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슨니 Jul 08. 2021

피조물의 물음

인간은 신에게 확신을 원하지만 신은 인간에게 깨달을 수 있는 상황을 제시할 뿐이다. 그것이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이고, 인간은 그 갈래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 수많은 갈래길 속에서 인간은 신을 안다고 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길 잃음의 기준 또한 숲이 아닌 나무를 보는 인간의 한계다. 그 거대한 빅픽처는 어떻게 그리는 건지 모르겠는 신만이 이해한다. 특출나고 뛰어난 신을 알기엔, 인간은 신의 쥐꼬리만한 구조에서 생각하고 있다.


어디에 계십니까, 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십니까와 같은 질문 내지 반항은 “여기에 계셔야죠”, “여기서 해결해주셔야죠”의 부르짖음이다. 인간이 세상에서 하고픈 심보는 다 부려놓고, 신보고 해결하라는 내로남불은 내가 신이라면 억울할 것 같다. 지들 맘대로 할땐 언제고, 이제와서 신 보고 치우래. 그건 신이 땅에 왔을때 신에게 정치적으로 끝내주는 이가 되어달라 부탁했던 것과 다를바가 없지 않을까. 어떻게 생각하시냐, 무엇을 하실 거냐, 방법을 먼저 묻진 않고 인간의 방식을 갖다대는 것. 참으로 자기중심적이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억울함과 이해할 수 없는 부르짖음 속에, 당장에는 부르짖음이 신에게 가닿지 않을 것 같기까지한 나날이지만, 신은 열심히 귀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인간에게 기도라는 선물도 주시지 않았나. 거리를 유지하고 지켜보는 게 더 힘들법도 한데, 인내하고 기다리면서 인간을 보고있다. 그것만큼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일도 없는데 말이다. 누군가가 힘들 때 인간은 자신이 편하자고 서툰 조언이나 위로를 건넨다. 하지만 신은 그저 묵묵히 있는 편을 택한다. 그러나 인간이 느끼는 고통을 그대로 느끼며 인간이 방 안에서 내쉰 한숨 소리까지도 듣고 계실 테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내게 깨닫게 한 신이 세상을 빚은 분이라면, 반드시 그럴 테다. 사랑의 개념을 만든 이가 주는 사랑은 헤아릴 수록 깊어지는 법이다. 아무렴, 그렇고 말고.

이전 09화 모방의 연대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