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나아가지 않으면 새것을 쓸 수 없다

by 시sy

박지나야말로 지현우를 감시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일이 생길 때마다 딱 맞춰서 지현우 앞에 나타나기는 어려웠다. 이번에는 지현우의 집 앞이었다.


“다 알고 온 것 같은데, 이제 그만 하죠. 다 끝났으니까.”


윤지호와 이별한 지현우는 박지나를 무시하려 애쓰며 말했다.


“내가 다 알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서 또 찾아왔어요. 다쳤어요?”


박지나는 민혁에게 얻어맞은 현우가 괜찮은지 물었다. 그러나 괜찮은지 보려는 박지나의 관심도 무시했다.


“상관하지 말아요. 그리고 제발 당신들 유산 싸움에 날 끼워 넣지도 말아요.”

“왜 그래요? 무슨 일이 더 있어요?”


정말 몰라서 묻나? 현우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신 오빠가 아웃라인으로 지호에게 다 말했어요. 박장우씨의 스위스은행 계좌를 알아내라고. 그러지 않으면 포에버월드에서 쫓아내겠다고. 계약해지 운운하면서!”


차마 말을 끝내지 못했다. 현우의 입으로 지호가 영원히 소멸될지 모른다고 말할 수 없었다. 자기 입에 담으면 실현될 것 같아서. 박지나에게 다 끝났다 말했으면서 미련은 여전한 것이다.


“오빠가 협박했군요. 놀랍지도 않아요. 그게 그 인간 특기니까. 나한테도 그랬어요. 적당히 먹고 떨어져라. 그러지 않으면 전부 뺏겠다고. 그런데 다 허풍이에요. 그럴 배짱은 없는 위인이에요.”

“관심 없습니다. 집에 가요. 난 쉬고 싶으니까.”

“현우씨가 직접 윤지호씨와 얘기해봤어요?”


지현우는 박지나를 보기만 할 뿐 말하지 않았다. 지호와 통화했지만 결과는 최악이었다.


“뭐 표정 보니 다 알겠네요. 이제 나도 마지막 방법을 써야겠네요.”

“마지막 방법이요?”


“아웃라인 면회가 보호자만 신청할 수 있는 것 아니죠?”

“그렇긴 한데 보호자 동의가 있어야..”

“그놈의 동의, 동의, 동의, 그런 건 현우씨가 대충 처리해줄 수 있잖아요. 편법에 능하신 것 같은데.”


박민혁과 똑같이 뻔뻔하다. 남매가 확실하다. 입맛대로 사람 이용하는데 주저가 없고 돌려 말하지도 않는다. 부탁이 성사되지 않으면 강하게 요구 하고 그것도 안 되면 더 세게 협박한다.


“싫습니다. 이제 나도 끝낼 겁니다. 돈이든, 사랑이든. 지치고 질렸어요.”

“이제 와서 왜 이래요? 우리 한편이잖아요? 오빠한테 한 대 먹여야죠?”


‘한편이라고? 한 대 먹인다고?’

쓸데없어 보이지만 못할 것도 없다. 박민혁의 얼굴만 떠올리면 화나는 것도 사실이니까. 그 인간이 그렇게 원하는 스위스은행 계좌를 갖지 못하면 어떤 얼굴이 될까?


지현우는 생각했다. ‘남은 건 없지만 남의 것을 뺏을 수는 있다’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다. ‘같이 망하자!’


“박장우씨와 아웃라인 연결해주면 지나씨는 뭐라고 말할 겁니까?”

“당연한 것 아니에요? 오빠가 스위스은행 계좌를 노리고 아빠에게 여자를 붙이려 하고 있다고. 윤지호라는 여자를 조심하라고.”



박장우는 윤지호의 집에 도착했다. 초인종을 누르기 직전,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이다. 한번 누르면 아무 응답이 없다. 그녀는 항상 그랬다. 한번에는 응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두 번, 세 번째에는 반드시 답한다. ‘들어오세요. 문은 열려있어요’


두 번의 벨을 누르고 세 번째 벨을 누르는 순간 그의 흥분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제 곧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언제나 새로 시작하는 그녀의 목소리. 군더더기 없이 깨끗한 그녀의 감성. 그런데 세 번을 눌렀는데도 오늘은 답이 없다. 그녀의 목소리가 없다.


할 수 없이 네 번째 벨을 눌렀다. 웬만하면 더 누르고 싶지 않았다. 한 번 더 누르는 건 이미 실패를 의미하니까. 작은 어긋남이 운명을 뒤튼다.


손잡이를 돌렸다. 잠겼다.

윤지호의 집은 잠겨있는 법이 없었다. 그녀가 산책을 나가든, 커피를 사러 가든, 문은 항상 열려있었다. 문이 열려 있어도 들어가지 않고 근처에서 서성대다보면 그녀는 돌아왔다. 그렇게 만났을 때는 더 큰 웃음을 선물로 받았다. 그러나 문이 잠기다니..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박장우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우선은 기다렸다. 그가 파악하지 못한 새로운 패턴이 생겼을 수도 있으니까. 아니면 실수로 잠갔을 수도 있다.


기다리는 시간은 길었다. 5분 간격으로 시간을 체크하며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커피하우스로 달려갔다. 없다. 문득 생각났다. 얼마 전 처음 봤던 그 남자.

지호는 그 남자와 함께 있을 수 있다. 자유로운 그녀의 성격에 그러지 않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럼 어디로 갔을까?’


박장우는 차라리 윤지호가 그 남자와 있기를 바랐다. 그러면 돌아올 것이니까. 그런데 몇 번을 돌려봐도 잠겨있는 손잡이는 이제 그를 거절하는 것 같다. ‘혹시 나 모르게 영면에 들었으면 어쩌지?’ 상상만으로 기절할 것 같았다.


어쩌면 그가 예민하게 구는 것일 수 있었다. 그녀가 산책을 길게 하거나, 혹은 여행을 떠났을 수도 있다. 여행을 떠나며 박장우에게 일일이 보고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녀는 자유니까.


그래도 박장우는 그녀를 찾아 거리를 헤맸다.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일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호를 다시 만날 수 있다하더라도 오늘은 그녀를 찾아야한다. 다른 할 일은 생각하지 못했다. 먹지 않아도 되고 자지 않아도 된다. 출근할 직장도 없다.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왜 이놈의 동네는 휴대폰이 없는 걸까? 콜센터는 왜 거주민의 위치를 알려주지 않는가?


“여기 포에버월드에는 왜 휴대폰이 없다고 생각해요?”


제이든이 물었다.


“필요 없으니까?”


지호가 답했다.


“거주민끼리 서로 연락하려면 필요는 하겠죠. 게다가 바깥 세상에 사는 사람과 휴대폰으로 연결하는 것도 기술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아요. 못하게 해 놓은 것뿐이지.”


제이든은 찻잔을 다시 채우고 이번에는 쿠키를 가져왔다.


“뭔가 포에버월드의 목적에 어긋나기 때문일까요?”

“맞아요. 그럼 포에버월드의 목적이 뭐라고 생각해요?”


“그거야, 각자 이용하기에 따라 다른 것 아니에요?”

“물론이에요. 원래 목적이 뭐든 간에 거주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용하면 되는 거죠. 바깥 세상의 대부분 물건들이 그렇듯이. 하지만 포에버월드를 만든 사람은 목적을 가지고 만들었어요.”


지호는 쿠피를 집었다. 입에 넣고 씹기도 전에 맛이 느껴진다.


“어떤 맛이에요?”


제이든이 물었다.


“초코와 땅콩, 그리고 버터향이 좋아요.”


쿠키를 씹었다. 전혀 다른 맛이 난다.


“왜 이렇죠?”

“그 쿠키는 손으로 잡았을 때 거주민이 기억하는 쿠키 맛을 재현하게 디자인됐어요. 그리고 씹고 나면 디자이너가 의도한 맛이 나는 거에요.”


“신기해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제이든은 누구시죠?”

“오래된 거주민.”


“얼마나 오래됐는데요?”

“가장 오래됐죠. 내가 처음 왔을 때, 그때 난 이곳에서 혼자였으니까.”


“와, 외로웠겠다.”

“우주에 혼자 있는 느낌이었죠. 하하.”


“그게 다가 아니죠? 혹시 이곳을 만든 분인가요?”


제이든은 빙그레 웃었다.


“맞아요. 난 포에버월드의 설계자 중 한 명이죠. 이제 믿음이 가나요?”

“아뇨. 처음부터 믿고 있었어요. 장미에 향이 날 때부터. 그럼 이제 말해주세요. 포에버월드의 진짜 목적이 뭐에요?”


제이든은 입을 다물었다. 말하지 않는다. 지호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먼저 하지 못한 것을 마저 해요. 그것 때문에 영면을 망설이고 있잖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아직 모르는 게 더 많아요.”


포에버월드의 설계자, 드디어 그에게 적합한 질문이 떠오른다. 지호는 물었다.


“소설을 완성할 수 없어요. 살아있을 때 썼던 부분은 보지 않고도 쉽게 옮겨 썼는데 새로운 부분은 너무 더뎌요. 썼던 것은 눈에 훤한데 써야 할 부분은 까마득해요. 이유를 아세요?”

“정확히 알죠. 의식전송 할 때 뇌구조가 이미지 파일로 변환돼 컴퓨터에 저장돼요. 그리고 코어 뉴런이 데이터필드에 저장된 자신의 뇌구조를 스캔해서 기억을 해독합니다. 다시 말해 지호씨의 과거 기억은 조금도 지워지지 않고 컴퓨터 안에 보존돼 있다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미 썼던 소설을 다시 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을 거에요. 하지만 새로 쓰는 건 다르죠. 과거의 선명한 기억이 오히려 새로운 것이 입력되는 것을 방해해요.”


“과거에 집착하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거에요?”

“맞아요. 소설을 쓰려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미래의 기억을 축적해야 하는데 지호씨는 살아있는 것 같아도 여전히 과거 기억 속에 머물고 있으니까.”


“그럼 소설을 완성하는 건 불가능한 것 아닐까요?”

“그렇지 않아요. 힘들겠지만 가능해요.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본다면.”

“열심히 해야겠네요. 파이팅.”


지호가 작은 주먹을 불끈 쥐며 웃었다. 제이든도 웃었다.


“소설이 끝나면 이곳을 떠나는 두 번째 방법을 알려주죠.”

“어려운 방법 말이죠?”

“네, 내가 많이 손해인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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