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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팡동이 Aug 30. 2021

영국 왕자의 결혼식과 빈 라덴

산티아고, 칠레



영국 왕실 이야기를 좋아한다. 생각이 많아질 때는 영국 왕실 비화나 다큐멘터리, 그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들을 본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다 보면 잡념이 사라지고 재미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칠레에 가기 전까지 나는 영국 왕실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냥 그곳에 여왕이 있고 여왕의 가족들이 살고 있다는 정도? 하지만 칠레를 여행하고 나서부터 이 사람들의 이야기에 커다란 흥미를 느끼고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유독 한국을 떠나 있을 때 커다란 뉴스들을 많이 접하는 기분이다. 감각이 더 예민해져 있어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고, 정말 그런 커다란 일들은 내가 한국을 떠나 있을 때만 생기는 것일 수도 있고. 일상을 박차고 나가는 순간 세상 또한 격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니까 

윌리엄 왕자 결혼식과 빈 라덴의 죽음. 

남미를 여행할 때는 이 두 사건이 있었다. 


장차 왕이 될 인물의 결혼과 역사상 가장 큰 현상금이 걸렸던 인물의 죽음. 나는 이 두 뉴스를 모두 칠레, 산티아고에서 접했다. 



남미 사람들은 미인 대회나 먼 나라의 왕실 이야기 같은 것들을 축구 경기만큼이나 좋아한다. 한일전이 열릴 때면 치킨을 사들고 삼삼오오 모이는 한국인들처럼 남미 사람들은 미인대회와 유럽 왕자의 결혼식 같은 행사들을 그렇게 소비한다. (어딘들 안 그러겠냐만은) 그들은 통속적인 이야기에 유난히 열광한다. 사랑, 불륜, 추문, 거짓말, 음모와 배신 등. '삶에서 이런 것들을 제외하면 남는 게 뭐가 있어?'라고 되려 내게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내가 영국 왕자의 결혼식을 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 당시 칠레에 있어서였다. 그날, 클라우디아가 음식까지 준비해 가며 친구들을 집에 모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까지 영국 왕실에 대해 잘 알지 못하겠지. 



빈 라덴의 죽음을 알게 된 건 산티아고의 한 슈퍼마켓에서였다. 물건을 계산하기 위해 줄을 길게 서 있는데 빈 라덴 최후의 모습이 담긴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굉장히 자극적인 사진을 이렇게 1면에 싣는구나' 생각했고 - 자꾸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 깊이 무언가가 꿀렁대는 것 같았다. 갑자기 10년 전 그날이 생각났다. 


2001년 나는 중학생이었고  담임 선생님은 아침 조회 시간에 기자재를 열어 911 테러 장면을 보여주셨다. 커다란 빌딩으로 비행기가 돌진하는 장면과 사람들이 떨어지는 장면. 시민들이 대피하는 장면 같은 것들이었는데 정말 몇 장면만 생각나고 나머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비현실적인 장면들은 사고와 감정을 마비시킨다.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뒤, 산티아고에서 보게 된 빈 라덴의 죽음. 갑자기 멀미가 났다. 



모든 게 한 편의 동화처럼 느껴졌다. 결국 악인은 죽고 왕자와 공주는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로 마무리되는 그런 동화.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고 듣고 싶어 하는 뻔하디 뻔한 이야기들. 


사람들은 왜 이렇게 동화 같은 이야기에 열광할까. 

왜 이토록 동화 같은 세상을 꿈꿀까.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면 결국 보상받는다는 결말 때문에? 현실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논리로 설명 가능한 유일한 세계라서? 잘 모르겠다.



여전히 윌리엄 왕자와 빈 라덴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면 산티아고라는 도시부터 생각이 난다. 영국과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칠레라는 세 나라가 한 묶음처럼 내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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