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하고, 모방당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삶
결국 인간의 삶은 모방으로 시작해서 모방으로 끝나는 게 아닐까 싶다. 이게 무슨 말이냐 싶겠지만, 밑에 길게 나열할 모든 문장을 읽고 나면 “아, 이게 한 마디로 정리한 거구나”싶을 것이다.
사회복지 공부를 하며, 여러 실천 기술, 강화 기술 등 일상생활 속에서 이미 알게 모르게 행동하고 있지만 사회복지 현장에서 적용 가능하여 일명 ‘정의’된 것들이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었는데 몇 가지 더 있지만 가장 꽂혔던 것이 바로 ‘모방’이었다.
누군가의 삶의 태도나 행동, 단어의 선택, 가치관, 지향점 등 이전까지 내 안에서 ‘그 사람을 닮고자’하는 마음을 정의할 수 없어 그저 문장으로 남겨둔, 하지만 이미 나는 그 삶을 따라가고 있는 자취를 정의해 준 것이 바로 ‘모방’이었다.
생각이란 걸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인지하기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모방하기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사실 이전부터 나는 가족 혹은 지인들의 삶을 이미 모방하며 살아오고 있었고, 때로 모방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가장 큰 부분은 가족이나 환경과도 같은 것들이다.
알게 모르게 모방된 우리네 삶을 비춰보는 건 쉽다. 인간이 언어를 배우게 되는 과정, 지역마다 다른 사투리를 자연스럽게 터득해가는 과정, 입맛, 사람이나 가족을 대하는 방법 등. 생각해보면 첫 번째로 ‘사회화’를 배우게 되는 건 양육자를 통해서고, 그 이후로 경험하게 된 커진 사회에서 나를 부풀려 가며 살아가기 마련이니, 현재 삶의 형태가 주된 환경에서 모방된 것들을 쉬운 기저로 사용하고 있을 가능성도 높을 수밖에 없다.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변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순 없지만.
지금의 나는, 닮고 싶은 누군가를 마주했을 때 상대를 모방하고자 하는 욕구에 거리를 두려 노력하곤 한다. 내 안에 라떼가 움직인 까닭에, ‘저번에 그랬을 때 너를 잃는 걸 느끼지 않았느냐’고 시전 하는 탓이다. 아무렴 다른 라떼보다 혼자서 시전 하는 라떼는~이 가장 뜨겁고, 가장 무서운 법이다.
그러나 여전히 모방 아래 사는 나는,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동생들에게서 ‘말투가 차가워졌다’는 소리를 듣곤 한다. 나쁘게 듣진 않았지만 변화를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어 고마움 반, 필요한 말만 한 게 냉랭함으로 받아들여졌다니 대체 이전엔 얼마나 불필요한 특수문자들을 나열했던 건가 싶어 민망한 마음이 눈앞을 가렸다.
모방하는지 몰랐던 시절에서, 모방에도 때로 선택권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 얼마 전, 그리고 모방에서마저도 주체성을 잃지 않겠다고 고군분투하는 지금의 모습 모두, 모방에서 완전히 자유하지 않은, ‘주어진’것에서 만족감을 얻어야 하는 자유롭지 않은 몸이다. 하지만 그게 속박을 낳는다고 느껴지진 않는다.
모방으로 시작된 삶은 앞으로 무얼 모방해 나갈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좋은 영향력을 미치고 싶다는 건 어쩌면 인류 공통의 욕구가 아닐까. 어쩌면 때론 욕망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기에, 많은 것들이 급변하는 나이인 이 시점에서 누군가에게 옳고 그름의 가치 판단이건, 좋고 나쁨의 인식의 흐름이건 내보이기란 쉬운 듯 더욱 쉽지 않게만 느껴진다. (이 글마저도 그런 거려나)
나름의 확신이 서는 부분에는 이야기 꺼내기를 덜 두려워하지만, 나도 여전히 무언가를 모방 중에 있고 이런 내가 누군가에게 ‘모방 대상’이 될 수도 있기에 더욱 꺼려지는 것도, 어떠한 답을 알려주고 싶지도 않은 것일 거다. 그럼에도 튀어나오는 본심 같은 것이 있어 뒤에 가서 후회하곤 하지만,,
길고 긴 글을 빙빙 돌아하는 말은 결국, 모방으로 시작하여 그 길을 걷고 있는 나란 인간의 삶이다. 그리고 감히 예언하건대 죽기까지 누군가를 닮기 위해, 그 기대치를 저버리지 않고 소망을 품다 죽을 것이라는 것도. 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사람에게 늘 중요한 건 중심성인 것 같다. 중심을 잡자, 중심을 잡자. 쥐를 잡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