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파울루, 브라질
마냥 루시아나의 집에만 머물 수는 없는 일이어서 시내 근처에 위치한 호스텔로 숙소를 옮겼다. 브라질에 올 때 숙소 예약도 하고 오지 않은 상태여서 - 론리플래닛을 펼쳐 아무 호스텔이나 찍은 뒤, 루시아나에게 그곳으로 데려다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상파울루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습관처럼 한 일이 두 가지 있다.
아침에는 상파울루 국제공항에 전화해 내 가방이 도착했는지 확인하는 일이었고, 저녁에는 항공사 고객지원센터에 메일을 보내 내가 얼마만큼 화가 나 있는지 표현하는 일이 그러했다. 리우로 가는 일정도 미뤄가며 상파울루에서 하염없이 버텼다.
항공사 직원은 계속 10만 원가량의 보상금을 줄 터이니 포기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단번에 싫다고 답했지만 시내로 나가 여행용 배낭과 카메라 가격 등을 알아봤다. 당장 필요한 생필품은 살 수밖에 없었지만 가격이 나가는 배낭이나 카메라 등은 사고 싶지 않았다.
어쩌겠어. 다시 사는 수밖에.
엄마는 참 쉽게도 말한다. 나와 정 반대 성격을 가진 엄마는 큰 일에 있어 늘 의연한 모습을 보여준다. 생각해 보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지만 난 사지 않았다. 정말 그런 것들을 다시 다 사고 나면 내가 배낭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셈이 되는 것 같았다.
'사지 않을 거야. 어떻게 해서든지 찾아내고 말 거야.'
나는 엄마랑 달리 집요하다. 의연하거나 유연하지 않고 집요하다.
호스텔로 돌아오니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문득 '하루가 무척이나 길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스텔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듣는데 눈물이 났다. 억울하고 짜증나고 슬픈 감정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때 - 프랑스 파리에서 왔다는 케빈이 다가왔다.
"너 설마 오늘이 St.Patrick's Day라서 우는 거야?"
시답지 않은 농담에 피식 웃음이 났다.
"우리 지금 다운타운에 있는 펍에 갈 거야. 같이 가자!"
호스텔 입구를 보니 프랑스 보르도에서 온 캐넌과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온 루이나가 서 있었다. 여행 전부터 치안이 위험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은 상파울루. 해가 지면 호스텔에 앉아 다운받아 놓은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 것, 여행자들끼리의 소소하게 대화를 나누는 일이 전부였는데. 친구가 생기니 없던 용기도 덩달아 생겨났다.
지하철을 한 30분가량 타고 가니 펍들이 즐비한 거리가 나왔다. 개중엔 클럽도, 스트리퍼들이 공연하는 술집도 있었다. 우리는 장난 삼아 즐비하게 늘어선 스트립 클럽들을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며 크게 웃었다. 그렇게 여기저기 상파울루 거리를 휘젓고 다니니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도착한 곳은 아이리쉬 펍.
난생처음, 그것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아일랜드의 공휴일인 St.Patrick's Day를 기념하게 된 것이다.
구석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밴드와 손바닥을 마주대고 둥글게 원을 그리며 춤추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일랜드 전통 음악 때문인지, 원을 그리며 춤을 추는 사람들 때문인지 - 이 모든 것들이 마치 꿈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이 꽉꽉 들어 차 움직이기도 힘든 펍 안에- 사람들은 웃음을 주고받고, 술잔을 건네고, 시간을 함께 했다.
케빈은 나를 잡아 밴드 사이로 밀어 넣었다. 유럽 사람들과 남미 사람들만이 가득한 펍 안. 나로 인해 둥근 원이 깨졌지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바로 또 조금 더 큰 원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손바닥을 마주 대고 두 명씩 춤을 추다가 파트너가 바뀌면 인사를 하고 또 춤을 췄다. 그러다가 또다시 원을 만들고, 모두가 함께 춤을 추고. 사람이 들어오면 조금 더 큰 원을, 나가면 다시 작은 원을. 그렇게 계속 크고 작은 원을 만들며 춤을 췄다. 정말이지 '이 밤이 끝나긴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나하게 취한 캐넌은 이미 펍 안에서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매력 넘치는 브라질 여자 애들 틈 사이에서 세상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캐넌을 좋아하는 듯 보였던 루이나는 심통난 표정으로 계속 내 옷자락을 잡아끌며 물었다. "여기 별로지 않아? 다른 데로 가지 않을래?"
케빈은 아일랜드 공휴일을 기념하는 자리에 아일랜드 사람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며 장난 섞인 농담들을 건네 왔다.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모든 건 잊어버리면 그만인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중 -
가브리엘 겐조라는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