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았나요?

by 시sy

윤지호와 통화한 뒤 지현우는 박민혁에게 바로 전화했다.


“어딥니까?”

=차 안. 너는 어디인데?


“클리닉 주차장입니다. 당장 돌아오시죠. 아니면 내가 갈까요?”

=기다려.


둘은 주차장에서 만났다. 지현우는 박민혁을 보자마자 멱살부터 잡았다.


“너 이 자식, 지호한테 뭐라고 했어?”


박민혁은 흥분한 지현우의 손을 가볍게 쳐내며 말했다.


“미친놈이 누구한테 화를 내? 계획대로 니가 다 말했으면 이런 일 없는 거잖아? 솔직히 말해봐. 넌 니 여친을 진짜 미인계에 이용하겠다는 거였니? 아니면 그건 핑계고 내 돈을 뜯어먹으려는 개수작이었니?”

“개수작은, 죽은 니 아버지 돈까지 못 먹어서 XX하는 니가 개수작이지. 지호한테 뭐라고 했어? 늙은 니 애비한테 가서 뭐하라고 했어? 어서 말해봐!”


현우는 다시 박민혁의 멱살을 잡으려했지만 민혁이 슬쩍 비켜서며 현우의 뒤통수를 때렸다. 지현우는 맥없이 넘어졌다.


“이게 봐주니까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네. 너 똑바로 들어! 니 애인인지 뭔지 하는 그 여자가 일 제대로 안 하기만 해봐. 코드 뽑는 걸로 끝나지 않을 거야. 너도 가만히 두지 않아! 이럴 시간에 윤지호에게 연락해서 같이 좋은 작전이나 짜봐!”

“웃기지마!”


현우는 포기하지 않고 일어서며 다시 박민혁에게 덤비려다 발길질까지 당했다.


“컴퓨터나 만지던 주제에 세상 물정 모르고. 그래, 이거 괜찮네. 내가 그 여자에게 다시 연락해서 일 제대로 안 하면 널 없애 버리겠다고 말하면 어떨까? 그럼 그 여자도 더 고집 피지 않을 거 같은데.”

“뭐라고? 그걸 말이라고!”


지현우가 온 힘을 다해 또 대들려고 했지만 박민혁은 그를 떠밀며 비웃었다.


“그만 까불어. 너 내가 다른 사람 쓰면 어쩔래? 돈 좀 주면 너 하나 없애버리는 거 일도 아니야. 그러니까 생각 잘해. 널 위해서나, 포에버월드에 있는 그 여자를 위해서나.”


지호는 오랜만에 잠을 청했다. 지현우와 통화한 뒤 모든 걸 잊고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다. 포에버월드에서 잠자면 비활성 메모리가 삭제된다. 다 잊고 싶을 때 이것만 한 게 어디 있을까? 원하는 만큼 잘 수 있고 불면증도 없는 세상이다.


물론 자고나서도 현우와 통화한 내용, 그 전에 박민혁과 말한 것까지 모두 기억났다. 다만 그 기억과 결부된 불필요한 감정 찌꺼기들이 사라지고 사실관계의 골자만 남았다. 대신 의식은 리부트한 것처럼 명료하다.

그녀의 창가에는 어제 물컵에 꽂아둔 꽃들이 활짝 펴있었다. 제이든이 준 꽃다발이었다.


‘응?’


향기가 난다. 어제 받았을 때는 나지 않던 꽃향기가 향수 같은 짙은 향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아마 내일쯤이면 향기가 날 거에요’


제이든이 말한 그대로였다. 없던 향기가 하루아침에 생겼다는 것은? 그는 마법사라도 되는 것일까? 아니다. 포에버월드에 마법은 없다. 신도 없다. 그는 정말 설계자인 것일까?


윤지호는 박민혁의 협박에 대해 어떻게 할지 생각해 둔 것은 있지만 조언이 필요했다. 다른 때였다면 박시후와 의논했겠지만 지금은 그 박시후가 문제였다. 박시후가 박민혁의 아버지 박장우라는 사실은 들었어도 잘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실제 나이가 70은 된다는 것인데 외형이 바뀌었다고 해서 그걸 못 알아봤다는 게.. 좀..


‘그럼 난 70 먹은 남자와 춤 추고, 여행을 다니고..’


속이 70 겉은 35, 겉이 70 속은 35, 어느 게 나을까? 백이면 백 겉이 젊은 게 낫다고 하겠지?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하긴, 박장우의 나이가 35면 어떻고 70이면 어떤가? 그런 숫자놀음이 이곳에서 어떤 의미가 있나?


‘사람은 겉만 보고 알 수 없다’던 박장우의 말이 떠올랐다. 그가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했더라면, 그와 이런 우정을 쌓을 수 있었을까? 그 우정이 없었다면 포에버월드에서 이 정도라도 살 수 있었을까? 그녀의 소설은?


지호는 제이든이 알려준 그의 집을 향해 걸었다. 가는 길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멀었다. 꼭 워킹머신 위를 걷는 것 같이 제법 걸었는데도 쉽게 가까워지지 않았다. 게다가 제이든은 집에 없었다. 제이든이 그녀 집에서 했던 것처럼 초인종을 눌렀지만 그는 나오지 않았다.


지호는 집 앞에 앉아 그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제이든이 나타난 것은 저녁노을이 질 무렵이었다. 그는 지호가 기다리며 앉아있는 것을 보고 다정하게 말했다.


“석양이 아름답죠?”

“매일이 완벽해요.”


“그것도 칭찬이죠?”

“네.”


“고마워요. 그것도 신경 많이 썼는데... 오래 기다렸어요?”

“그걸 잘 모르겠어요. 잠깐인 것 같기도 하고, 오래인 것 같기도 하고. 시계를 보지 않으면 얼마나 시간이 가는지 모르겠어요.”


지호는 솔직하게 답했다. 제이든, 이 남자 앞에서는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그렇군요. 당신도 나 같은 부류에요. 안으로 들어갈까요? 저녁 만들어줄게요.”


제이든은 이것저것 야채를 썰고 소스를 만들더니 제법 큰 냄비에 집어넣고 부글부글 끓였다. 지호는 그가 요리하는 것을 신기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포에버월드에서 처음 보는 장면이다.


“양이 너무 많지 않아요? 제이든.”

“걱정 말아요. 이곳은 음식물 쓰레기 걱정이 없으니까. 남으면 저절로 없어져요.”


“요리하는 거 처음 봐요.”

“그래요? 하긴 여기선 쓸데없는 일이죠. 어차피 내가 요리하는 것과 음식은 아무 인과관계가 없으니까. 이건 그냥 불필요한 동작일 뿐이에요.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음식은 콜센터에 전화해서 배달되는 음식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요.”


“그런데 왜?”

“왜 요리를 하냐구요? 요리는 그 자체로 의미있으니까. 꼭 음식 때문이 아니라 지금 지호씨에게 필요한 건 요리하는 과정이니까. 다 됐어요. 여기 앉아요.”


제이든이 만든 요리는 야채스튜였다. 지호는 숟가락으로 맛을 봤다. 굴라시와 비슷할 줄 알았는데 맛은 전혀 다른 맛이 난다. 스튜라기보다 미역국 같은 맛이 났다.

지호의 표정을 보자 제이든이 웃었다.


“알아요. 생긴 것과 다른 맛이 나죠? 나만의 레시피인데. 맘에 들어요?”

“요리와 음식이 인과관계가 없는 것처럼 음식과 맛도 인과관계가 없는 거군요.”


“와우, 정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상을 주고 싶은데, 지호씨가 궁금한 것에 대해 답을 해줄게요.”

“네?”


지호는 숟가락을 놓고 제이든을 쳐다봤다. 제이든도 그녀를 마주봤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온 게 아니었어요?”

“아, 그건 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좋아요. 의논. 주제는 뭔가요?”


거의 먹지도 않았는데 제이든은 식탁에서 음식을 치우고 차를 가져왔다. 향긋한 향이 나는데 무슨 차인지는 알 수 없었다.


“꽃향기는 어떤가요?”


역시 그는 그가 준 꽃에서 향이 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주 좋아요.”

“굿. 뭘 도와드릴까요? 윤지호씨.”


‘내가 이름을 말했던가?’ 지호는 제이든의 정체를 상상하며 물었다.


“여길 떠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싶어요.”


제이든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러 방법이 있는데, 그 전에 이유를 알아도 될까요?”

“꼭 알아야 도와줄 건가요?”

“난해하네요. 그렇다고 하면 더 묻지 않고 가버릴 것 같고, 이유를 듣지 못하면 내가 너무 손해고.”


지호는 혼란스러웠다. 그의 말을 점점 이해하기 힘들었다. 제이든이 다시 말했다.


“이렇게 하죠. 질문에 먼저 답해주면 지호씨가 이유를 말해주기로.”

“좋아요.”

“여기를 떠나는 게 단순한 여행이라면 여행자 센터를 찾아가면 되는데 그건 아닌 것 같고, 그럼 두 가지가 남네요. 하나는 쉽고, 다른 하나는 어렵고. 어느 것부터 들을래요?”


그의 화법에 적응하는데 오래 걸렸지만 그는 그저 배려심 깊은 사람일 뿐이라 생각했다.


“쉬운 거요.”

“쉬운 방법은 영면입니다. 영면을 원하면 콜센터에 전화해서 영면 신청하면 됩니다. 누구의 동의도 필요 없어요. 영면은 거주민의 고유 권리니까. 원하는 시간을 말해주고, ‘Yes’라는 말을 세 번만 확인해주면 실행됩니다. 한치의 착오도 없이 영면이 이뤄집니다. 이건 시스템 관리자도 못 막아요.”


영면, 영원한 잠. 정말 죽음은 잠과 같은 것일까? 답해줄 사람은 모두 죽었는데...


“그럼 어려운 건요?”

“이것까지 말해주면 내가 손해라는 거니까 이제 이유를 들어볼까요? 이유의 무게가 내 손해의 무게에 합당하면 말해주죠.”


그가 차를 마셨나? 제이든이 차 마시는 걸 본 기억이 없는데 찻잔은 반 이상 비어있었다. 차를 마셔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면 차를 마시는 시간에 비례해서 차가 없어진다? 그녀의 찻잔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얼마를 마셨던 간에 남은 차의 양은 제이든과 같다.


“이유에 집착하시는 것 같은데요. 그 이유도 있나요..?”

“여기서는 이유와 의미, 이 두 가지가 제일 중요하니까.”


그저 중요하다는 게 아니었다. 제이든은 ‘제일’ 중요하다고 했다. 원하는 답을 얻고 싶으면 이유를 말해야 한다.


“전 가난해서 포에버월드에 올 수 없었어요. 그런데 남자친구가 어떤 부자의 은밀한 일을 맡아 주는 대가로 이곳에 보냈어요.”

“남자친구는 바깥 세상의?”


“네, 바깥 세상.”

“그럼 바깥 일은 바깥 사람끼리 알아서 하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꼭 그렇지 않은 게, 이곳에 있는 어떤 사람의 비밀을 알아달라고 했어요.”

“누구? 무슨 비밀?”


제이든은 조금의 빠짐도 없이 세심하게 물었다. 그 하나하나를 정확히 답해주지 않으면 ‘이유’가 되지 않는 것이다.


“박장우라고, 원래는 노인인데 젊게 모습을 바꿨어요. 그 사람만 알고 있는 스위스은행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를 알아내는 게 목적이구요.”


하나도 빼지 않고 전부 말했다. 그럼에도 제이든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거주민이 젊어졌다는데도 심드렁하고 돈 때문에 그런 일을 벌였다는 것도 관심 밖이다. 그가 관심 있는 건 오직 윤지호였다.


“그럼 여기를 떠나려는 이유는, 그 요구를 들어줄 수 없어서 그런 건가요?”

“꼭 그건 아니고, 그냥 다 싫어졌어요. 이렇게 애매하게 살아있는 것도. 아니, 이게 살아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요. 저.. 이렇게 얘기하다보니까 생각났는데, 두 번째 어려운 방법이 뭔지 모르겠지만, 전 그냥 영면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냥 영면 신청하겠습니다. 제 말 들어줘서 감사했습니다.”


지호는 측은하게 쳐다보는 제이든에게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나가야 하는데 왠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억지로 제이든의 집 문 손잡이를 잡으려는데.


“윤지호씨는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았나요? 내 말은 뭔가 더 해야 할 것. 혹은 하고 싶은 게 없나요?”


지호는 왜 떠나지 못했는지 이유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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