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혁은 모털 컴퍼니 한국지사장 주인호를 찾았다. 그의 인내심은 바닥이다. 세상 전부가 짜고 자신을 엿먹이는 느낌이다.
“당장 윤지호를 연결해! 안 그러면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보게 될 거야.”
주인호는 약속도 없이 쳐들어 와 막말을 해대는 박민혁을 보며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윤지호씨 위치코드가 없다는 보고를 들었는데요. 컴퓨터는 그렇게 화낸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사람인 당신한테 화내고 있잖아! 뭔가 다른 수가 있을 거 아니야?”
“아웃라인 면회 요청에 응답이 없다면서요. 그러면 우리로서도 별 방법이..”
“그래? 그럼 윤지호 계약해지야. 당장 해지해!”
박민혁은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주인호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건 아주 특수한 경우에만 가능한데,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내가 박사장이 왜 이러는지 모르지 않는데. 그랬다가 안 좋은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요?”
“소문? 뭐, 내가 죽은 아버지 스위스은행 계좌번호 알아내려고 모르는 여자를 포에버월드에 입주시키고 이용가치가 없으니까 코드 뺀다는 소문? 지금 당신이 직접 소문내겠다는 얘기 같은데, 그러면 나만 문제일 거 같아? 거기에 협조한 이 회사는 괜찮고?”
주인호는 박민혁을 은근히 협박하려는 게 실패하자 비굴하게 표정을 바꿨다.
“자자, 진정하시고. 계약해지는 스위스 본사 보고 사항이에요. 꼭 승인된다는 보장도 없고. 우리 같이 해결책을 생각해봅시다.”
“해결책? 벌써 몇 주가 지났는데 그 여자랑 통화 한번 한 게 전부잖아. 뭐 연결이 돼야 말이라도 해보지. 내가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말이야.”
“지현우 팀장은 뭐랍니까?”
“지현우? 미꾸라지 같은 놈. 지가 받아먹은 돈이 얼마인데.. 완전 나자빠져서는.”
“하긴 지팀장이 요즘 좀 이상하죠. 참 긴급호출은 해봤어요?”
“긴급호출? 그게 뭔데?”
“거주민의 집에 일종의 전화를 거는 겁니다. 받을 때까지 벨이 울리게 하는 거죠. 이게 거주민 사생활 침해 규정 때문에 쉽게 할 수 없지만, 내 권한으로 할 수 있는데, 그거라도 해볼래요?”
주인호가 아이디어를 내자 박민혁은 더 불같이 화냈다.
“그런 게 있으면 진즉에 말했어야지. 지현우 이XX가...”
지호가 집에 들어왔을 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지호는 조금 전 헤어진 박장우의 전화라고 생각하고 확인 없이 수화기를 들었다.
“네. 벌써 보고 싶어요?”
그런데 아니다.
=윤지호씨? 보호자가 통화요청 했으면 답을 해야지 여태 왜 연락 안 합니까?
박민혁의 성질 난 목소리다. 지호는 반사적으로 끊을 뻔했지만 참았다. 그가 뭐라고 말하는지 듣고 싶었다.
=윤지호씨 아니에요?
“맞아요.”
=끊지 말고 잘 들어요. 당신 하기에 따라 이게 마지막일 수 있으니까.
박민혁은 거의 협박조로 말했다.
“말해요.”
=내가 왜 당신 보호자인지 궁금하다고 했죠?
지호는 대답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대답 안 해도 말할 것이니까.
=먼저 확인할 게 있는데 윤지호씨, 지현우와 잘 아는 사이죠? 형제는 아닌 것 같고, 그럼 혹시 애인이나 여자친구?
“그걸 왜 물어요?”
=맞구나. 내 이럴 줄 알았어. 지현우가 나에 대해 뭐라고 했어요? 왜 내가 당신 비용을 대고 있는지는 말했어? 안 했지?
박민혁은 말을 높였다 놨다 하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돌려 말할 거 없어요. 나에게 직접 말해요. 뭘 원해요?”
=생각보다 말이 통하는 거 같아 다행이네. 맞아. 당신한테 원하는 게 있어. 그것만 해주면 더이상 건드리지 않을 테니 당신도 거기서 편하게 살아!
지호는 또 대답하지 않았다. 곧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지현우가 모른 척하라기에 모른척 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너무 긴장할 건 없고. 듣고 있는 거 맞죠? 아까는 내가 너무 흥분해서..
박민혁의 말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듣고 있어요. 뭘 원하는지 나도 궁금하니까 어서 말해요.”
=솔직히 내가 지현우 입장이라도 쉽게 말하진 못했을 건데 또 그렇다고 그게 그렇게 대단히 힘든 일도 아니고. 무엇보다 윤지호씨는 죽었잖아요. 살아서는 하지 못 할 일도 거기서는 잃을 게 없으니까 충분히 할 수 있고, 아니 그건 아니고, 미안합니다.
뭘까? 뭘 요구하려고 이리 말을 돌리나? 처음에는 궁금했지만, 잊고 살다 보니 궁금증도 사라졌다. 무엇보다 그게 뭐든 이제 다 끝난 일 아닌가? 이미 죽었는데. 하지만 다시 궁금해진다.
=참나, 이걸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정작 말하려니까 쪽팔리네. 그래서 지현우가 하기로 한 건데. 지현우는 뭐, 그 자식도 말 못 하긴 마찬가지였겠지. 참, 분명하게 말할 건, 이건 다 지현우의 아이디어였어요. 내 생각이 아니고. 잠깐, 그럼 지현우는 지 여자친구를 포에버월드에 넣기 위해 날 이용한 건가? 난 이용당한 거고? 야 생각해보니 이거 어이없네. 내가 사기를 다 당하고.
“원하는 건 언제 얘기할 거에요?”
박민혁은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그만큼 말하기 힘든 내용이란 뜻이다. 하지만 그건 그쪽에서나 그렇다. 이미 끝난 인생을 덤으로 더 살고 있는 지호에게는 어떤 요구를 해도 상관없었다.
=거기 살고 있는 어떤 인간한테 접근해서 내가 원하는 걸 알아봐 주면 됩니다.
“원하는 게 뭔데요?”
=스위스 은행 계좌번호와 비밀번호. 우리 노인네가,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라는 인간이 죽으면서 그걸 안 가르쳐주고 죽었는데 난 알아야 하거든. 원래 내 것이기도 하고.
“왜요? 자식인데 왜 안 가르쳐주고 죽었는데요?”
=그거야 뭐, 아마 그거라도 쥐고 있어야 나를 맘대로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죽어서도 살아있는 아들을 맘대로 하겠다는 발상이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그래서 그쪽은 그걸 알아내면, 그 다음은요?”
결국 다 돈이다. 돈 아니면 자식은 죽은 아버지를 나 몰라라 할 것이고, 그걸 막기 위해 아버지는 죽어서도 비밀번호를 안 가르쳐준단다. 어이없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죽어서도 살아서도 돈이 문제고, 삶과 죽음을 연결하는 것도 돈이다.
=그 다음은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여튼 내 말은 이해한 거죠?
“그런데 그쪽한테도 말하지 않는 스위스은행 계좌번호를 왜 나한테 말해요?”
=그 부분이 어려운 건데, 진짜 말하기 뭣같네.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그쪽은 젊고 포에버월드에는 젊은 여자가 거의 없으니까 심심한 노인네한테 접근해서 좀 잘해주면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원래 이 아이디어가 지현우 아이디어라니까요, 그냥 스파이 작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윤지호씨가 알아서 잘 해주면.. 좋겠는데. 할 수 있죠?
“안 해주면요? 내가 그런 일을 왜 할 거라고 생각해요?”
지호가 묻자 박민혁이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가 단박에 거절할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던 것일까?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처음부터 그런 조건으로 당신의 모든 비용을 내가 댄 겁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거기서 살고 입고 먹고 자고 하는 게 다 내 돈이라는 말이지. 그러니까 이걸 안 해 주면...
“포에버월드에서 쫓아내겠다는 거죠?”
박민혁은 또 말하지 못했다. 윤지호가 생각보다 강경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포에버월드에서 오래오래 있고 싶어 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꼭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거 참, 생긴 것과 달리 말 험하게 하시네.
“잘 됐네요. 그럼 이곳 생활도 곧 끝인가요?”
이젠 거꾸로 지호가 박민혁을 협박하는 것 같았다.
=이봐요. 윤지호씨. 내 말을 잘 이해 못 하는 거 같은데, 내가 계약해지하면 당신은 사라지는 거에요. 영원히.
“사라져요? 난 이미 사라진 사람이에요. 사라지는 건 산 사람이나 무섭지 이미 죽은 사람이 뭐가 무섭겠어요? 더 할 말 없죠? 그럼 할 말 다 했고, 들을 말 다 들은 거 같으니 끊죠.”
지호가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으려는데 박민혁은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잠깐만요. 그 인간, 그러니까 내 아버지 이름은 박장우에요. 한번 만나나 보고 거절하라고. 케케묵은 노인일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러나 본데 그렇지 않아요. 그 인간도 당신처럼 젊어! 적어도 겉보기에는 말이야. 이봐! 윤지호씨!
끊었다.
죽은 아버지에게 접근해 스위스은행 계좌번호를 알아내라니.. 사람이 죽어도 죽지 않으니 이런 괴이한 일까지 벌어진다.
‘그래, 생각해보면 딱히 충격적일 것도 없어’
살아있을 때 돈 때문에 노인에게 접근하라는 요구를 들었다면 황당했을 것이다. 아무리 무너졌어도 그 정도 바닥은 아니었으니, 돈 때문에 남자를 꼬시는 일은 절대 못한다. 그런데 지금은? 육신은 없고 의식만 남았다. 의식만 남았어도 그녀의 자존심은 똑같이 유효한가?
아니다.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은 그런 일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 뭐가 두려워서? 아버지라는 그 인간도 참 한심하다. 죽어서도 스위스 은행 계좌를 꽉 쥐고 있다니, 생각도 못했다. 하긴, 이곳이 저승이라면 저승에서도 돈이 필요하니, 저승길 노잣돈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돈이 되었다. F머니.
지현우를 생각했다. 그녀를 포에버월드에 보낼 돈이 없어 그런 속임수를 쓴 모양인데, 뭐랄까? 배신감이 들기보다는 어이없고 부질없다.
어찌됐든 이제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었다.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호는 콜센터에 전화해 기술지원을 요청했다. 지현우의 콜백을 기다리는 동안 창문을 열고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 숨을 들이쉬어도 가슴이 시원해지지 않는다. 숨 쉬는 것도 거짓, 살아있다 생각하는 것도 거짓이다.
‘무엇이 진실일까? 내가 살았던 현실 세계는 진실일까?’
믿기지 않는다. 살아있던 그녀의 인생이 더 꿈같고 더 거짓같다. 현실 세계와 포에버월드의 차이는 거짓을 인식하는 정도 아닐까? 살아있을 때는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지금이 진실에 가까운 것 같다.
‘나는 한 순간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 아닐까?’
숨을 쉬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지호는 의식적으로 숨 쉬는 것을 참아왔다. 그렇게 해서 자신은 진짜 살아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그녀는 현우에게 전화 올 때까지 숨을 참기로 했다. 눈을 감고 시간의 흐름을 잊고 ‘자신’에 집중했다. 그녀가 ‘자신’이라 믿고 있는 자아는 무엇인가? 그토록 간절하고 그토록 애틋한 ‘나’는 무엇일까?
=지호야, 무슨 일이야?
걱정이 잔뜩 묻어나는 지현우의 목소리, 이것도 지겹다. 언제까지 그의 걱정 속에 살아야 하는 걸까?
“박민혁씨 전화왔어.”
=그걸 받았어?
“응.”
=내가 받지 말라고 했잖아. 그런데 뭐래?
“박장우라는 사람에게 가서 스위스은행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를 알아내라고 하던데. 너도 알고 있는 얘기지?”
지호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한 것에 반해, 현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도 숨을 안 쉬는 것일까?
=그거 안 해도 돼. 넌 신경 쓰지마. 그래서 전화 받지 말라고 한 거야.
아직도 그는 그녀의 보호자 행세다.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면서.
“그래, 안 해.”
=잘 생각했어. 다른 건 없는 거지?
“현우야.”
=왜?
“이제 그만해.”
=뭘? 뭘 그만해?
“나 걱정하는 거.”
=무슨 얘기야? 걱정하지 말라니.
“내 걱정 그만하고 니 인생 살아. 난 죽었어. 넌 살아있고.”
지현우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또 이 소리다. 걱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려고?
=너 혼자 거기서 뭘 할 수 있다고 자꾸 그래.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현우야. 우린 끝났어. 그리고 난 곧 사라질 거야.”
지호는 계약해지하겠다는 박민혁의 말을 떠올리며 말했다. 스스로 사라진다 말하는 데도 전혀 슬프지 않다.
=박민혁이 그래? 널 협박하든? 미친 자식. 걱정하지마. 내가 어떻게 해서든 막을 거야.
“그만!”
지호는 전화기에 대고 소리 질렀다.
“내 말 들어! 널 위해 이곳에 와달라고 했지? 난 왔고. 그걸로 끝났어. 내 결정을 무시하는 건 이제 그만해. 내가 알아서 해. 이제 너한테도 연락 안 할 거야!”
=지호야, 니가 화나서 그러는 거 아는데. 박장우에게 접근하라고 한 건 그냥 핑계일 뿐이야. 원래 계획은 그런 게 아니야.
“듣고 싶지 않아. 그리고 니가 생각하는 만큼 기분 나쁘지도 않아. 그냥 꼴이 우스워. 그러니까 날 더 우습게 만들지 말고 그만해. 난 죽었는데, 죽어서도 이게 뭐니?”
=미안해. 정말 미안한데..
“됐고. 박장우라는 사람에 대해 말해줘.”
=왜? 그 사람은 뭐하게?
“이유는 묻지 말고. 어디 가야 그 사람 만날 수 있어?”
지현우는 멈칫했다. 포에버월드의 윤지호는 그가 알던 윤지호가 아니다. 진즉에 인정했어야 했다. 숨이 끊어지고 의식전송이 이뤄진 순간, 그녀는 더이상 그녀가 아니게 되었다.
처음에는 의식전송 과정에서 생긴 에러 때문에 그녀의 성격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건 변한 것도 아니고 그냥 다른 것이다. 그가 사랑했던 윤지호는 어디로인가 사라졌다.
변한 건 지호뿐 아니다. 지현우도 변했다. 그의 사랑은 걱정과 집착으로 변했다. 그런 걸 사랑이라 부르진 않는다. 그가 변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사망선고 후 의식전송 했을 때? 지호가 시한부 판정 받았을 때? 아니면 처음 아프기 시작했을 때? 사랑은 연민과 다르다.
=박장우씨, 너도 만난 적 있어.
“뭐? 내가?”
=니가 박시후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박장우야.
“하지만 그 사람은 나이가 젊은데?”
=그런 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어. 포에버월드니까.
지호도 그것만은 의외였는지 말이 멈췄다.
“지호야 잠시만 진정해. 니가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니, 됐어. 내가 알아서 해.
지호는 다시 현우의 말을 끊었다.
=지현우!
“왜?”
=행복해.
끊겼다. 이제 정말 끝이 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