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 까를로스(Jose Carlos) / 쿠바 바라코아 / 퍼커션 연주자
쿠바 섬의 동쪽 맨 끝에는 보석 같은 작은 마을, 바라코아가 있다. 반짝이는 말레꼰 해변에 앉아 바닷소리를 가만히 듣다 보면 마음속 모든 소음이 꺼진다. 쿠바의 타악기, 뚬바도라의 굵은 리듬이 파도 소리와 겹친다. 머나먼 마을에서 만난 나의 뚬바도라 선생님 호세 까를로스는 그저 이 자리에서 지금까지 그래 온 것처럼만 꾸준히 행복하고 싶다고 말한다.
쿠바는 생각보다 큰 섬이다. 아바나에서 바라코아까지 쉬지 않고 달려도 14시간. 아바나에서 트리니다드를 거쳐 산티아고 데 쿠바까지 이동했다. 산티아고에서 바라코아까지는 다시 버스로 5시간. 중남미 여행에서 장거리 버스는 숙명이라, 5시간어치의 각오를 다지고 버스에 오른다. 버스는 관타나모에서 한 번 쉬고, 해변가를 따라 쭉 달린다.
창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나무들 때문에 투명한 파랑의 바다가 감질맛 나게 보였다 숨었다 한다. 바다는 해변 가까운 쪽에서는 은회빛으로 반짝거리다가, 먼 시야로 가면 촘촘한 남색으로 변해간다. 하늘은 저 위에서부터 정직한 하늘색으로 채워지고 내려올수록 옅어진다. 진한 바다와 하얀 하늘이 만나는 곧은 수평선이 보인다.
버스 왼편이 해변이라면 오른편은 끝없는 산. 고운 산세지만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길은 멀미를 일으키는 주범이다. 때때로 멀미가 몰아치면 내가 선택한 험한 길이나 구닥다리인 차를 탓하게 되지만 사실 그래 봐야 별 소용이 없다. 그럴수록 오히려 허리를 세우고 머리를 비운 채, 멀리 풍경을 바라보는 게 도움이 된다.
곧 버스가 멈추고 우리가 내리자 어린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와르르 몰려든다. Somos pobres. 우리는 가난해요. 뭔가 달라는 듯 손을 내밀고 우리를 바라본다. 자신들의 가난에 내 책임이 있다는 듯한 표정이다. 이때 뭔가를 건네는 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 그냥 지나치면서도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숙소는 까사 콜로니얼(Casa Colonial), 테라스를 빙 둘러서 바다가 보이는 방에 머물렀다. 체크인을 마치자마자 당장의 과제인 물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마트에도 호텔에도 물을 찾을 수가 없다. 언제 물을 구할 수 있을지 몰라서 기회가 되면 5리터짜리 물을 샀는데도, 물이 떨어져 버린 것이다. 쿠바에선 다른 무엇보다 구하기 힘든 게 물이다. 신기하게도 이런 생활에 일주일 만에 익숙해져서, 눈만 뜨면 물을 찾아 나서곤 했다.
반대로 쿠바의 좋은 점이라면 싸고 흔한 랑고스타(langosta, 랍스터). 랍스터를 통으로 구워주는데 야채에 밥에 후식까지 다 해서 만원 남짓인 식사다. 쿠바에 있는 동안 1일 1 랑고스타를 하면서 사치를 부릴 수 있다. 보통은 숙소 까사에서 저녁으로 랑고스타 메뉴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
끼니를 해결하고 말레꼰으로 갔다. 다섯 시를 넘겨 햇빛이 부드럽게 옷깃을 매만지는 시간이 되면 말레꼰은 북적이며 생기가 돈다. 말레꼰 해변에는 해초도 많고 관광객들이 남기고 간 부산물도 많은데 그 가운데서 빨갛게 빛나는 돌멩이 하나가 보인다. 그 주변에 빨간 돌이 꽤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를 주워 든다. 옆에 서 있던 한 아저씨가 설명해주기 시작한다.
"그 빨간 돌은 '코아'라고 부르는데, 그 누구도 그 돌이 어디서 왔는지, 정체가 뭔지 모른답니다."
나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살아있는 생명을 대하듯이 돌멩이를 손바닥 위에 올려본다.
"이 마을의 이름인 '바라코아'는 바로 그 돌에서 나온 이름이에요."
나는 다시 손바닥 위 반짝이는 돌을 가만히 쥐어본다. 손에 꼭 맞는다.
바라코아에 오면 다들 한 번씩 해보는 체험이 있다. 뚬바도라(Tumbadora) 배우기, 유물리 마을 구경하기. 뚬바도라는 쿠바의 전통 타악기이고, 유물리는 바라코아에서 차를 타고 한 시간정도 걸리는 어촌 마을이다. 친구들과 상의해 유물리에 다녀오고 저녁엔 뚬바도라 수업을 듣기로 한다.
유물리 투어는 4명에 25쿡이라는 가격치고 알찬 구성이었다. (CUC은 쿠바에서 사용하던 외국인용 화폐로, 약 1200원의 가치였으나 2021년 폐지됨) 제일 먼저 멈춘 곳은 카카오 재배농장이다. 구매유도를 하는 게 아닌가, 경계했지만 가이드는 아무것도 사지 않아도 된다며 손을 내젓는다. 믿어보자며 안으로 들어가자 푸근한 인상이면서도 프로페셔널한 느낌을 풍기는 아주머니가 우리를 맞이한다.
반으로 쪼개진 코코아 열매들이 테이블 위에 놓인다. 열매 속 알갱이들은 우윳빛으로 하얗다. 몽글몽글하면서도 탱탱한 질감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처럼 탐스럽다. 우리의 표정을 슥 둘러본 아주머니 사장님은 '카카오 열매는 사실 까맣지 않고 하얗답니다'라며 운을 띄운다.
하얀 열매를 손으로 그러모아, 야자수 잎을 엮어 만든 체에 올려놓으면 과즙은 아래로 흘러내리고 까만 씨앗만 남는다. 맛보라며 열매를 건네주셔서 오물오물 과즙을 삼키며 계속 설명을 듣는다. 남겨진 씨앗을 불에 올려 구워내면 씨앗에 균열이 생겨 벌어진다. 커피와 코코아를 섞은 듯한 매력적인 향이 퍼진다. 이번엔 구운 씨앗을 건네주셔서 먹어본다. 바삭바삭 달콤한 카카오 향에 뒤이어서 쌉싸름한 불맛이 찾아온다.
이 씨앗을 부수어서 네모난 타블렛으로도, 야구공보다 조금 더 크고 단단한 모양의 덩어리로도 만들어낸다. 그대로 먹어도 좋고 우유에 타 먹어도 좋다. 그런데 카카오 100프로라 타블렛 하나를 다 끝내는 것도 쉽지 않을 만큼 쌉싸르한 맛이다. 이럴 수가, 단맛에 먹었던 것은 다 설탕 덩어리였구나. 가이드가 말한 대로 구매 유도는 전혀 없었지만 카카오 향기에 취해버린 우리는 온갖 카카오 버터며 열매를 바리바리 사들고 나왔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독일인의 길'. 과거 독일인이 거주하며 통행세를 받았다는 바위동굴 길이다. 그 옆으로 걸으니 해변이 보인다. 사람이 없다는 게 신기할 만큼 바다 색이 아름답다. 우리는 낯선 섬에 불시착한 기분으로 긴 모래사장을 누빈다. 모래에 글씨를 쓰고 점프샷도 찍고 나무 밑 떨어진 아몬드 열매를 열어보고 소라게를 따라서 걷다가 또 서로 목마를 태워준다. 뭐가 웃긴지도 모른 채 계속 깔깔거리며 모래 위를 굴렀다. 저 멀리 가이드가 신난 우리를 바라보며 아빠 미소를 짓고 있다. 어느새 4시가 넘어 해가 살짝 길어졌다.
다시 페달을 밟아 유물리 마을에 도착했다. 유물리 마을에 낯선 차가 와서 멈추자 현지인들이 곧 에워싼다. 50-70대로 보이는 여성들의 어깨에는 세월의 무게가 묻었고 그들의 옷은 얼룩덜룩 낡아있다. 그들은 비굴하지도 강압적이지도 않은 태도로 조곤조곤 사연을 설명한다.
"수확물이 생겨도 전부 다 정부에서 걷어가요. 그래서 저축은 꿈도 못 꾸는데, 연금은 없고. 당장 옷 하나, 수건 하나 구하는 게 너무 힘들답니다."
그러더니 혹시 옷이든지 무엇이든지 나누어줄 수 있겠냐고 묻는다. 오늘 저녁 7시에 바라코아 대성당 앞으로 가겠다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민망하다는 기색이 역력한데 동시에 벼랑 끝에 선 것처럼 비장한 표정이다. 당황스러운 제안인데 왜인지 마음이 움직였다. 연민이 아니라 왠지 모를 의무감 같은 것이 들었다.
일단 투어는 계속해야 했기에,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오른다. 초록색 티셔츠에 헐렁한 바지를 걸쳐 입은 젊은 사공이 노를 젓는다. 느리게 바깥으로 원을 그리다가 싹둑 자르듯이 노를 힘차게 잡아당긴다. 노련하다기보단 패기로 가득 찬 동작이다. 앳돼 보이는 표정이 씩씩하고 눈빛도 당차다.
배는 금세 강의 작은 섬에 닿았다. 시린 강물에 발을 담그며 배에서 내린다. 강의 양 옆으로 까마득한 높이까지 절벽이 들어서 있다. 시선을 훌쩍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는다. 숭고미가 느껴질 만큼 가파르고 날카로운 돌 절벽을 바라보며 가이드는 이 마을의 사연을 설명해준다.
"스페인 사람들이 이곳을 침략했을 때, 근처 아이티 섬에서 노예로 끌려온 사람들이 있었어요. 갑자기 노예의 삶을 살게 된 그들은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며 딱 한 마디의 말을 남긴 채 절벽에서 뛰어내렸죠."
Yo muero(요 무에로), 나는 죽는다. 그들은 이 한 마디만을 남긴 채 천 길 낭떠러지를 등졌다.
요 무에로, 그들의 마지막 말에서 '유물리'라는 마을 이름이 붙은 것이다. 읍면리로 끝나는 한국의 지명 같아서 귀엽다고만 생각했던 이름에 이렇게 간명하고 슬픈 문장이 담겨있다니. 죽음을 택할 만큼 그들에겐 자유가 소중했다. 서늘한 절벽의 꼭대기, 까맣고 날개가 큰 새가 하늘을 빙글빙글 돈다. 500년 전에 뛰어내린 이들의 유물리, 하는 외침이 메아리가 되어 맴돈다. 죽음이라는 단어만 살아남아 자유로이 하늘을 날아다닌다.
며칠 전, 쿠바의 길거리에서 본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그들은 살아있기 위해 죽었기에 죽은 것이 아니다"
자유가 없는 삶은 진정으로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고, 진정 살아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담담히 죽음을 택해서 '살아있지 않음'을 죽였던 것이다.
쿠바 리브레(Cube Libre). 내가 좋아하는 칵테일 중 하나인데, 이 말의 원래 뜻은 '자유로운 쿠바'다. 20세기 초 쿠바가 스페인 식민지로부터 독립운동을 할 때, Viva Cuba Libre(쿠바 독립 만세)라고 외쳤던 것이 칵테일 이름으로 남았다고 한다. 그랬던 쿠바는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종일 마주치는 현지인들에게 들었던 말, somos pobres(우리는 가난해요)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가난해진 사람들. 옷 가지 하나, 당장 쓸 비누와 수건조차 아쉬운 사람들. 가난은 쉽게 자유를 앗아갔다. '김미 초콜렛', 전설처럼 들었던 우리 윗윗세대의 표정이 여기에 있다. 쿠바에 자유가 어떤 의미인지 되뇌다 보면 마른 카카오 열매를 깨문 것처럼 입안이 씁쓸해졌다.
섬을 떠나 다시 강변으로 돌아온다. 알알이 쏟아지던 햇볕이 노을로 익어가는 무렵, 투명하게 내리쬐는 빛을 얼굴로 맞으며 어부촌의 해변가를 천천히 걷는다. 허리를 굽히고 자박자박 걷던 노인이 허리를 펴고 우리를 바라본다. 기저귀 하나 달랑 입은 샛꼬마 하나도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나를 올려다본다. 호의도 경계도 없는 표정으로 가만히 들여다보고는 다시 저쪽으로 총총 걸어간다. 우리 모두가 매일 낯선 별로 착륙했다 떠나는 어린왕자 같다는 생각을 했다.
투어가 끝날 무렵엔 선명한 달이 검은 바다에 흰 빛을 내리고 있다. 창문을 열고 고개를 살짝 내밀자 청량한 밤바람이 머리칼을 파고든다. 유물리 사람들을 만나 많아지던 생각들이 바람을 타고 한 겹 씻겨나간다.
뚬바도라 수업은 저녁 7시 반. 투어가 꽤 늦게 끝나는 바람에 시간이 촉박했다. 와중에 유물리 사람들 생각에 발길이 급해졌다. 쓸만한 게 있나 봤지만 배낭여행객의 가방에 대단한 물건이 있을 리 없다. 민소매 티와 수건 한 장, 양말 두 짝, 면봉 한 봉지를 챙겨 들고 바라코아 대성당 앞에 갔더니 아까 본 할머니가 기다리고 있다. 물건을 건네고 잘한 짓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는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뚬바도라 수업을 들으러 간다.
오늘 뚬바도라 수업 선생님의 이름은 호세 까를로스(Jose Carlos). 이 동네에서 알아주는 퍼커션 연주자다. 키도 덩치도 손도 다 커서 그가 다리 사이에 끼고 있는 뚬바도라가 작아 보일 정도다. 그의 까만 어깨가 전구의 노란빛을 받아 반질반질 반짝인다.
북을 치는 자세, 소리내는 법, 기본적인 리듬을 배운다. 뚬바도라는 양손을 이용해서 북을 치는데, 오른손으로 칠 때 왼손을 북에 대고 있는지 아닌지에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 왼손을 대고 칠 때가 '찬소리', 왼손을 떼고 칠 때가 '빈소리'다. 선생님 호세가 먼저 시범을 보여준다. 그의 북소리는 강하고 탄탄하고 일정한 소리로 울렸다. 빈틈없는 고수의 향기가 난다.
정확한 위치를 손으로 때리면서 리듬을 맞춘다는 게 쉽지 않다. 잠시 딴생각을 하면 박자를 놓치든지 북을 치는 위치가 빗나가기 일쑤다. 그렇지만 조금씩 손에 익어가는 감각을 느끼는 재미에 멈출 수가 없었다. 북소리에 맞춰 몸을 건들건들 흔들며 리듬을 타면 진짜 북을 칠 줄 아는 사람이 된 기분이다. 살사를 처음 배울 때 같이, 처음엔 내가 리듬을 맞추지만 나중에는 리듬이 분홍신처럼 나를 이끌고 간다.
한 시간 남짓의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이 내일도 보는 거지? 하고 묻는다. 원래는 다음날 바라코아를 떠나서 올긴으로 옮기려던 참이었다. 고민 끝에 수업을 하루 더 하기로 했다. 북 치는 게 생각보다 재밌었던 탓이다.
그렇게 생긴 아무 계획 없는 바라코아에서의 하루. 그 하루는 말레꼰에 앉아 쓰기로 한다. 말레꼰은 방파제라는 뜻의 스페인어인데, 쿠바에서 해변도로를 칭하는 고유명사처럼 쓰인다. 바라코아 말레꼰은 아바나보다 아담하지만 조용하고 평화롭다. 동쪽에서 밀려온 강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일정한 주기로 들려온다.
Marco Polo라는 바에 들어가 쿠바 리브레 한 잔을 시키고 바다 쪽을 바라보고 앉는다. 말레꼰 풍경은 좀처럼 질리지를 않는다. 차가운 파랑빛 위로 큐빅을 뿌린 것처럼 은색의 물결이 친다. 무거운 자루를 어깨에 걸치고 말레꼰을 따라 걷어오는 남자가 보인다. 짐의 무게가 고되었는지 멈춰 서더니 하얀 말레꼰 벽에 한쪽 다리를 올리고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말레꼰의 도로 위로는 다양한 교통수단이 지나간다. 마차 택시, 자전거 택시, 모토 택시, 올드카... 그중에서 재미있는 것은 단연 마차다. 이곳의 마차 택시는 비싼 관광객용 눈요기거리가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대중교통 수단이다. 아이 업은 엄마도, 나이 지긋한 노인도, 꼬마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마차에 오른다.
해가 저물고 다시 뚬바도라 수업에 갔다. 그런데 같이 수업 듣기로 한 친구들이 나타날 생각을 않는다.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고 호세와 이런저런 수다를 나누다가, 문득 인터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시간은 보내야 하고 딱히 할 일도 없으니 굴러들어 온 절호의 찬스인 셈이었다.
호세는 3살부터 음악을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그의 음악 인생은 더 어렸을 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내 피에 음악이 흐른다고 보는 게 맞겠지.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스물아홉 살인 내 동생도 모두 음악을 하고 있어. 아버지는 가수셨지. 나는 집에서, 길거리에서, 학교에서, 어디서든 음악을 계속 배워온 거야."
5살 때부터 친구들과 함께 연습했고, 중학교에 들어가자 더 큰 그룹안에서 음악을 할 수 있게 됐다. 14살 때부터는 바라코아에서 3시간 거리에 있는 관타나모에 스승님을 찾아가 퍼커션 수업을 들었다. 수업이 없는 날에는 책을 찾아보며 스스로 익혔다. 끝없는 노력 끝에 17살이 된 호세는 이미 두 개의 오케스트라 그룹에 소속된 상태였다. 점점 실력을 인정받고 다양한 연주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나게 됐다.
"내 꿈은 프랑스로 돌아가는 거야."
그는 2001년부터 1년 동안 프랑스에 머물렀다. 호세가 25살 때였다. 각양각색의 개성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며 음악을 할 때 행복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쿠바 밖의 다른 나라로 나가고 싶다는 갈증이 크다. 넓은 세상의 다른 음악가들을 만나 교류하고 음악적 지평을 넓히고 싶다는 마음이다. 하지만 쿠바 사람들에게는 쉽게 나라 밖으로 나갈 자유가 주어져 있지 않고, 그걸 호세도 알고 있다.
그는 현재 8인 밴드에 소속되어 뚬바도라 연주를 담당하고 있다. 동시에 퍼커션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도 일하는 '투잡러'다. 우리들이야 가벼운 취미반이지만, 프로가 되기 위해 그에게 배우는 제자들도 많다. 학교 수업의 경우에는 정부가 월급을 주는데, 일이 많아서 자유시간은 거의 없는데도 딱히 불평이 없다. 음악에 관련된 일이라면 그는 모든 시간에 진심이다.
"10년 후에도 음악을 하고 있으면 좋겠어."
그의 모든 신경은 음악으로 향해 있다. 음악만 계속할 수 있다면 특별히 바라는 것도 없다.
"아쉬운 게 있다면, 바라코아는 작은 마을이라 아무도 여기까지 오려 하지 않아. 능력있는 음악가가 있어야 함께 발전할 텐데... 다른 음악가들과 만나고 싶은데, 바라코아를 나가기 쉽지 않네. 아바나는 너무 멀고."
"그럼 다른 곳으로 이사 가고 싶지는 않아?"
"글쎄, 생각해본 적은 있는데 잘 모르겠어.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여기 쭉 살아오셨으니까. 나도, 내 아들도 그들이 살아온 길을 따라서 이곳의 삶을 살지 않을까."
호세의 꿈은 어떻게 보면 소박했다. 계속 음악을 하고, 그의 아버지가 태어나고 자랐으며 자신이 일생을 보낸 바라코아에서 또 자신의 아들을 키워가는 것. 그렇게 이어지는 삶들도 있다.
그는 마치 한 마을을 오래도록 지켜온 당산나무 같다. 숙명을 받아들이는 듯한 담담한 표정. 윗세대로부터 음악적 재능과 열정을 물려받았듯, 여기 머물며 이곳의 음악을 지켜갈 책임을 당연하게 자기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호세는 자신이 받아온 것을 지키고 가꿔서 아래 세대에게 전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극적인 변화나 갑작스런 행운을 바라지도 않는다. 소원이 무엇인지 묻자 건강과 행복을 꼽았다. 인터뷰어 입장에서는 다소 심심한 답변이지만, 둘 중 하나도 결코 손에 넣기 쉬운 것은 아니다.
"행복이 뭐라고 생각하냐고? 폭력이 없는 것,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사는 것, 아이들이 위험한 데 살지 않는 것. 그런 것들이 곧 행복이지."
"그럼 세상에서 딱 하나만 바꿀 수 있는 힘이 생긴다면 뭘 바꾸고 싶어?"
"음… 돈이 없어서 힘든 사람들을 없애고 싶어."
문득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아이들, 유물리에서 만난 할머니... 이미 흐릿해진 얼굴들이 스친다. 호세는 내가 멈칫하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채 말을 이어간다.
"그리고, 이왕 바꾼다면 하나만 더. 기후를 개선시키고 자연재해를 없애고 싶어. 자연재해가 앗아가는 생명이 너무 안타깝더라. 재해에 대응하는 체계가 잘 안 되어 있기도 하고. 매일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추위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는 기사를 봤어."
앞으로 40년이 지나면 호세는 어떤 삶을 살까. 그는 가족들과 함께, 음악을 하고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참 한결같은 사람이다.
"그때쯤에는 흰머리가 잔뜩 났겠다, 하하. 아마 은퇴도 했을 거고. 손이 지금 같진 않겠지만 음악은 계속하고 있을 거야.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있겠지? 내가 지금껏 배워왔던 것처럼 말이야."
호세가 자신의 70대를 상상하며 은퇴를 앞둔 사람처럼 웃음을 짓던 그때, 그제서야 함께 수업을 듣기로 한 친구들이 나타났다. 자전거를 타고 근처 마을에 놀러 갔는데 길을 잃는 바람에 예정보다 한 시간이나 늦어졌단다. 인터뷰 고마웠다고 말하자 호세는 씩 웃으며 곧이어 수업을 시작한다.
뚬바도라 수업은 역시나 즐거웠다. 멈추지 않고 연결해서 치는 법, 여러 가지로 변형하는 법을 배웠다. 처음부터 너무 좋은 선생님을 만난 게 아닌가, 생각하면서 리듬에 몸을 맡겨본다. 바라코아 해변에 파도가 끊임없이 치는 것처럼, 나의 첫 번째 뚬바도라 선생님 호세 까를로스의 삶에도 음악이 끊이기 않기를.
- Baracoa, Cuba
- 인터뷰 일자 : 2015년 10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