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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즉석 오디션

유쾌한 시티 라이프, 남 둘 여둘 시트콤

by 시sy

사소한 킬러 7화.



조안나와 박서우의 오피스텔


“그래서 여기서 노래를 시켜보겠다고?”

퇴근한 박서우가 황당한 표정으로 조안나와 예진이를 번갈아 보네요.


“그럼 어떡해? 공부는 싫고 춤추고 노래해서 먹고살겠다는데 가능성이 있는지는 봐야지.”


도대체 어떤 머리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 학교, 학원, 집만 왔다 갔다 해주기로 했던 의뢰인의 딸을 집에 데려와서 노래를 시킬까요? 그것도 얹혀살면서.


“네가 보면 그 가능성이 있는지 알 수는 있고?”

“나야 모르지. 대신 넌 좀 알 거 아니야? 나보다 훨씬 똑똑하니까. 피아노도 쳤고!”


아무리 경험해도 익숙해지기 어려운 막무가내식의 뻔뻔함입니다. 전후사정을 들어보니 더 기가 막힙니다.


“들어보고 가수로 재능이 있으면 도와주고, 없으면 공부하기로 했다는 건 알겠어. 좋아. 재능이 있다 치자. 어떻게 도와줄 건데? 운동이랑 싸움 밖에 모르는 네가?”

“너 있잖아. 전에 네 오빠인가.. 연예기획사 아는 사람 있다면서? 내가 거기 오디션 보게 해 준다고 했어.”

“약속했다고?”

“응!”

“잘 부탁해요. 언니.”


아무 말 없던 예진이가 딱 이 타이밍에서 박서우에게 고개를 90도로 숙였습니다. 당황, 황당, 어이없음, 그 어떤 표현으로도 박서우가 겪는 정신적 혼란을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제 나도 모르겠다.”


포기하면 마음이 편해지죠. 박서우는 꼬여버린 이 사태를 해결하겠다는 마음을 버리고 조안나와 예진이를 외면했습니다. 마치 못 본 것처럼.

정신적 혼란을 현실부정으로 극복하는 방법이죠. 눈칫밥으로 성장한 박서우가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구사했던 스킬입니다.


‘없는 딸 취급하는 아빠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기.’

박서우는 웃옷을 대충 던져 놓고 욕실로 향했습니다.


“어디가?”

조안나가 묻지만 대답하지 않습니다. 없는 사람이 말하면 안 들리기 때문입니다.

‘난 안 들린다. 조안나는 없다~ 저뇬은 없어야 해!’


“에이. 진짜. 또 없는 사람 취급한다. 나 여기 있거든. 서우야. 잠깐만, 내가 조금 들어봤는데 얘 진짜 잘해. 2년째 밴드부 활동도 했대.”

다른 건 몰라도 아빠 몰래 뭔가 하고 있다는 것만은 박서우와 공통점입니다. 밴드부까지 했다면 노래에 진심이라는 것인데.. 들어나 볼까 잠시 고민.

“옆집 가서 캘러한이랑 치과선생도 불러와.”

“그 인간들을 왜에?”

조안나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습니다. 절대 이유를 묻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들으면 좀 더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잖아.”

“그치만 갑자기 여러 명이 듣겠다고 하면 예진이가 부끄럽잖아.”

조안나의 말에 박서우가 예진이에게 물었죠.

“연예인 할 거라면서 그런 게 부끄러워?”

“솔직히 부끄럽지는 않아요. 많을수록 더 잘하는 편이고요. 다만,, “

“다만 뭐?”

“조안나 언니가 오자고 해서 오기는 했는데, 이렇게 폐를 끼쳐도 되나는 생각이 방금 들었어요. 죄송합니다.”

예진이가 다시 머리를 숙였어요. 조안나가 놀랍니다.

“뭐야? 서우에게는 왜 이렇게 다소곳해? 날라리면 날라리답게 굴어! 일관성 있게!”

“날라리 아니거든요? 날라리는 언니면서.”

“내가? 내가 어딜 봐서?”

“딱 보니 알겠던데. 언니 학교 다닐 때 껌 좀 씹고, 애들 셔틀 시키고 그랬죠?”

조안나는 얼굴이 화르르, 박서우가 특유의 긍정마인드로 끄덕입니다.

“애가 영리하네. 눈치도 있고. 가능성 보인다.”

“넌 뭘 그걸 또 긍정하고 있어?”

조안나가 항의해 보지만.

“아직 있었어? 어서 가서 옆집 이웃들 불러와. 이웃사촌이라고 PT영업하러 갈 때는 언제고.”


잠시 후, 김동훈 씨와 캘러한까지 모두 모였습니다.

요즘 박서우는 좀 이상합니다. 뭘 하든, 저 둘을 끌어들이려고 하죠. 설마 둘 중 하나에게 마음이 있는 걸까요? 조안나는 눈치를 보며 박서우의 속내를 알려고 하지만 전혀 알 수 없습니다.

20년 동안 실패했는데 지금이라고 달라지나요?


“와, 이 애가 그 애야? 일주일 동안 봐주기로 했던?”

“애 아니거든요?”

예진이는 박서우 빼고는 모두에게 까칠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1분 만에 견적 딱 나왔거든요.

-조안나, PT강사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1인 대행서비스. 돈만 주면 애인대행도 할 것 같음.

-김동훈, 돈 못 벌고 성격만 좋은 치과의사. 조안나의 미모에 반해 속없이 이용당하고 있음.


“그런데 나는 왜 여기 온 거냐고?”

그때 뒤늦게 따라 들어온 캘러한이 투덜댑니다.

하품하며 아무(?) 데나 손 넣어서 긁고. 누가 옆에 있든 안중에도 없습니다.


-캘러한? 이 인간은 뭐지? 이름이 뭐 이래? 백수 feel이긴 한데.


“어차피 할 일도 없으면서 노래 들으면 좋지. 언제 우리가 이런 기회가 있겠어? 혹시 알아. 이 애가 나중에 진짜 유명 가수가 되면 그때는..”

“애 아니라니까요?”

거듭되는 ‘애'소리에 예진이는 김동훈 씨를 째려봤습니다. 김동훈 씨는 눈치가 없죠. 꽂히면 자기 할 말만 합니다. 남의 말 안 들어요.

“얼굴도 예쁜데 치아열이 별로네. 이건 교정하면 훨씬 좋아지는데.. 너 아저씨 치과 한번 와. 싸게 해 줄게.”

“영업 그만하시고. 치과 오빠는 여기 앉아. 킬러씨는 저쪽 서우 옆에 앉고.”

“킬러요. 사람 죽이는 킬러?”

예진이의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절대 아니야! 그냥 별명 같은 거라고 생각해. 넌 노래 부를 준비나 하고. 말했지만 기회는 한 번뿐이야. 여기 청중평가단이 ‘아니요'하면 넌 공부하러 학원 가는 거야.”


예진이가 거실 가운데 서서 감정을 가다듬자 분위기가 진지해졌습니다.

드디어 노래가 시작됐습니다.

익숙한 외국가수의 낮은 음색이 우울하게 고막을 파고들고, 본격적인 선율이 시작되자 미세한 떨림이 듣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생각보다 잘 부르는데?”

“내가 뭐랬어?”

노래가 끝나고 다들 한 마디씩 평하는 분위기.

전반적으로 이 정도면 연습해서 오디션 보러 가도 창피를 당하지는 않겠다.

잘만하면 가수로 먹고 살 수도 있겠다.

무반주에 이 정도면 노래방 가면 죽이겠다. 등등.


유독 캘러한은 아무 평이 없습니다.

“킬러씨, 당신도 한마디 해야지?”

“나? 노래 잘 모르는데. 더구나 영어잖아. 그런데 너 이름이 ‘예진'이라고 했지? 성은 뭐야?”

“한인데요. 한예진.”

“흐음. 아버지가 한 씨라는 말이지?”

“글쎄 노래하고 성이 무슨 상관인데?”

조안나가 물었지만 캘러한은 무시했습니다.

“그냥 우연이겠지. 이제 난 필요 없지. 간다.”

그러고는 휑하니 나가버렸어요.


“내 노래가 그렇게 별로인가요?”

캘러한이 갑자기 자리를 뜨고 나니 예진이가 눈치를 보기 시작합니다. 시선은 오직 한 사람, 박서우에게 가 있었죠. 나머지야 뭐라 하든 연예기획사의 인맥을 가지고 있는 박서우만 오케이면 되니까.

캘러한이 나가는 모습을 이상하게 보던 박서우는 자신에게 모여든 시선을 알아채고 결국 한마디 했습니다.

“나름 괜찮았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저음이 꽤 인상적이고.”

“그럼 저 오디션 볼 수 있어요?”

예진의 얼굴이 활짝. 덩달아 조안나가 눈을 반짝이며 ‘해달라'는 얼굴을 들이밀었고요.

박서우는 어서 이 자리를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었어요.

“성급한 감은 있지만 좀 알아볼게. 너무 기대는 하지 마. 오빠라고는 해도 친하지는 않으니까. 게다가 오디션 본다고 가수 되는 것도 아니고. 떨어질 가능성이 백만 배는 높아.”

이것만으로도 예진이의 기분은 날아갈 것 같습니다.

조안나는 좋아서 펄쩍펄쩍. 지가 왜?

그러나, 박서우는 씁쓸했습니다.

오랜만에 연락했을 때 오빠라는 인간이 짓고 있을 표정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친하기는커녕 원수에 가깝지.’


김동훈 씨는 오피스텔로 돌아와 캘러한의 눈치를 봅니다.

“그렇게 별로였어? 그냥 잘했다고 한마디 해주면 덧나? 뭔 인간이 그렇게 칭찬에 박해?”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캘러한. 노트북으로 진지하게 검색 중.

“또 뭐 하는데 내 말도 못 들어? 의뢰야?”

못 듣는 게 아니라 안 듣는 거죠. 당연하게 무시하는 겁니다.

그러나 무시당하는데 익숙한 김동훈 씨는 끈질기게 묻습니다. 원래 눈치 없으면 끈기라도 있어야 하거든요.

김동훈 씨는 캘러한의 얼굴과 노트북 사이에 손바닥을 들이밀어 흔들었습니다.

“집중력이 좋은 타입이구나? 내 말 안 들려?”

그러나 김동훈 씨의 손이 들어옴과 거의 동시에 캘러한이 딱 잡았습니다.

“아악!”

그저 잡았을 뿐이데 김동훈 씨는 비명을 질렀죠.

“어, 네 손이었어? 미안, 침입자인 줄 알고.”

캘러한이 김동훈 씨의 손을 놔주자 김동훈 씨는 손을 감싸며 길길이 날뜁니다.

“손 부러뜨릴 일 있어? 이 손이 얼마 짜리인 줄 알아? 이 손으로 치과진료도 해야 하고 수술도 해야 하는데 잘못되면 당신이나 나나 이 집에서 쫓겨나. 월세도 안 내는 주제에.”

“미안하다니까. 그러니까 왜 일하는데 족발을 앞에 들이대?”

김동훈 씨는 캘러한이 자기 손을 잡기만 한 것인지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봤습니다. 무슨 인간의 손이 그렇게 무지막지할까요? 프레스 기계에 손이 끼인 줄 알았죠.

“무슨 일 하는데? 얼마짜리야?”

김동훈 씨도 속물이 되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나쁜 일인지 좋은 일인지부터 물었을 텐데요.

가난 앞에 장사 없습니다.

“뭐 좀 알아보는데. 아까 그 중학생 아빠가 A&A 파트너스 다닌다고 했지?”

“그랬던가? 맞는 거 같아. 맞다. 근데 왜? 아는 사람이야?”

“아니. 별일 아님. 그건 그렇고. 치과, 개 잘 알아?”

“개? 게? 멍멍하는 개?”

“로트와일러라는데. 이 개가 그렇게 사나운가?”

캘러한이 노트북을 돌려 김동훈 씨에게 보여줍니다.


군견으로서 늠름하게 역할을 수행 중인 로트와일러의 사진입니다.

윤기 나는 검은 털, 위협적으로 입주위만 갈색, 두 눈 위에 큰 점처럼 갈색털이 송송, 날카롭게 드러난 이빨, 크고 처진 귀. 딱 봐도 맹견의 포스가 작열합니다.

“이 개 몰라? 영화에 많이 나오잖아. 요즘도 가끔 인터넷에 기사 나는데. 산책하다가 애들 물어 가지고, 물리면 최소 중상이라는.. 왜? 이 개 하고 상관있어?”

“도망친 개를 급하게 찾아달래. 이렇게 생긴 개.”

“이렇게 큰 개가 왜 도망쳐?”

“그게 개주인이 횡설수설이야. 스케일링하다가 도망쳤다는데, 무슨 소리인지. 개가 치과에 가지는 않을 테니 개주인이 스케일링 중에 개가 도망쳤다는 소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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