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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고에 빠진 휴먼 치과의사

유쾌한 도시 괴담, 블랙 코미디

by 시sy

사소한 킬러 5화


김동훈 씨의 치과에 들어간 조안나는 가장 먼저 그녀를 기다리던 간호사의 심상치 않은 포스에 놀랐습니다.

척 봐도 할머니, 70은 가볍게 넘겼을 것 같은 흰머리, 직사각형 모양의 금테 돋보기안경, 여대 기숙사 사감 선생님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았지만 그녀는 의외의 구수한 목소리로 조안나를 맞았습니다.


“누구? 아.. 오늘 온다던 공짜 환자? 스케일링 할 거지? ”

당황.


조안나는 치과에 자기 말고 한 명도 환자가 없다는 사실에 또 놀랐습니다.


“그런데 저 혼자인가요?”


치과를 우울하게 잠식하고 있는 어둠의 포스, 이곳은 곧 망한다!


“많이 조용하지? 우리 치과선생하고 아는 사이 같은데 병원 걱정되면 치료비 좀 주고 가든가. 스케일링 보험 처리되는 건 알지? 요즘 세상 참 좋아졌어.”


그렇습니다. 조안나는 김동훈 씨의 치과를 정탐할 겸, 공짜 스케일링도 받을 겸 해서 동치과를 방문했습니다. 결과는 처참했죠. 잠시나마 돈 많은 치과의사 남친을 만들어 볼까 했던 소박한 꿈이 무너진 것입니다.


김동훈 씨는 그 시간 인터넷으로 부업할 것 없나 뒤지고 있었습니다. 놀면 뭐해요? 다른 치과 병원 주말 알바라도 해야 병원 월세를 낼 수 있으니까요.


“치과 오빠!”

치과의사라는 이유 하나로 진상회원에서 이웃사촌, 또 오빠가 된 순간입니다. 조안나의 빠른 태세 전환~


“어, 조안나 왔어? 이리 앉아.”

나이차가 제법 나니 이름 부르긴 좀 그렇고,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절대 안 나오고, 그래서 ‘치과 오빠’, 덤으로 치과치료는 공짜가 된 것입니다.


“저기 간호사 말이야. 혹시 어머니?”


조안나는 궁금한 걸 절대 못 참죠. 김동훈 씨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 건물주.”

또 당황.


“건물주가 왜?”

“월세를 싸게 해 주는 조건이었어. 간호사 자격증도 있으시고.”


김동훈 씨의 표정이 점점 우울해집니다. 조안나는 치과의사가 무조건 떼돈을 벌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생각이 얼마나 짧았는지 깨달았죠. 생활고에 시달리는 치과의사라니.. 동병상련+측은지심이 발동했습니다.


김동훈 씨의 머리를 양손으로 꽉 붙잡고.


“안돼! 슬픈 생각하지 마! 즐거운 생각 해! 우리 점심 먹으러 나갈까? 오다 보니까 돈가스집 있던데.”

“스케일링은?”

“다음에 하지 뭐. 나 건치라서 치석도 거의 없어. 자 봐!”


조안나는 갑자기 입을 벌리고 희고 깨끗한 이를 보여줬습니다. 이번에는 김동훈 씨가 당황.

대충 볼 때는 몰랐는데 갑자기 들이댄 조안나의 클로즈샷을 뜯어보니 무척 미인이었던 것입니다. 성격만큼 시원시원한 서구형 미인, 심지어 얼굴도 작아.

게다가 가까이서 얼굴 마주하기가 민망해 시선을 떨구니 헐거운 조안나의 티셔츠 사이로 맨가슴이 슬쩍 보였습니다.

'캘러한은 뭘 보고 조안나의 가슴이 작다고 한 거지? 윽, 내가 무슨 생각을.'

혼자서 얼굴이 빨개지시고.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아니, 괜찮아. 밥 먹으러 가자. 어차피 환자도 없는데.”


김동훈 씨는 그럴 줄 알았다는 건물주 간호사 할머니의 음험한 시선을 외면하며 병원을 빠져나왔습니다.

조안나의 말이 맞았습니다. 즐거운 생각이 즐거운 인생을 만드는 거죠.

조안나와 돈가스를 먹으며 시끌벅적, 최근 들어 이렇게 즐거운 점심식사는 처음이었습니다. 적어도 조안나가 최근에 받은 의뢰에 대해 말해주기 전까지는.


“그래서 일주일간 중딩 보호자가 되기로 한 거야?”

조안나에게 PT를 받는 회원 중 한 명이 해외 출장기간 동안 딸을 맡아 달라고 의뢰한 것입니다.


“보호자까지는 아니고, 학원 라이드(ride) 좀 해주고, 밤늦게 돌아올 때 독서실에서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면 돼.”

조안나는 해결사로서 너무 사소한 의뢰라 좀 쑥스러운 듯 말했습니다.


“너, 차 없잖아. 내 차 빌려줄까.”

김동훈 씨는 생각 없이 말해 놓고 조금 후회합니다. 기름값도 아까워서 몇 달째 오피스텔 주차장에 고이 모셔둔 재산목록 1호였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조안나가 필요 없다고.


“회원님이 차도 빌려 준대. 그런데 그 차가 무려 포르셰야. 포르셰 911 카레라 4S. 대박이지?”

“부자구나. 그 회원. 그런데 왜 이혼했대?”


짜증 납니다. 이혼했다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같은 인간인데 불행도 나눠 가져야죠.


“이혼 아니고 사별이래.”

“사별? 왜 죽었는데?”

“몰라. 그런데 중3 여자애라는데 너무 까다롭지만 않으면 좋겠어. 난 애들 보는 거 완전 꽝이라.”

“그럼 내가 같이 가 줄까? 난 애들 좋아하는데. 어린이 환자도 잘 보고.”

“됐어. 일인데 그럴 수는 없지. 이 동네에서 처음 맡은 의뢰인데 제대로 해야 입소문이 나지.”


김동훈 씨의 드림카였던 포르셰를 몰아볼 기회는 날아갔습니다. 조안나를 따라다닐 수 있는 핑계도 사라졌고요.


집에 돌아와 보니 캘러한이 진지한 표정으로 온라인 상담 중, 내용을 훔쳐보니 상당히 수상쩍고 범죄냄새가 풀풀 풍깁니다.


>> 연장은 세팅돼 있고?

<< 네. 몸만 오면 됩니다.


>> 결행 시간은 언제가 좋아?

<< 빠를수록 좋아요.


>> 그렇게 서두를 필요 있나? 준비해서 완벽한 게 좋지 않아?

<< 지금 처리하지 않으면 일이 상당히 지저분해져서요. 신속처리 부탁해요.


>> 오케이. 현금 준비됐어?

<< 끝나면 바로 지불할게요.


로그아웃. 캘러한이 비밀스러운 동작으로 김동훈 씨의 노트북을 신속하게 덮고 나가려는데 김동훈 씨가 팔목을 붙잡았습니다.


“어디가?”

“의뢰인 집에.”

“이 시간에?”

“우리 일에 낮밤이 있나? 왜 이래? 아마추어 같이.”

“무슨 일인데?”

“의뢰인의 비밀을 말해줄 수 없다고 한 것 같은데.”

“난 동업자라며?”

“동업자 아니라며? 동업자 할 거야? 그러면 말해주고. 감당할 수 있겠어?”


김동훈 씨는 침을 꼴깍 삼켰습니다. 외통수에 걸린 거죠. 그냥 보내자니 캘러한이 뭔가 나쁜 짓을 할 것 같고, 그렇다고 동업을 할 수도 없고.


“그럴 줄 알았어. 집이나 잘 보고 있어. 순식간에 해치우고 올 테니.”

캘러한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싱긋 웃고는 나가버렸습니다.


캘러한이 도착한 곳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작은 규모의 아파트 5층이었습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데 여자 혼자 집까지 옮겼다는 거지? 쫌 대단하군.’


아파트 문이 열리자 상기된 표정의 젊은 여자가 캘러한을 맞았습니다.


“이쪽으로.”

캘러한은 말없이 여자가 안내하는 쪽으로 향하는데,


“제가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지금이라도 이렇게 와 주셔서 너무 다행이에요.”

젊은 여자는 변명하는 목소리로 말했어요.


“쯧, 여자 혼자서, 어리석기는. 됐고. 어디에 있지?”

캘러한은 혀를 차며 여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봤어요. 그리고,


“이거 생각보다 훨씬 난장판이군. 보수를 더 받아야겠어!”

“그건.. 좀.. 제가 준비한 현금이 이것밖에 없어서.”


여자가 돈을 보여주자 캘러한은 주저 없이 받아 주머니에 넣었죠. 빌려준 돈 받는 것처럼.

“일단 이것부터 해결하고 다시 얘기해.”


캘러한은 여자가 준비한 전동 드릴을 우습다는 듯이 집어 들었어요.


“애당초 이런 거에 의지하겠다는 자세부터 틀려 먹었어. 이런 건 손맛이 중요한 건데 말이야. 그냥 드라이버는 없어?”

자신 있게 말했지만 거실 바닥을 가득 채운 DIY 가구 부속들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작은 것까지 합해 원목 합판 수만 줄잡아 스무 장, 나사와 피스는 백 개도 넘고, 너트 크기는 비슷비슷하면서도 미세하게 다른 것도 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설명서가 영어!

“뭐야? 영어잖아. 이런 건 계약에 없지 않았나?”


“그게 직구로 구입한 거라서.. 죄송해요.”

젊은 여자는 순식간에 죄인이 되어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이런 제길. 영어만 아니었어도.”

설명서 첫째 장부터 난해합니다. 이걸 어떻게 세워서 고정하라는 것인지, 캘러한은 사람 하나 병신 만드는 게 열 배는 쉽겠다고 생각했습니다.


‘30분이면 충분할 거라 생각했는데.. 큰 일이군.’


숨기려 했지만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그의 손동작 하나하나를 면밀하게 관찰하던 젊은 여자의 얼굴에 실망감이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저기.. 벌써 1시간 지났는데 가능하신 거 맞죠?”

“조용히 해! 집중이 안되잖아!”

“네에..”


좀체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캘러한이지만 개망신은 기정사실. 할 수만 있다면 여자를 기절시키고 도망가고 싶었습니다.


“잠깐만 쉬지.”

“마실 거라도 가져올까요?”

“됐어. 일할 때 쩝쩝거리는 건 초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그 보다 전화를 좀.”


최대한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김동훈 씨의 번호를 눌렀죠.


“헤이, 동업자. 여기 일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아. 주소 찍어 줄 테니까 30분 내로 와. 안 오면 알지? 누구 하나 죽어 나갈지도 몰라. 그건 모두 동 치과 책임이고.”


6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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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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