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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Journey Apr 11. 2021

황후의 전담 패커가 만든 명품 ,루이비통

루이비통은 3초마다 볼 수 있는 가방으로 유명했다. '3초 백'이라는 별명은 루이비통 앞에 붙는 수식어였다. 그만큼 루이비통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 명품시장은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고 있고,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명품은 루이비통이다. 명품을 잘 모르는 사람도 루이비통은 들어봤을 것이다. 루이비통은 세계적으로도 럭셔리 부문에서 브랜드 가치가 가장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인기와 더불어 루이비통은 짝퉁(imitation, 가품)이 가장 많은 명품이기도 하다.


스피디 가방 <출처: 루이비통>


흔히 '3초 백'으로 불리는 가방은 '스피디' 백이다. 1930년대 디자인된 것으로 오드리 헵번이 즐겨 들었던 가방이다. 흑백사진 속에서도 명확하게 보이는 모노그램이 그녀의 미모만큼이나 시선을 사로잡는다. 90년 전에 세상에 선보인 가방인데도 촌스러운 느낌이 들지 않는다.


좌: 루이비통 스피디 가방과  오드리 헵번


루이비통 브랜드는 트렁크에서 출발한 브랜드이다. 루이비통은 프랑스 산골마을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목수의 꿈을 갖고 살다가 14살 때 고향보다 더 큰 파리에 가겠다는 집념이 인생을 바꿨다. 1835년도에는 대중교통도 발달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루이비통은 걸어서 1년 만에 파리에 도착한다. 꿈에 그리던 파리에서 짐을 싸는 일을 시작했다. 당시 부유층들은 여행을 즐겼고 가방가게에서 짐을 싸는 일도 해주었을 시기다. 루이비통은 옷을 구겨지지 않게 트렁크 안에 짐을 싸는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왕실에서도 루이비통의 짐 싸는 실력을 인정했다. 외제니 황후는 루이비통을 전담 패커(Peaker)로 임명했다. 루이비통은 30살이 넘은 나이까지 왕실에서 황후의 짐을 싸는 일을 했는데, 그의 재능과 가능성을 높이 평가한 외제니 황후는 루이비통에게 가게를 열도록 후원해줬다.



당시 교통수단의 발달로 여행을 가는 부유층들이 늘어나고 있었고, 1854년 루이비통은 자신의 이름을 건 여행 가방 가게를 열었다. 루이비통은 기존의 윗부분이 볼록한 트렁크의 불편함을 느끼고 평평한 모양으로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세계 최초의 사각 트렁크이다. 윗부분이 평평한 사각형 모양의 트렁크는 짐을 쌓아 운반하기도 편리했다.


루이비통도 가족경영으로 이어지는데, 1859년에는 아들인 조르주 비통에게 가업을 물려줬다. 지금도 짝퉁이 가장 많은 명품은 루이비통이지만 1850년대에도 가품 때문에 골치를 겪었다. 조르주 비통은 모조품을 방지하기 위해 1872년에는 줄무늬 트렁크를 내놓았지만 여전히 짝퉁 가방이 생겨났다. 고심 끝에 1888년에는 다미에 패턴을 개발했다. 다미에(Damier)는 프랑스어로 '체크무늬'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바둑판 디자인이 특징이다.


좌: 다미에 에벤느/ 우: 다미에 아주르  < 출처: 루이비통>


지금도 루이비통의 시그니처 패턴 중 하나인 다미에는 모조품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소용없었다. 당시에도 귀족사회의 사치 문화의 영향으로 루이비통은 비쌌기 때문에 저렴한 가품을 사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조르주 비통은 아버지의 이름, '루이비통(LOUIS VUITTON)'에서 'L'과 'V'를 따서 LV와 꽃과 별을 형상화한 문양이 조화를 이루는 모노그램을 개발했다. 모노그램은 아름다운 루이비통의 상징적인 패턴으로 남아있다. 조르주 비통은 모노그램을 상표등록까지 해서 모조할 수 없는 절차를 밟았다.


모노그램, 1896년 <출처: 루이비통>


조르주 비통은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다양한 트렁크들을 만들었다. 침대 트렁크, 타자기를 넣을 수 있는 트렁크, 티세트를 즐길 수 있는 트렁크, 책을 보관할 수 있는 트렁크 등 다양한 종류의 트렁크를 개발했다. 고객의 니즈를 고려하여 충분한 만족감을 줄 수 있었다. 세계 최초의 사각 트렁크의 명성답게 내구성도 튼튼하기로 유명했다. 조르주 비통은 실제 내구성을 테스트하기 위해 사막을 횡단하기도 했다.



루이비통의 트렁크는 튼튼하고 내구성까지 좋은 가방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방수가 되어 있는 모노그램 캔버스는 가죽보다 여행가방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했다. 가죽은 비를 맞으면 물을 흡수해서 무거워지지만 방수 코팅된 원단은 기상여건의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너무 딱딱한 방수 코팅된 캔버스는 트렁크 이외의 가방을 만들기에는 부적합했다.


조르주 비통의 아들, 가스통 루이비통은 부드러운 모노그램 캔버스를 만들기 위해 연구한 끝에 소프트한 모노그램 캔버스를 개발하는 데 성공한다. 1932년 출시한 '노에'가방은 루이비통의 첫 번째 소프트 백이다.  노에 가방은 샴페인 제조업자가 샴페인 5병을 담을 수 있는 튼튼한 가방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하여 만들어진 가방이다.


노에 가방 <출처: 루이비통>


루이비통 브랜드의 창업주는 세계 최초의 사각 트렁크를 만들었고, 조르주 비통은 현재까지 루이비통의 시그니처인 다미에 패턴과 모노그램을 선보였다. 1대와 2대에 이어 3대인 루이비통의 손자, 가스통 루이비통은 소프트 백까지 개발하게 된다. 루이비통 가문의 발명은 가스통 루이비통의 아들, 클로드 루이비통까지 4대로 이어진다. 클로드 루이비통은 아버지가 만든 소프트백보다 더 부드러운 원단을 개발했다. 1959년 면처럼 부드러운 모노그램을 내놓았다.


김연아를 위한 스케이트 트렁크


2012년에는 김연아를 위한 스케이트를 담을 수 있는 트렁크를 만들어줬다. 피겨여제 김연아만을 위한 맞춤으로 제작된 것이다. 진귀한 트렁크는 2013년 경매에서 3,400만 원에 낙찰됐고, 경매 수익금은 전액 유니세프에 전달됐다.


루이비통은 항상 꽃길만 걸었던 것은 아니다. 3초에 한 번씩 볼 수 있는 가방이라는 흔한 느낌으로 전락했고 올드한 브랜드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가족경영의 위기 속에 베르나르도 아르노 회장이 이끄는 모에 헤네시 그룹에 편입되면서 LVMH로 다시 태어났다. LVMH는 'Louis Vuitton'과 'Moët & Chandon', 'Hennessy'와 합해져서 만들어졌다. 1987년 LVMH가 출범했고 루이비통에 1997년부터 마크 제이콥스가 아트 디렉터로 오면서 젊은 감각을 가진 명품 브랜드로 도약하기 시작했다.


의상 트렁크, 1875년


올해 167주년을 맞는 루이비통은 니콜라 제스키에르와 버질 아블로까지 트렌디한 아트 디렉터와 함께 혁신적인 명품으로 성장하고 있다. 명품 제국 LVMH의 상위 매출을 차지할 정도로 루이비통의 비중이 크다.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파리까지 걸어서 왔던 루이비통의 열정. 14살에 집을 나와 짐을 싸는 패커로서 일을 시작하여 외제니 황후의 전담 패커로 왕실에서 일을 하기도 다. 황후의 후원으로 본인만의 가게를 가지게 된 건 그의 나이 33세였다.


루이비통의 아들, 조르주 비통이 만든 다미에 패턴과 모노그램은 루이비통의 아름다운 시그니처로 남아있다. 그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실행시킨 장본인이다. 침대 트렁크와 의상 트렁크를 비롯하여 티세트 트렁크 등등 창의적인 트렁크를 개발했다. 아버지, 루이비통이 만든 세계 최초의 사각 트렁크를 기반으로 끊임없이 노력하며 개발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루이비통의 손자, 가스통 비통은 두꺼운 모노그램 캔버스를 부드럽게 만드는 데 성공하면서 루이비통의 첫 번째 소프트백 '노에'를 선보이기도 했다. 4대인 클로드 루이비통은 더 부드러운 원단을 개발하면서 지금까지 다양한 디자인의 가방을 만들 수 있었다.


루이비통은 가문에 의해 끊임없이 발명과 노력을 소홀히 하지 않았지만, 가족경영의 한계에 부딪혀 LVMH에 편입되어 세계적인 명품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더 큰 세상을 보기 위해 프랑스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파리까지 걸어서 갔던 창업주의 집념이 없었다면 지금의 브랜드는 없었을 것이다. 짐을 싸는 능력을 인정받아 황후의 도움으로 본인의 이름을 내건 가게를 열면서 루이비통은 지금까지 최고의 명품 중 하나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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