리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하나 더, 외면하고 살았지만 나는 이정이 그리웠다.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리운 감정.

보려면 볼 수 있는데 그리움은 생소했다. 마치 영원히 볼 수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느낌이 정확했다. 게다가 한번도 보지 못했던 이정의 여러 표정과 모습이 떠올랐다. 


그의 기억이 합쳐지는 것이다. K의 기억이, 10년 후 기억이 현재로 스며들었다. 

다른 기억들도 많을 텐데 유독 이정에 대한 기억만 떠오른다는 건 가장 소중해서가 아닐까? 


정상적인 회사 생활이 불가능해졌다. 온종일 거울에게 말을 걸고, 툭툭 튀어나오는 ‘그리움' 때문에 울고, 누가봐도 제정신이 아니니 정신병원에 끌려가기 전에 휴가를 신청했다. 


뭘 할 수 있을까? 

마음을 비우고, 비워지지 않는다. 정서 안정에 좋은 음악을 틀고, 바로 꺼버렸다. 배달 음식을 잔뜩 시켰지만 비닐포장지를 뜯는 순간 식욕이 사라졌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뭐가 하고 싶지? 뭘 해야 하지? 

계속 이정의 얼굴만 떠올랐다. 나의 과거가 아닌 K의 과거형이다. 나의 기억이 아니다. 


루게릭병의 진단이 나왔을 때,


“아무 걱정마. 나 이정이야. 내가 해결 못하는 건 없어. 내가 알아서 할게. 진짜 걱정하지마.”


근위축이 심해져 걷지 못하게 됐을 때,


“동하씨가 나한테 의지하니까 좋은 점도 있네. 내가 없으면 당신은 안되는 것 같잖아. 내가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아.”


마침내 과거로 의식전송을 시행하기 전,


“지금이라도 멈출까? 과거를 바꿀 수 있다는 보장은 전혀 없어. 하지 말자. 우리. 지금 가면 나하고는 이별이잖아. 나하고 이별하고 싶어?”


이별하기 싫었다. 그때 K의 감정이 고스란히 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나는 회귀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루게릭병의 원인을 찾아 회귀하는 것이 아니었고, 그녀와 이별하기 위해 회귀하는 것이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 만나지 않고 우연히 만나더라도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나다. 그것이 미래든, 과거든 간에 상관없이 나일 뿐이다. 

받아들이고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당연했다. 진작에 그래야 했다. 


-그녀를 사랑해..

“뭐?”


외마디처럼 K의 마지막 목소리가 울렸다. 직감적으로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에게 완전히 합쳐졌으니 K는 없는 것이다. 이제 오롯이 강동하만 남았다. 나, 강동하.  

K가 사라지고 나니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명확해졌다. 

나, 강동하는 이정이 그립고, 그 그리움은 미래의 감정이지만 현재는 보고 싶다는 감정으로 갈무리됐다. 

보고 싶으면 봐야지. 이기적인 선택일지라도, 이기적일 수밖에. 


전화 걸었다. 첫 번째 벨이 끝나기 전에 받았다. 그녀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전화할 거 알고 있었죠?”

“네.”

“우리에게 그런 미래는 없었을 텐데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요.”
“천재 과학자가 그냥이라니.. 별로 어울리지 않는데.”

“과학자도 그냥 직감에 따를 때가 많아요. 생각은 좀 정리 됐어요?”

“네. 이정씨는?”

“나도요. 어떻게 할 거에요?”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하자는 대로 할 건가요?”


내내 물컵만 보고 있던 이정이 드디어 얼굴을 들어 내 눈을 쳐다봤다. 그녀가 내 눈 속에서 보고 있는 영혼은 누구의 영혼일까? 나일까? K일까? 그게 누구든 구분할 수 있나? 


“그렇죠. 동하씨 혼자 문제가 아니죠. 더 이상은 그렇게 둘 생각도 없구요. 나는 내가 알아서 할게요. 그러니까 동하씨도 알아서..”

“내가 하자는 대로 하지는 않겠다는 거죠?”

“그렇게 들렸다면 그럴 수도 있고.”

“나는.”

“나는?”

“나는 마음 가는 대로 할 거에요.”

“마음이 어디로 가는데요?”

“이정씨에게.”

“고마운 말이지만 일부로 그럴 거 없어요. 동하씨에게 나는 이제 막 만난 사람일뿐이잖아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무엇보다 지금은 이게 누구의 감정이든 간에 당신이 그리워 죽겠어요. 바로 앞에 있는데도 말이에요. 신기하죠? 눈 앞에 있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느낌이라니.”


나를 쳐다보던 이정의 눈이 다시 물컵으로 돌아갔다. 과학자 이정이 생각하는 것이다. 


“동하씨 기억이 남아있어서 그럴 거에요. 시간이 지나면 그 감정이 사라질 수 있어요.”

“그럼 새 감정이 생기겠죠.”

“어떤 감정이?”

“보고 싶다거나, 좋아 죽겠다는 그런 거?”


감정은 이상하다. 내가 나를 받아들였을 뿐인데 우울에서 즐거움으로 요동친다. 감정은 표정에 드러나고 그녀도 눈치챘다.


“기분 좋아 보여요.”

“내가 기분 좋은 게 싫어요?”

“아뇨. 웃는 얼굴 보는게 너무 오랫만이라. 좋아요.”

“뭐가요? 웃는 얼굴이요? 아니면 내가?”

“둘 다. 어떻게 구분해요? 구분할 필요가 없죠. 나에게 동하씨는 언제나 한 사람인데.”

“바로 그거에요. 10년 후도 나, 지금도 나. 내가 당신을 좋아하고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정해져있어요. 미래에서 온 당신이 누구보다 잘 알 거에요.”

“그렇긴 하지만…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죠. 해결되지도 않을 것이고.”

“아, 루게릭병이 남아있지. 그건 뭐 어쩔 수 없죠. 어쨌든 지금은 멀쩡하니까,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미래 때문에 걱정만 하고 살 수는 없으니까. 이정씨를 포기할 수도 없고. 물론 나중에 이정씨를 힘들게 할 수 있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내가, 아니 이정씨가 알아서 하세요.  나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무 무책임한가?”


이정이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고민한다. 머리를 조금 흔들더니,


“좀 변한 것 같아요.”

“그렇죠? 나 변했죠? K가 그러더라구요. 이미 미래도 바뀌었다고. 그래서 희망을 가져보려구요. 루게릭에 안 걸릴 수도 있고, 걸렸더라도 증상이 미약하거나 치료할 수 있는 방향으로.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오는 세상인데. 이게 더 안 믿기지.”

“훗.”

“지금 웃었어요?”

“네, 웃었어요. 웃으면 안되는데.”

“니체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하더라구요. 몇 번이고 좋다. 생이여 다시 한번. 아무리 불행하더라도 운명을 사랑하라고. 나도 그러려구요.”

“불행해지더라도 나를 사랑하겠다?”

“사랑하겠다고 까지는 말 안 했는데.”

“이러기에요?”

“실은 K가, 아니 미래의 내가 마지막으로 전한 말이 있어요.”


K의 이야기가 나오자 반사적으로 그녀가 경직됐다. 그리고 내 입이 열리기만 기다렸다.


“그녀를 사랑해.”

“네? 그게 무슨…?”

“그쵸? 이상하죠? 처음에는 이정씨를 사랑한다는 고백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따져보니까 그게 아닌 것 같았어요. 그건. 당신을 사랑하라는 부탁이나 명령 같은 거 아니었을까요? 그녀를 사랑하라는..”

“과거로 돌아와 나를 만나지 않으려고 했던 동하씨가 변했다는 뜻인가요?”

“네. 내가 변한 거죠.”

“그래서, 사랑할 건가요 나를?”

“네 사랑하려구요. 내가.”


미래의 아내에게 하는 고백이니, 내 고백도 미래형이다. 당연하지 않나? 

조금은 뻔뻔스럽게 고백하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이정, 그녀가 답했다.


“허락할게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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