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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팡동이 Aug 02. 2021

클라우디아와 헥토르 (클라우디아 편)

산티아고, 칠레


남미에 가고 싶었던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클라우디아와 헥토르 커플 때문이었다. 둘을 만난 건 LA에서였다. 나는 원래 헥토르와 친구였고 클라우디아는 그 당시 헥토르의 여자 친구였다. 차분하고 내성적인 클라우디아와 엉뚱하고 장난기 많았던 헥토르. 둘은 나보다 6~7살가량 나이가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20대 후반의 나이도 어린 나이지만, 그때는 둘이 참 어른스러워 보였다. 나도 저 나이가 되면 저런 사랑을 해볼 수 있으려나, 뭐 이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헥토르는 돌아가기 전 편지를 남겼다. 그리고 난 그 편지를 읽으며 몇 날 며칠을 펑펑 울었다. (만남과 헤어짐에 취약한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볼리비아 사람이었던 헥토르와 클라우디아는 2008년 당시, 치대생이었고 이후 칠레에 가서 대학원 과정을 이수할 계획이라 했다.



너희를 만나러 꼭 남미에 갈 거야.

둘은 돌아가 결혼을 했고 칠레에 정착했다. 그렇게 잘 지내고 있으리라 막연히 생각하며 남미 여행을 준비했다. 간간이 스카이프(영상 통화)도 했다. 헥토르 옆에는 언제나 클라우디아가 있었다. 둘은 세상 가장 행복한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듬해, 나는 남미행 비행기표를 샀다. 그리고 헥토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언제쯤 보면 되겠다'- 대략적인 스케줄을 알려줄 거라 예상했는데 헥토르는 이혼 소식을 알려줬다.



"사실 너한테 말하지 않은 게 한 가지 있어. 클라우디아와 나는 헤어졌어. 그냥 그렇게 되었어."


헥토르는 길게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렇다고 남미 여행을 취소할 수도 없었다. 그냥 그렇게 남미로 향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일정 상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며칠은 호스텔에 머물렀다. 그리고 클라우디아네 집으로 짐을 옮겼다. 헥토르와 클라우디아가 함께 살던 집. 그 집의 빈 방에서 며칠을 지냈다.


기분이 묘했다. '둘은 여기서 행복한 미래를 꿈꿨을 텐데.' 한 명은 떠나고 한 명은 남은 자리를 바라보고 있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클라우디아는 이사를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디에고라는 남자 친구가 있었다. 디에고는 헥토르와 함께 친하게 지내던 친구였다. 당시 나는 클라우디아가 조금 미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함께 알던 친구를 만나다니.' 치사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생각은 나중에 헥토르를 만나고 조금 바뀌었다.)


'헥토르'는 우리 대화에서 금기와도 같은 단어였다. 물론 어쩌다 그 단어가 나오면 아무렇지 않게 대화했지만 -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헥토르는 언제 만날 거야?


헥토르에 대한 이야기는 늘 클라우디아가 먼저 꺼냈다. 그리고 헥토르를 만나러 가는 날, 클라우디아가 자신도 함께 가겠다고 말했다. 전해줄 게 있다고 했지만 -  설명할 수 없는 이유들도 많은 것처럼 느껴졌다. 후에 헥토르랑 둘이 놀고 들어온 날에는 어김없이 무엇을 했는지, 재미있었는지 같은 것들을 물어봤다.



"볼리비아에 가면 헥토르 가족을 꼭 만나 봐. 정말 좋으신 분들 이거든."


내 느낌인지 몰라도 헥토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클라우디아는 슬퍼 보였다. 디에고를 만나고 있으면서도 헥토르를 궁금해했다.


당시 나는 매일 밤 다니엘과 스카이프(화상 통화)를 하며 지냈다. 하루하루 무엇을 했는지- 내일은 무엇을 할 건지 같은 것들을 이야기했다. 그 밖에 좋아하는 색은 무엇인지, 좋아하는 동물은 무엇인지 이런 유치한 대화들을 나누며 웃었다. 옆에서 채팅을 보던 클라우디아가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브라질에서 만난 친구라고 클라우디아에게 다니엘을 소개해줬다.


- 사랑에 빠진 거야?  

- 사랑? 사랑이라고 하기에 우린 만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당황스러웠다. 나는 이전까지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다. 사랑은 종소리와 함께 오는  아닌가? 물론 다니엘을 처음 만난 순간이  머릿속에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긴 하지만 - 종소리는커녕 리우데자네이루의 앰뷸런스 소리가 들렸는데. 얼굴도, 성격도 무엇 하나 내가 이전에 좋아하던 사람들과 많이 다른데. 근데 사랑에 빠졌냐고? 나는 클라우디아의 질문에 당혹감을 느꼈다.  번도 생각하고 있지 않은 지점이었다.


웃으며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여행의 절반이 지나가자 남미라는 땅도 익숙해졌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역시 어느 순간부터 뻔하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때마다 숙소로 돌아가 화상 통화를 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끄러운 술집에서도, 아름다운 자연경관 앞에서도 숙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사랑에 빠지지는 .  괴로워질 거야.

쑥스럽게 웃던 내게 클라우디아가 해준 말.


이별  종종 그때가 생각났다. 그날 산티아고의 차가운 밤공기와, 함께 마시던 칠레산 와인,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노트북. 그리고 클라우디아의 얼굴. 그냥 그러한 것들.  일어나지 않을 거라 장담했던 일들. 사랑에 빠지는 . 그리고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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