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우데 자네이루,브라질
사람들은 날더러 현실 감각은 없고 몽상가적인 기질만 강하다고 말한다. 내가 하는 생각과 행동, 내뱉는 말들을 보며 나를 그렇게 단정 짓는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은 더 많이 현실과 이상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다. 영화 같은 삶을 꿈꾸면서도 '내겐 그런 영화 같은 일들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라는 체념.
그도 그럴 것이 내 인생은 남아메리카라는 대륙을 여행하기 전까지 지극히 굴곡 없는 평범한 인생이었으니까. 그런 평범함은, 드라마 없는 보통의 삶은 한 때 내게 아주 큰 컴플렉스였으면서도, 또 한편으로 아주 큰 안도가 되어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운명과 함께 제한된 시간이 갖는 힘을 믿는 사람. 특히 사랑을 이야기할 때는 더더욱 그러했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제시와 셀린이 함께 보냈던 하루,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프란체스카와 로버트의 나흘 등.
그들에게 10년, 20년 동안의 시간이 주어졌다면 감정이 그토록 지속될 수 있었을까? 관계가 그토록 특별해질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들. 그들도 결국 현실을 살아야 했으므로… 함께 집세와 전기세 등을 이야기하고, 육아를 분담하고.
각자 일과 생활에 치여 사는 것을 보고 살아야 한다면 사랑으로 시작된 감정이 사랑으로 끝날 수 있을까? 처음 느낀 감정은 무뎌지고 결국은 식어서 또 다른 사랑을 찾거나, 옛사랑을 그리워하며 살아가지 않을까?
너는 왜 춤 추지 않아?
그날 밤, 내가 묶었던 호스텔 파티에 네가 오지 않았더라면. 파티 도중 먼저 자러 올라간 내가 다시 내려오지 않았더라면. "너는 왜 춤 추지 않아?"라는 말과 함께 네가 다가오지 않았더라면. 나탈리아를 찾아야 한다며 계속 말을 끊고 돌아서는 나를 네가 끝까지 붙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아니 그 모든 것 이전에 내 배낭이 제때 상파울루에 도착했더라면. 그래서 내가 예정대로 리우 데 자네이루를 여행하고 이미 떠난 시점이라면. 그럼 우린 아마 평생 서로를 모른 채 살아가겠지?
그런 일들이 전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우린 지금쯤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크게 다른 삶을 살고 있을까?
그때 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의 나와 많이 다른 내가 되어 있을까?
이러한 생각이 다 무의미한 이유는 어쨌든 나는 그날 너를 만났고. 우리는 호스텔 파티가 끝난 새벽 4시, 겁도 없이 코파카바나 해변을 걸었으며. 요가하는 사람이나 길을 묻는 사람들에게도 겁을 먹고 움찔움찔 어깨를 들썩였고, 웃었고, 약간은 취해있었고. 너는 끊임없이 내게 예쁘다는 말을 해주었고.
예쁘다는 말이 익숙하지 않은 나는 너의 말을 믿지 않았어. 네가 해준 모든 말들을, 30개가 넘어가는 아름다움을 수식하는 그 단어들을 그냥 지구 반대편에서 온 사람에게 보이는 단순한 하룻밤 호감이라 여기고 마음을 열지 못했던 게 사실이야.
내가 가브리엘에 대해 이야기하며 너 역시도 믿지 못하겠다고 했을 때- 넌 개방적이면서도 소모적인 남미의 문화를 설명해 줌과 동시에 내가 상처 받고 마음을 닫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지. 그리고 넌 다를 거라 약속했어.
네가 다시 남미 사람들을 좋아할 수 있도록 내가 만들어 줄게.
브라질에서 마지막 밤이었던 내게 너는 하루만 더 머물고 가라고 계속 이야기했어. 다음 날 맛있는 밥을 함께 먹자는 게 그 이유였고. 그땐 떠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 늘 영화 같은 사랑을 꿈꾸면서도, 영화 같은 일은 영화에나 있는 거라고 치부하며 지냈던 나였거든. 더 머물게 되면 상처만 안고 떠날 것이란 생각에 무서웠어. 해가 밝으면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겠다는 너의 제안도 거절하고 리우를 떠나던 날, 버스에 오르면서 후회했어. 그리고 끊임없이 나에게 이야기했어.
'떠나는 것이 맞아. 맞는 거야… 맞는… 거겠지?'
내가 3달간 남미를 여행할 때, 넌 나를 위해 기도해 주었고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도와주었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지. 지금에서야 드는 생각인데- 나의 스펙터클 했던 남미 여행기가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네게는 다소 뻔하고 지루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싫은 내색 없이 내 이야기를 끝까지 웃으면서 들어줘서 너무 고마워.
끊임없이 널 의심하고 시험하고 못 미더워했던 내게, 지금까지 아낌없는 사랑을 주는 너.
10년, 30년, 60년이 지나서도 우리가 코파카바나 해변을 함께 걸으며 일출을 볼 수 있을까? 집세와 전기세 등 모든 현실 속 장애물들을 넘어서 끝까지 사랑이라는 감정 하나로 관계를 버텨낼 수 있을까?
말해 줘.
나는 몽상가가 아니고, 우리는 지극히 현실 세계 속 가능한 미래를 함께 꿈꾸고 있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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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를 시작하고 2년 정도가 지난 뒤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