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신에게 확신을 원하지만 신은 인간에게 깨달을 수 있는 상황을 제시할 뿐이다. 그것이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이고, 인간은 그 갈래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 수많은 갈래길 속에서 인간은 신을 안다고 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길 잃음’의 기준 또한 숲이 아닌 나무를 보는 인간의 한계다. 그 거대한 빅픽처는 어떻게 그리는 건지 모르겠는 신만이 이해한다. 특출나고 뛰어난 신을 알기엔, 인간은 신의 쥐꼬리만한 구조에서 생각하고 있다.
어디에 계십니까, 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십니까와 같은 질문 내지 반항은 “여기에 계셔야죠”, “여기서 해결해주셔야죠”의 부르짖음이다. 인간이 세상에서 하고픈 심보는 다 부려놓고, 신보고 해결하라는 내로남불은 내가 신이라면 억울할 것 같다. 지들 맘대로 할땐 언제고, 이제와서 신 보고 치우래. 그건 신이 땅에 왔을때 신에게 정치적으로 끝내주는 이가 되어달라 부탁했던 것과 다를바가 없지 않을까. 어떻게 생각하시냐, 무엇을 하실 거냐, 방법을 먼저 묻진 않고 인간의 방식을 갖다대는 것. 참으로 자기중심적이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억울함과 이해할 수 없는 부르짖음 속에, 당장에는 부르짖음이 신에게 가닿지 않을 것 같기까지한 나날이지만, 신은 열심히 귀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인간에게 기도라는 선물도 주시지 않았나. 거리를 유지하고 지켜보는 게 더 힘들법도 한데, 인내하고 기다리면서 인간을 보고있다. 그것만큼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일도 없는데 말이다. 누군가가 힘들 때 인간은 자신이 편하자고 서툰 조언이나 위로를 건넨다. 하지만 신은 그저 묵묵히 있는 편을 택한다. 그러나 인간이 느끼는 고통을 그대로 느끼며 인간이 방 안에서 내쉰 한숨 소리까지도 듣고 계실 테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내게 깨닫게 한 신이 세상을 빚은 분이라면, 반드시 그럴 테다. 사랑의 개념을 만든 이가 주는 사랑은 헤아릴 수록 깊어지는 법이다. 아무렴, 그렇고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