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파울루, 브라질
브라질에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의 남자 애를 만나고 알 수 없는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이성에 대한 관심이라고 표현하기에도, 국적이 다른 단순한 동갑내기 친구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표현하기에도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술이 너무 올라 공기를 쐐러 밖으로 나갔다가 필리페와 더글라스를 알게 되었고, 다른 몇몇 브라질 사람들과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나누게 되었다. 그러다 문을 열고 술집을 다시 들어갔을 때 가브리엘을 만났다.
워!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브리엘과 가브리엘의 친구들은 "워!"라는 함성과 함께 문을 들어서는 나를 깜짝 놀라게 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웃긴 건 - 대화가 시작되고 5분이 넘는 시간 동안 내가 가브리엘을 술집 밖에서 만난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대화를 한참 이어 나가던 중,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사람이 방금 밖에서 만난 사람과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만큼 술이 많이 취해 있었다.
스페인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를 둔 가브리엘은 다른 브라질 남자들 만큼 적극적이거나 외향적이진 않았지만 친절하고 다정했다.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았으며, 순수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어딘지 모를 울적한 그늘도 느껴졌다. 그게 가브리엘이 가진 매력이었다.
대학에서 역사를 2년째 전공하고 있다는 가브리엘은 내가 나이를 물어보자 왜 그런 것을 묻냐며 되물었다. 나중에 이유를 물어보니 대학을 남들보다 늦게 들어가서 나이를 말하는 것이 싫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나도 2년을 휴학해서 너랑 같은 나이에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고 있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문학을 전공한다고 말하자 가브리엘은 펍 주인에게 종이와 펜을 빌려 자신이 좋아하는 브라질 작가와 작품들을 적어주기 시작했다. 그 시끄러운 아이리쉬 펍이 순간 굉장히 고요하게 느껴졌다.
나는 오늘 밤이 지나면 다시 못 볼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가 지구 정 반대편에서 평생 각자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정말 오랜만에 누군가와 진실된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안과 밖을 오가며 우리는 꽤 오랜 시간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또 소통했다.
새벽, 서로의 일행이 집으로 향하자 우리는 브라질 식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 당시 나는 웬만하면 핸드폰을 숙소에 두고 다녔기에) 가브리엘이 다시 급하게 종이와 펜을 빌려 자신의 이름과 번호를 적어줬다. 그리고 내 이름을 자신의 핸드폰에 저장하며 오늘 페이스북 친구 신청을 할테니 신청을 받아달라고 말했다. 상파울루를 떠나기 전 꼭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말과 함께.
서로가 서로의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 몇 번을 되새기며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다 또 크게 웃었다. 그때 나는 우리가 지구 정 반대편에 사는 것은 꽤 멋진 일이고, 문제 될 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호스텔로 돌아오자마자 페이스북 페이지만 바라봤다.
'가브리엘이 언제 내게 친구 신청을 해 올까?'
잠도 자지 않고 페이스북 친구 신청이 오기 만을 기다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브리엘은 페이스북 상으로 친구 신청을 해왔고 -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이틀 뒤 가브리엘이 친구 관계를 먼저 끊었다. 가브리엘에게는 여자 친구가 있었다. 그게 이유였는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메시지를 보내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어렸고, 누군가를 좋아할 때 의심이 없었으며 - 아무리 상대가 내게 상처를 줘도 끝까지 상대를 믿고 싶어 했다.
최소한 좋은 친구는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가슴 한 구석에 무언가 쿵하고 내려앉음을 느꼈고 오랜만에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울었다. 그날 밤, 나 혼자 소통했던 건가 싶어 실망하고 좌절했다. 그리고 그 끝에 - 버릇처럼 시작된 자책과 자기혐오. 나는 나를 다시 미워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별로였나. 나를 만났던 걸 후회하나.
'왜 의심하지 않았지? 왜 더 단단하게 준비하지 못했지? 왜 지금도 담담하지 못하지?'
그 후로도 한 동안 가브리엘에 대해 생각했다. 다니엘을 만난 이후에도. 남미를 여행하는 중에도. 한국에 돌아와서도 한 동안. 가브리엘에 대해 생각했다.
***
가브리엘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행 중 첫눈에 반한 친구이다. 그 이후 아무리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를 만나도 나는 여지를 두거나, 환상을 품거나, 기대를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