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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팡동이 Aug 03. 2021

클라우디아와 헥토르 (헥토르 편)

산티아고, 칠레



산티아고의 가장 큰 수산시장, Mercado Central 앞에서 헥토르를 만났다. 클라우디아와 함께. 생각만큼 어색하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아주 편하지도 않았다. 이혼한 부모를 함께 만나는 자녀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중간에서 둘의 눈치를 봐야 했고, 둘 중 누구 한 명의 편을 더 들거나 애정이 쏠리는 걸 드러내서도 안 됐다. 나도 모르게 몸이 굳어졌다. 


우리는 먼저 수산시장을 구경했다. 헥토르는 한국 음식을 그리워할 나를 위해 한국 식당 몇 개를 종이에 적어왔다. 하지만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모두 문을 열지 않았다. 우리가 간 레스토랑은 칠레 답게 해산물을 요리한 음식들이 많았는데- 나는 메뉴판에 있는 사진을 보고 대충 음식을 골랐다.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에선 고수가 들어간 음식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칠레부터는 달랐다. 칠레 사람들은 대부분의 음식에 고수를 넣었다. 스페인어에서 가장 먼저 배운 문장이 "Sin cilantro, por favor." (고수 잎은 빼주세요.) 일 정도이니. 고수를 빼 달라는  게 웃긴 건지, 내 어리숙한 스페인어 발음이 웃긴 건지- 그 말만 하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웃었다.  


편식이 심한 나는 여행 중 맥도날드를 제일 많이 찾는다. 하지만 이 칠레 음식은 내가 태어나 먹은 음식들 다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이 수프 안에는 갖가지 해산물이 들어간다. 해산물 별로 느낄 수 있는 식감이 모두 다른데 그게 수프의 느끼하면서 고소한 맛과 어우러져 최고의 맛을 경험해 볼 수 있다. 클램 차우더와 베트남 쌀국수의 중간 맛이라 해야 하나. 아무튼! 이날 이후 나는 칠레에서 이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만 찾아다녔다. 



밥을 먹은 뒤, 클라우디아는 집으로 돌아갔다. 더 이상 남아있을 명분이 없었다. 클라우디아가 돌아가고 우리는 카페에 갔다. 헥토르는 클라우디아 앞에서 하지 못한 말들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결혼 생활이 얼마나 불행했는지에 대해서였다.



클라우디아는 사치가 너무 심했어.

클라우디아가 사치가 심했다고? 헥토르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클라우디아가 사치가 심했다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헥토르.


클라우디아는 사치가 너무 심했어. 나를 많이 구속했고. 너 지금 클라우디아 집에서 지낸다고 했지? 방 3개짜리 그 집은 우리의 신혼집이었어. 나는 우리 둘이 살기에 방이 하나만 있는 아파트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클라우디아는 달랐어. 적어도 방이 3개는 있는 집을 원했어. 그리고 안전한 고급 아파트 단지.

너도 알잖아 우리가 칠레 사람이 아닌 거. 우린 볼리비아에서 왔고 가난한 학생이었어. 왜 안 써도 되는 돈까지 써가며 그런 생활을 유지해야 하는지 난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어.


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나중엔 그곳이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집인지 클라우디아 혼자 만의 집인지 조차 모르겠더라. 집은 일단 마음이 편해야 하잖아. 근데 세상에서 가장 마음이 불편해지는 공간이었어 그곳은.


남녀 사이 일은 둘 말고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그냥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나는 헥토르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건 단지 낭비벽이 심해서 그런 게 아닐 수 있다고.


볼리비아 사람으로 칠레에 산다는 것. 이건 클라우디아와 헥토르 모두에게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생존을 다투는 일이었을 것이고.


헥토르가 최소한의 지출만이 칠레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라 생각했다면, 클라우디아는 그 반대였을 것이다. 치안이 안전한 지역의 방 3개짜리 아파트. 어쩌면 그것은 클라우디아에게 칠레 생활을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버팀목과 같은 것일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노체트가 즐겨 다녔다는 술집 (산티아고, 칠레)

헥토르는 아직도 화가 많이 난 사람처럼 보였다. 클라우디아를 많이 미워하고 있었다. 동시에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 화를 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야만 뒤를 돌아보지 않으니까. 클라우디아를 향한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 품을 수 있을 테니까. 슬픔이라는 감정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산티아고를 떠나기 며칠 전, 헥토르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이미 작별인사를 하고 헤어진 시점이었다. 자신이 한 말이 계속 신경 쓰였는지 헥토르는 갑자기 목성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헥토르가 산티아고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헥토르는 그곳을 찾는다고 했다. 어떤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목성을 보러 간다. 해도 달도 아닌 목성을.


우리는 그날 클라우디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산티아고에 머물며 헥토르를 3번 만났는데 마지막 날 우리는 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헥토르는 과거의 상처를 이야기하는 대신 내게 별자리 보는 법을 가르쳐줬다. 별자리가 잘 보이는 날씨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별자리 등을 말해주며 웃었다.


'클라우디아와 헥토르가 화해하고 다시 잘 만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목성을 보러 간 그날은 '그냥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별을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들을 하게 된다. 작은 생각들로부터는 멀어지고 커다란 것들을 바라게 된다. 왜 헥토르가 그곳을 그토록 좋아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 

헤어지기 전, 헥토르는 내게 선물을 하나 줬다. 와이루루라 불리는 열매를 엮어 만든 팔찌. 부정적인 에너지를 물리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불러일으킨다는 - 잉카 원주민들의 믿음이 깃든  팔찌였다. 남미 사람들은 온갖 사물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건 의미가 없겠지?'싶어 물으면 어김없이 의미나 믿음이 깃들어 있었다. 


팔찌와 관련해 또 한 가지 의미가 더 있었다. 남미에서는 먼길을 떠나는 가족이나 친구에게 팔찌를 매어준다고 했다. 길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그리고 남아있는 우리를 잊지 말라는 의미에서.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있으면 괜스레 마음이 뜨거워졌다. 


와이루루 (출처.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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