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대학원 적응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수업시간의 과제를 바탕으로 인간관계에 대해 배우고 읽고 느낀 것을 공유하고 있어요~
아기의 죽음본능은 타고나는 것
멜리니 클라인은 아기가 태어날 때부터 죽음본능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전제한다. 그리하여 죽음본능을 외부 세상에 끊임없이 투사하고 내사하는 과정을 통해서 세상에 대해 인지한다는 시각은 상당히 흥미롭다. 클라인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아기의 심리적 상황에 대해 상상하고 표현했는데 처음엔 굉장한 판타지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으나 우리가 아기에게 네 마음이 어떤지 직접 물어보지 못하는 한 그것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아마도 아기는 엄마의 자궁 안에서 완전하게 편안하고 극도로 안전했을 것이다. 그런 엄마의 자궁 속에서 나와보니 엄청난 혼란을 겪고 태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충동(죽음본능, 소멸 충동)을 느낀다. 죽음 본능은 출생 이후의 삶을 파괴하고자 하는 본능으로 내면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충동을 견디지 못하고 외부에 투사한다. 실은 내가 나를 파괴하고 싶으나 이를 견디지 못하고 세상이 나를 파괴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이것이 박해불안이다) 이로써 외부세상은 아기에게 나쁜 것으로 변한다. 그리고 투사 후에 경험하는 것을 다시 내사하고 이러한 투사와 내사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대상(세상)을 더욱 정교하게 이해한다고 본다.
자신의 삶을 파괴하고자 하는 파괴성을 견디지 못해 외부로 투사하고 또한 외부 세계에 대한 경험을 내사하면서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세상이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 클라인의 설명인데 그녀의 상상력이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막 태어난 아기에게 어떤 마음인지직접 물어볼 수는 없지만 과연 아기는 세상으로 갑자기 내던져진 상태에서 클라인이 말하는 것처럼 엄청난 불안(박해불안)을 겪는 것이 사실일까?
우리는 사춘기 때 한 번쯤 엄마에게 반항을 하느라고 ‘그래서 누가 나를 낳으라고 했어? 내가 낳아달라고 했어?라고 되물으면서 엄마 마음을 속상하게 한 적이 있는데(나만 그랬나?!) 나는 가끔 인간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상에 피투 된 존재라는 것을 생각할 때 클리안이 주장한 박해 불안이라는 것이 그것이 아닌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태어난 이상 살아야 하는데 세상은 온통 어렵고 힘든 것, 쟁취해야 하는 것, 경쟁하고 남을 딛고 일어서야 하고, 심지어 나를 이용하려고 하거나 해하려고 하는 나쁜 사람들도 있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것들 투성이다. 이런 험난하고 무서운 세상이 나를 힘들게 할 것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파괴성을 밖으로 내던지지 못하면 살기 어려우니 세상(외부 세계, 남 탓) 탓을 하게 된다. 다 나를 낳은 엄마 탓이라고, 공정하지 못하고 경쟁적인 불합리한 세상 탓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살다 보니 꼭 그렇게 나쁜 세상은 아니더라. 나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더라. 어쩔 수 없이 태어나서 존재하고 있지만 좀 더 즐겁고 의미 있게 세상을 살아도 되겠구나를 느끼게 되는 것, 통합된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심리적 건강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박해불안이라는 것은 어쩌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게 되는 실존적 불안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쩔 수 없이 인간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이 세상에 던져진 이상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그런 두려움 말이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삶이라는 과정일 것이고 이런 면에서 클라인의 의견은 퍽 설득력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편집-분열에서 우울로 나아가는 인간발달 과정
아기가 태어나면서부터 스스로 살기 위해 방어기제인 투사와 내사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우는데 스스로 이 모든 것을 해낼 수는 없다. 아기에겐 결국 좋은 돌봄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 세상이 나를 헤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줄이고 세상에 대한 보다 긍정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클라인의 본능적인 충동 개념은 생리적인 욕동이 아니라 신체적 수준에서 경험되는 희망과 두려움과 소망이며, 모든 내면의 움직임은 그것이 욕망이든 파괴성이든 대상(타인)과 연결되고자 하는 욕구임을 감안해야 한다. 그렇다면 아기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고, 나쁜 것도 항상 나쁜것이 아니라는, 적절한 통합이 가능하게 해 줄 대상이 될 것이다.
나의 관점에서 볼 때, 클라인의 주요 이론의 핵심은 자신의 내재한 그리고 이를 투사하는 공격성(파괴성)과 이로 인한 죄책감(죄책감의 승화)인 듯하다. 아기는 스스로 살아내고자 타고난 죽음본능을 투사하는데 처음부터 어느 한 대상이 좋고 나쁘고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없어서 처음엔 무조건 좋거나 혹은(or) 나쁘다고 믿는다. 이것이 아기의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아기는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 외부 세상은 온통 위험한 것 투성이며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공격성(죽음본능)을 투사하고 그에 대한 반응을 내사한다. 투사와 내사를 통해 점점 대상이 항상 나쁘기만 하거나 좋은 것이 좋기만은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내가 박해했던 대상이 실제로 나를 사랑하고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람임을 깨닫고 충격(공포)과 죄책감을 갖는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우울불안이다. 아기는 자신의 분노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데, 아기는 자신의 분노(박해불안에 저항하는 내면의 공격성)를 외부로 향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대상을 잃을까 봐) 자신의 내부로 향하게 하고 이기적이고 나쁘다는 이유로 자신을 질책한다. 이것이 우울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분노와 욕구들은 아이의 행동과 관계 그리고 외부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그 영향이 가져올 결과에 대한 두려움으로 모호한 원망과 죄책감과 불만족을 경험한다.(우울한 사람의 무기력한 모습을 상상하면 쉽다.) 하지만, 이러한 죄책감의 고통은 새로운 복구를 가능하게 한다. 분노가 손상을 주지만 사랑이 손상을 복구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아이가 박해와 상실, 죄책감, 복구의 경험을 반복적으로 겪어내고 이 과정은 좀 더 성숙하고 자기와 타인에 대한 인식도 향상시킬 수 있다. 만약 아기가 상실과 분리와 타협할 충분한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면 자신의 파괴력의 한계와 복구하는 사랑의 힘이 주는안전감에 대한 지식을 발달시킬 수 없다.
클라인 이론에서 심리상담의 목적은 우울한 존재 양식을 좀 더 안전하게 확립하는 것을 돕는 것이다. 자신의 평범함과 부족함을 인식하고 수용하면서도 혐오와 경멸의 감정으로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 것, 이러한 겸허함은 우울적 양태가 갖는 핵심적 특징이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의 우울을 완전히 떨쳐버리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인간은 원래 불안하고 우울한 존재가 아닌가. 클라인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그 우울을 견딜만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이며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성숙임을 이야기한다. 나와 타인에게 존재하는 부족함을 견디는 것, 이해하는 것 그리하여 수용할 줄 아는 것 말이다. 우리도 내 안에 견디지 못하는 많은 부족함들이 있다. 이것은 때로 남을 판단하는 잣대로 둔갑하기도 한다. 그것은 성격, 외모, 돈, 학벌, 가정환경 등 무수히 많을 것이다. 클라인의 지혜를 빌려 생각해 보자면,평범함을 넘어 부족한 내 안의 모습을 인지하고 감당할 줄 아는 능력,이를 바탕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능력이야 말로 진정한 성숙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자기 대상
내가 이해한 바로는 클라인이 주장한 아기의 죽음본능 역시 결국은 관계를 맺고자 하는 또 다른 욕구의 발현이다. 대상의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분리시키고자 하는 것은 좋은 면을 가진 대상을 내 안에서 유지시켜야 불안을 잠재우고 대상(세상)과 함께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한때 통합되지 못하고 분열되어 좋거나 혹은 나쁘거나 둘 중 하나만을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다. 사랑하던 사람이 내게 잘못을 했거나 나를 서운하게 했으면 그 사람은 무조건 나쁘다. 더 이상 만날 가치가 없다. 더는 안 봐도 뻔하다는 식으로 매몰차게 인연을 끊어버리려고 했다. 어린 시절 친구와 싸우고는 ‘나는 한 번 아니면 아니야.’를 외치며 내게 상처 준 친구에게 결별을 고한 적이 있다. 중학교 때도 한번, 고등학교 때도 한 번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고 유치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생각해 보면 철저하게 투사를 했던 것 같다. 내가 싫고 역겨운 데, 나를 힘들게 하고 상처를 주는 사람은 상대가 아니라 나인데 내 감정을 투사하고(나를 싫어하는 건 너잖아!) 나를 보호하려고 그만 상대를 매몰차게 밀어냈다. 이러한 관계 패턴이 성인 초기에도 나타났던 것인데 여전히 나의 의식이 어리고 미성숙했다. 그러나 나를 아껴주던 상대방은 나보다 훨씬 성숙했던 사람이었는지 나의 분열된 마음을 어루만지고 보살피어 내 마음이 점점 분열에서 통합이 되도록 도와주었다. '모 아니면 도'라는 식의 사고방식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리고 ‘모두가 다 완벽하지는 않지, 누구나 실수를 해.’라는 방식으로 나를 수용하고 세상을 좀 더 여유로운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나 스스로 해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세상은 그리 녹록지가 않은 것 같다.
생에 초기 아기가 편집-분열적 자리에서 우울적 자리로 나아갈 때,우울적 자리에서 자신의 죄책감을 보다 건강한 방식으로 소화하고 승화시키려면 좋은 엄마의 도움이 필요하듯이 우리가 지금 꼭 아기의 단계가 아니라 하더라도 인생의순간순간에도 좋은 대상이 필요함을 느낀다. 그 대상이 부모이거나 형제이거나 친구이거나 혹은 배우자이거나 상관없이 말이다.
내가 힘들어 축 쳐지고 찌그러져 있을 때 누군가 나를 일으켜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기를 소망한다. 내가 친밀하다고 느끼는 누군가가 나를 좀 더 견뎌주고 참아주고 버텨주면서 나를 좀 더 끌어올려 주길 바랄 때가 있는데 어쩌면 우리는 평생 동안 이런 욕구를 가지고 살아가는지도 모르고 이것을 얻기 위해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 역시도이런 마음으로 아이를 대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내게도 이런 대상이 필요하듯이 아이에게도 그러한 대상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에!
사춘기 아이가 내게 이유 없이 버럭 짜증을 내거나 문을 쾅 닫고 들어가거나 밥을 먹지 않아 엄마인 나를 속상하게 해도 좀 더 성숙하고 어른 된 마음으로 아이의 공격적이면서도 우울한 마음을 견뎌주려고 한다. 내가 그 아이의 고뇌를 느끼면서 버티면 그 아이는 내게 아까는 짜증을 내서 미안했다고, 자신을 케어하느라고 엄마가 바빠지면 미안하고 그 미안한 마음이 그만 잘못 튀어나왔다며 사과를 하는 아이를 만나게 된다. 클라인의 이론으로 말하자면, 아이는 편집 -분열적 자리에서 자신의 파괴성(공격성)으로 엄마는 나쁘다고 분열되었다가 자신의 우울적 자리에서의 자신의 공격성에 대한 죄책감을 알아차리고 표현한 것이다. 아이는 자신의 공격성을 투사하였지만 그럭저럭 좋은 엄마의 반응 경험을 내사한다. 그리고 죄책감의 고통은 복구될 수 있다. 아이가 엄마에게 받았던 심리적인 버팀목(투사와 내사의 환류적인 경험이 보다 수용적인 방향으로 자리잡을 때)으로 자신을 좀 더 알아차리길 바라본다. 자신을 수용하는 마음을 기저에 두고 타인도 전부를 이해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지라도 조금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성숙하고 안정된 개인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본다. 나 역시도 그러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