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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팡동이 Aug 06. 2021

산티아고 지하철에서 쓰러지다

산티아고, 칠레


사람이 살면서 기절하는 경험을 몇 번이나 할까. 난 잔병이나 주사가 없는 편이지만 - 엄청 취하거나 스트레스받는 일이 생기면 기절하듯 쓰러지는 습관(?) 버릇(?) 같은 게 있다. 


맨 처음 기절했던 경험은 입시 시험을 보러 가는 지하철 안에서였다. 그리고 그다음은 소주를 마셨을 때. 


서울에서 기절하듯 쓰러지는 일은 내게 낯선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버릇이 산티아고까지 찾아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르헨티나와 칠레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보통 두 나라 중 한 곳에서 와이너리 투어를 한다. 아르헨티나에서 좀 더 많이 하는 것 같은데  - 칠레에 비해 물가도 싸고 멘도사라는 도시가 유명해서 (?) … 사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아르헨티나(멘도사)에서 와이너리 투어를 했다. 하지만 나는 멘도사를 가지 않았기에, 칠레의 포도밭으로 향했다. 


산티아고 근교에는 유명한 와이너리들이 있었다. 꽤 가야 했지만 지하철을 타고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와이너리에 도착한 클라우디아와 나는 영어로 진행되는 투어를 신청했다. 2시 정각이 되자 사람들이 스물스물 나타났다. 


가이드는 (역시나!) 아르헨티나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왜 칠레산 와인이 아르헨티나산 와인보다 뛰어난지에 대해 한참 동안 설명해 주었다. 아르헨티나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장 자신의 미각을 의심해 보라는 말과 함께. 


칠레는 지리적으로 보나 역사적으로 보나 아르헨티나와 늘 경쟁 관계에 놓여있었다. 축구 경기에서도 꼭 이겨야 하는 팀이 있다면 그건 아르헨티나라고 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생각은 다를 수 있지만)



투어는 밭에서 수확한 포도가 한 병의 와인으로 만들어지기까지- 전 과정을 볼 수 있게 진행되었다. 어떤 환경에서 좋은 포도가 나올 수 있는지 - 어떤 과정을 통해 훌륭한 와인이 만들어지는지 등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중간중간 와인을 한잔씩 줬는데 숙성 단계에 따라 맛이 제각기 달랐다.  


맨 처음은 포도 주스 같았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와인 특유의 달콤하고 텁텁한 맛이 났다. 투어에 참여한 사람들은 보통 한 두 모금씩 맛보고 다음 단계로 이동했다. 단계 별로 맛이 어떻게 다른지를 궁금해했지 취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배가 고팠던 나는 주는 족족 빈 잔을 내려놓았다. 가이드가 흐뭇해하며 더 따라 줄 때도 있었다. 칭찬을 받으니 더 마실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10잔 가까이 마시니 기분이 좋아졌다. 취한다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모든 게 다 좋았다. 지하철을 타기 전까지. 




지하철을 타니 갑자기 취기가 올라왔다. 생각해 보니 점심도 거르고 빈속에 마신 술이었다. 우리가 지하철을 탔을 때는 퇴근시간이 다 된 시점이었다. 지하철은 퇴근하는 산티아고 시민들로 붐볐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10잔을 다 받아 마신 게 문제였을까, 마지막에 사진을 찍겠다며 드넓은 포도밭을 뛰어다녔던 게 문제였을까. 분명 안 취했다고 생각했는데- 왜 취기는 지하철 안에서 찾아왔던 것일까. 


(몇 번 쓰러진 것도 경험이라고) 나는 내가 쓰러지기 전 상태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얼굴이 하얘지고 몸이 차가워지면서 머리가 핑 도는 느낌. 그런 느낌이 들면 어김없이 정신이 딱 끊기고 자리에 쓰러진다. (이때 빨리 탄산음료를 마셔주면 쓰러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는 칠레고, 지하철 안은 퇴근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콜라, 사이다 같은 건 찾아볼 수도 없었다. 손발이 점점 차가워지고 몸에서 수분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여긴 아니야. 여기서 기절하면 진짜 답도 없어'라는 생각으로 정신 줄을 붙잡고 있는데 - 아니나 다를까 클라우디아가 괜찮냐며 계속 내 안부를 살폈다. 말을 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다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사람 한 명 더 태울 수 없어 보이던 만원 지하철 안. 그곳에 나를 중심으로 커다란 공간이 생겼다. 다행히 바로 정신이 들었다. "괜찮아요? 앰뷸런스 불러줄까요?" 칠레 사람들이 나를 부축해줬다. 놀란 클라우디아의 얼굴도 보였다. 괜찮다고 말했지만 앉아있던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기에 앉으라고 소리쳤고 - 서있던 사람들은 내 이마에 손을 갖다 대거나 팔을 주물러줬다.


'이렇게까지 할 일 아니에요. 저 술 취해서 쓰러진 거예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나를 의자에 눕히려고까지 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정거장에 내려야겠다.' 아파서가 아니라 산티아고 지하철에 누워 목적지까지 가는 경험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클라우디아와 산티아고의 한 지하철 역에 내리게 되었다. 플랫폼 벽에 기대 가만히 앉아있으니 속도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클라우디아는 플랫폼 어딘가에서 콜라를 사 왔다. 



"이제야 얼굴색이 돌아오네." 클라우디아가 한숨 놓인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브런치를 시작하기 전, 그동안 어떤 나라와 도시들을 여행했는지 종이에 한번 적어본 적이 있다. 23개 국. 100개 정도의 도시. 어느 한 곳 빠짐없이 아름다웠고, 각자 고유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 나라를 제외하고는) 또 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지는 건 다른 경험이었다. 내게 그건 도시의 분위기나 건축물, 아름다운 자연경관, 역사나 문화 등에서 오는 게 아니었다.



사람들. 


내가 사랑에 빠졌던 나라들을 생각해 보면 어김없이 위기의 순간 나를 구해준(?) 사람들이 있었다. 브라질과 칠레에서 나는 위기가 있었고 - 옆에는 늘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

난 여전히 사랑이 뭔지 잘 모른다. 의미도, 정의도 너무 많을뿐더러 다 제각각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아는 것도 있다. '내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 그건 누군가가 (이것 밖에 안 되는) 나를 위해 온 힘을 다해 도와줄 때. 그 모습을 볼 때. 나는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게 가족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도시든 간에 - 나는 그때부터 더 이상 관계 안에서 의미를 찾지 않는다. 그냥 이유 없이 사랑해 버린다. 모든 걸 던진다. 


어떻게 보면 사랑이라는 감정은 엄청 대단하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작은 사건에서 비롯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에서 쓰러지고 난 뒤, 산티아고라는 도시가 내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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