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Juan) / 콜롬비아 메데진 / IT 회사 근무
한때 세계에서 가장 위험했던 곳.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지배했던 도시. 피비린내 나는 범죄의 중심지. 콜롬비아 메데진에 따라붙는 무시무시한 수식어다. 메데진에 가겠다는 얘기를 들으면 다들 입을 모아 걱정했다. 하지만 뭘 모르는 소리다. 사람들이 가진 이미지의 대부분은 편견의 남은 조각이다.
핏빛 역사를 이겨내고 눈부시게 변모 중인 메데진의 진짜 모습을 직접 가보아야 알 수 있다. 골목마다 숨쉬는 역사를 마주하고 나는 이 도시를 못내 사랑하게 되었다. 세상에 사연 없고 이야기 없는 곳이 어디있겠냐마는, 사랑에 빠지게 된 걸 어쩌나. 꿈 같은 건 없다고 외치는 시니컬한 청년, 하지만 달빛 하나에 행복해하는 식물 애호가 후안을 만난 것도 바로 여기 메데진에서였다.
후안은 카우치서핑 호스트다. 호의로 남는 침대를 내어주고 여행자들과 친구가 되는 사람. 그의 집은 메데진 시내에 위치했다. 커다랗고 안락한 쇼파가 디귿자로 놓인 거실, 널찍한 아일랜드 조리대와 함께 각종 조리도구로 채워진 부엌이 있고, 방도 4개나 되는 멋진 2층 집이었다. 빛이 들어오는 거실 옆 유리문을 열면 식물이 가득한 정원으로 이어졌다. 나도 그 집에 머물게 된 게스트 중 하나였다.
처음 후안의 집에 처음 도착했던 날. 아침 9시쯤 도착한다고 얘기해뒀는데, 주소를 보고 찾아간 후안의 집은 아무리 벨을 울려도 답이 없다. 똑똑, 콩콩 예의바르게 노크하다가 급기야는 마음이 불안해져서 문을 쾅쾅 두드렸다. 하지만 깜깜 무소식. 별 수 있나. 내 몸만한 배낭을 가로로 눕히고 그 위에 걸터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십오분 쯤 지났을까, 안되겠다 싶어 다시 문을 꽝꽝 두들기자 문이 덜컥 하고 열렸다.
누가봐도 숙취에 젖은 후안. 겨우 잠에서 깬 모양이었다. 지금이 몇신데, 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됐다. 후안의 집엔 나 말고도 프랑스에서 온 사라와 프룬, 아르헨티나인 커플이 머물렀다. 사라는 금발에 친절한 눈빛과 사근사근한 말투를 가졌고, 프룬은 길쭉한 다리에 건강미가 흐르고 눈에 장난끼가 가득했다.
또래인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밤이면 초록바나나와 유카를 튀겨 먹고, 거실 쇼파에 사이좋게 파묻혀 오래된 영화를 함께 보거나, 날씨 좋은 날엔 동네 공원에 나가서 맥주와 럼을 마시며 춤을 췄다. 노란빛 거리는 늦은 시간까지 흥성흥성했다.
여느때와 같던 금요일 밤, 후안이 갑자기 누군가와 반갑게 인사한다. 네 명의 청년들은 후안의 친구들로 예술학교에 다니는 함께 친구들이란다. 우리는 금방 섞여 들어 밤거리를 활보한다. 예술가들답게 꽃잎을 꺾어들고 예뻐하다가 쓰러진 럼병을 보고 예술사진을 찍겠다며 구도를 잡는다. 선선한 밤바람과 상쾌했던 친구들과의 대화. 대화의 내용은 이내 흐릿해졌지만 같은 톤으로 웃던 웃음소리는 아직 생생하다.
그런 밤들이 이어지다 보니, 아침엔 다들 좀비였다. 잠에서 깨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비척거리며 부엌에 가서 아레파와 달걀을 굽는다. 아레파는 콜롬비아의 대표 음식, 옥수수 반죽으로 만든 둥글고 납작한 빵이다. 달짝지근한 맛이 맴돌아서 아침으로 먹기 딱이다. 뭉그적거리며 여유로운 아침을 먹고 나서야 시내로 나가본다.
메데진 시내는 걱정들이 무색할 만큼 안정적인 기분이 들었다. 편견과 오해를 지워내고, 이 도시를 더 알고 싶어서 워킹투어를 신청했다. 오늘의 워킹투어 가이드는 카롤리나. 메데진에서 나고 자란 콜롬비안이다. 머리를 깔끔하게 묶고 청바지를 입은 그녀는 당당한 자세로 국적도 각양각색인 스무 명의 사람들 앞에 선다.
투어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의 말과 표정에서 묻어나는 메데진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 때문이었다. 어두운 과거를 부정하거나 숨기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걸 극복해내고 새로운 길을 가는 메데진 사람들의 저력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이었다.
카롤리나는 번화가를 걸으며 메데진의 역사를 차근차근 설명한다. 콜롬비아 제2의 도시인 메데진은 콜롬비아 파이사의 주도 역할을 하는 도시다. 파이사 지역은 콜롬비아 북서쪽의 넓은 구역을 통칭하는 이름으로, 안티오키아, 칼다스 등의 다수의 행정구역을 포괄한다. 파이사 지역은 콜롬비아의 다른 곳과는 구분되는 자기만의 색깔이 확실하다. 카롤리나는 유일무이한한 파이사만의 정체성을 자랑스러워했다.
과거 350여년 간 금광산업으로 부를 얻었던 파이사는 18세기에 시작된 전세계적 커피붐을 타고 더 많은 돈을 벌게 되면서 철도를 건설했다. 분지 지형이라 본래 외부 교역이 원활하지 않았던 메데진이 철도 개통에 따라 전격 개방되면서 본격적으로 커피 수출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고, 메데진은 더더욱 부유해졌다.
역사의 비극적 전환점이 발생한 것은 1970년대였다. 한 번쯤 들어봤을 세기의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메데진을 본거지로 삼으면서 도시는 슬픈 암흑기를 보내야 했다. 원래 메데진 출생인 파블로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마약범죄 집단인 ‘메데진 카르텔’을 만들었다. 사법과 경찰이 작동하지 않는 무법지대, 무분별한 살인과 테러 등 온갖 범죄가 횡행했던 이 도시는 ‘비극의 도시’라는 오명을 얻었다. 일반 시민들도 항상 불안에 떨며 지내야 했고, 비명도 새어나가지 않는 고요함 속에서 무고한 피해자들만 늘어갔다.
"내 삼촌도 메데진 카르텔에게 살해 당했어. 그들은 돈을 받고 청부살인을 하기도 했대. 그래서 우리 가족은 이곳을 떠나 보고타로 가서 살았어야만 했어. 나는 작년에서야 겨우 다시 메데진으로 돌아올 수 있었어."
당차던 카롤리나의 얼굴에 그늘진 슬픔이 깃든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후안의 삼촌도 카르텔의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고 했다. 삼촌이 탄 차를 통째로 강에 빠트린 바람에, 2년 전에야 유골을 발견했다고 했다. 내가 만났던 두 명의 메데진 토박이가 모두 희생당한 가족이 있다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카르텔의 핍박 아래 피를 흘렸던 것이다. 40년 전에 자행된 비극이 지금 세대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운다.
다행히 이 지옥은 영원하지 않았다. 1993년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사망한 이후, 메데진은 과거 마약과 범죄의 흔적을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철저히 파괴되었던 도시 메데진을 재건하기 위한 노력은 정부나 특정 개인뿐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힘을 모아 하나씩 이뤄질 수 있었다.
“우리가 서있는 곳은 카라보보(Carabobo)야. 과거에는 우범지대였지만 지금은 꿈과 희망이 넘치는 곳이지. 이 공간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처음 설치한 게 저기 보이는 교육부 건물이야. 어두웠던 슬램가에 ‘교육’이나 ‘미래’라는 상징을 심어서 희망의 씨앗을 키우기로 한 거지.”
더럽고 위험했던 범죄의 온상을 180도 뒤집어 '교육'이라는 단어가 상징하는 가능성의 딱지를 부여한 것이다. 상징적인 도구로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믿음. 그 발상과 실천이 마음에 들었다.
그 무렵 주지사였던 알바로 우리베는 메데진 정상화를 위해 힘썼고 이후 2002년부터 2010년까지 콜롬비아 대통령이 되었다. 물론 우리베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치안을 정비하고 국가발전을 이끌었다는 평도 있지만,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탄압하고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한 결과라는 비판도 있다. 성장과 발전도 중요하지만 그 어떤 명목으로 폭력과 살인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또 우리나라의 지난 역사가 겹친다.
2010년부터 콜롬비아는 까맣게 그슬린 과거에 차차 새로운 색을 칠해나갔다. 사람, 동물 모양의 다양한 보테로 동상이 모여있는 보테로 광장을 지나고 카롤리나는 지하철 역사 아래 터널 벽화 밑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파이사 지방의 역사가 길게 늘어선 벽화 앞에서 그는 진득한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녀를 반원 형태로 둘러싼 우리는 메데진, 파이사, 콜롬비아에 관한 그녀의 진심어린 생각에 귀를 기울인다.
“우리 콜롬비아 사람들은, 잘 잊어버려.”
카롤리나는 짧은 문장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내뱉는다. 보통 '역사를 잊는다'라는 건 부정적으로 비춰지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카롤리나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끔찍하고 소름이 돋는 잔혹한 역사의 기억들도 우린 얼마든지 잊을 수 있어. 왜냐하면 내일이 있으니까.”
과거를 바라보는 대신, 지금 여기 그리고 더 나은 내일을 생각한다고. 그게 콜롬비아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이유라고 그는 말한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피로 물들었던 메데진의 살 떨리는 역사와 콜롬비아 사람들의 환한 웃음이 겹친다. 상처 하나 없이 마냥 행복한 줄만 알았던 사람들, 그들이 겪은 역사의 단면이 너무 잔혹해서 불편한 괴리감이 느껴졌다. 나는 그 이상한 기분과 함께, 이 도시와 이 나라를 이미 사랑하고 있었다.
투어는 어느새 막바지. 마지막 장소는 두 개의 보테로 동상으로 유명한 산 안토니오(San Antonio) 공원이다. 콜롬비아 예술가 페르난도 보테로의 ‘전쟁의 새’, 그리고 ‘평화의 새’가 나란히 놓여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비둘기 모양의 동상이 하나 놓여있었다. 그러나 1985년의 메데진 카르텔이 일으킨 폭탄 테러는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고, 비둘기 동상을 처참히 파괴했다. 그게 바로 지금의 '전쟁의 새'다. 갈기갈기 찢겨나간 청동 조각이 마치 테러 희생자의 여린 피부결 같아보여서 더 아프다.
보테로는 무참하게 찢어진 동상을 절대로 치워서는 안된다면서 동상을 철수하면 잊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망가진 동상 아래 스물세 명의 희생자 이름을 적어서 기리고, 새로운 동상, '평화의 새'를 제작해 그 옆에 나란히 세웠다. 카롤리나는 참혹히 부서진 '전쟁의 새'가 과거의 콜롬비아, 새롭게 세워진 '평화의 새'가 현재의 콜롬비아라고 말했다. 두 마리의 새는 콜롬비아의 역사를 기억하는 산 증인인 셈이다.
"콜롬비아는 차오르던 물 속에서 숨통이 끊기기 직전에 헤엄쳐 나온 거야. 우리가 여기 함께 평화롭게 서서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정말 상징적인 일이지.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기억해줘."
카롤리나는 함께 살아있는 증인이 되어달라는 말과 함께 투어를 마친다. 잊지 않겠다고 다짐해보았다. 투어를 마치고 역사 기념관(Casa de la memoria)으로 갔다. 메데진의 굴곡진 현대사가 여러 시청각 자료로 기록된 공간이다. 칠흑같이 깜깜한 방에 들어서면 하얗게 빛나는 글씨로 이름들이 하나씩 켜진다. 폭력과 살육으로 스러져간 빛. 이름들은 끝없이 이어진다. 내전과 마약범죄, 희생자들의 얼굴이 흑백사진 속에서 이쪽을 바라본다. 그들의 눈에 지금 이곳은 어때 보일지. 한 걸음씩 나아지고 있는 메데진의 오늘이 세상을 떠난 자들에게 닿아 위안이 되기를 기원했다.
후안과의 인터뷰는 어느 여유로운 오후에 시작됐다. 햇볕이 창을 통해 나지막이 거실로 내리쬐고 있었다.
"넌 어떤 꿈이 있어?"
인터뷰의 첫 질문. 으레 하는 질문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툭 던진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의외의 대답.
"나는 꿈이랄 게 없어."
말문이 막혔다. 그렇지만 어찌보면 당연한 말이었다. 세상 모두가 꿈을 가지란 법은 없으니. 이유야 다양하다. 현재가 마음에 들어서 바라는 게 없을 수도 있고, 희망을 걸기에 지쳤을 수도 있다. 왜 이런 경우의 수는 미리 생각하지 못했을까. 내가 당황한 기색이 보였는지 후안은 계속 말을 잇는다.
"그냥... 관심 있는 게 별로 없어. 난 그렇게 사회적인 사람도 아니고."
심드렁한 후안의 표정. 오늘 인터뷰를 어떻게 끌고 나가면 좋을지 내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내 귀에도 들린다. 굉장히 차갑고 시니컬한 친구구나, 라고 생각했다. 나중에서야 틀린 판단이었다는 걸 알았지만.
"나는 어릴적부터 현실주의자였어. 그래서 꿈을 꾸기보다는 행동을 해. 꿈을 꾼다거나, 미래를 고민한다거나, 아니면 세계를 바꾼다거나... 이런 생각은 해본 적 없어"
납득이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세계를 바꾸는 건 어차피 쉽지 않으니까. 그렇지만 세상을 구원하는 히어로가 되는 건 아니더라도, 보통 본인의 미래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나? 나는 희망의 끈을 붙잡고 다시 묻는다.
"그럼 앞으로 하고 싶은 직업이 있다거나, 미래에 하고 싶은 일이 있어?
"나는 미래에 대해서 생각 안 해."
망했다. 이 프로젝트에서 내가 가장 고장났던 순간. 인터뷰가 어떻게 흘러가야 할 지 갈피를 잃었다. 하지만 곧 마음을 비웠다. 인터뷰야 아무렴 어때, 아니 아무렴 어떻진 않지만 어쩔 수 없지. 친구끼리 두서없는 수다라도 나누자는 맘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내 맘은 아는지 모르는지, 후안은 정치, 국가, 국민 같은 것도 관심이 가지 않는다며 어깨를 으쓱해보인다.
"정부나 종교도 머릿속에 존재하는 사회적인 개념이잖아. 그런 것들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래서 기대하거나 바라지 않는 거야. 현실을 살아갈 뿐이지. 위선이나 거짓된 희망 없이 말이야."
얼핏 아무것도 꿈꾸지 않는 비관론자 같아보이지만, 사실 후안은 염세론자가 아니다. 본인이 제어할 수 있는 일들은 지금 여기 있기 때문에, 미래를 가정하지 않고 오늘만 바라본다는 거다.
"미래라는 것도 개념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난 영원한 것이 없다고 믿거든. 친구도 마찬가지야. 지금 이 순간 말고는 알 수도 없고, 미래를 생각해봤자 의미도 없는 거야."
카우치서핑으로 누구보다 많은 친구를 만나면서, 내일은 어떨지 모른다는 소리를 한다. 당시의 내겐 충격적인 생각이었다. 친구든 연인이든, 모든 관계란 언젠가 멀어진다는 걸 머리로 알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영원을 믿기에 지속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내일을 가정하지 않고도 오늘의 우정을 소중히 여길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카우치서핑으로 친구들을 계속 만나는 이유는 뭐야?"
"아, 그건 나만의 여행 방법이야. 세상 곳곳이 궁금한데, 직접 다닐 수 없으니까. 다른 데서 온 사람을 만나면 내가 몰랐던 곳을 여행하는 것과 마찬가지잖아? 내일이면 다시 못 본대도 오늘은 함께 친구가 될 수 있지."
친구도 미래도 다 의미 없다는 듯 쿨한 표정의 후안에게도 의외의 면모가 있다. 바로 식물 사랑꾼이라는 점. 후안은 시니컬한 눈빛 그대로 옆에 놓여있던 식물을 무릎 위에 올린다. 강아지를 다루듯이 소중하게 품에 꼭 안는다. 이 친구 캐릭터 도대체 뭔지 종잡을 수가 없다.
"내가 꿈꾸는 게 있다면, 이 집의 식물들 각각에게 하나씩 자리를 마련해주는 거야. 나는 정원 가꾸는 게 좋아. 얘네들을 돌볼 때 마음이 편해져. 내가 바라는 것은 그저 평화로운 삶이야. 그렇게 흘러가고 싶어."
대화를 이어갈수록 냉소적인줄만 알았던 후안이 꾸밈없는 따뜻한 사람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인터뷰는 전혀 망하지 않았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이 있다는 게 이 인터뷰 프로젝트의 가장 재미있는 점이다.
그가 소중히 여기는 다른 하나는 바로 가족이다.
"그리고 굳이 하나 더 꼽자면 앞으로도 쭉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거?"
"아버지와 사이가 좋구나. 아버지는 어떤 분이셔?"
"아버지는 내 삶에 무언가를 강요하지 않아. 그저 조용히 옆에 계셔주셔. 내가 대학을 졸업할지 말지, 앞으로 어떤 일을 할지도 다 내가 결정하도록 해주시지."
후안은 원래 철학과 예술 전공인 대학생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듣고 만질 수 있게 표현하는 데에 관심이 있지만, 돈 되는 예술을 해야하는 현실에 졸업을 할지조차 결정하지 못했다. 지금은 휴학하고 아버지 IT 회사 일을 돕고 있다. 모든 관계가 덧없고 유한하다고 생각하는 후안에게 아버지는 유일한 비빌 언덕이다.
"내 생각에 유토피아는 정부도, 국경도, 언어도, 이름도, 성별도 없는 세상이야. 나누거나 구분짓지 않는 세상. 그리고 넘치는 것도 부족한 것도 없는 균형잡힌 곳. "
"아무것도 없는 세상? 모든 기준을 다 없애면 좋겠다는 거야?"
"음... 예를 들어 정원을 가꿀 때 쓸모없는 건 뽑아내잖아? 그렇게 골라내지 않는 세상 말이야. 쓸모없는 것을 가려내지 않고 자라나는 모든 걸 자연스럽게 두는 거지. 그게 이상적인 거라고 생각해."
후안은 우리의 세상이 자연과 역행하는 방향으로 자꾸만 나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이제라도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을 되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세상에 딱 하나만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생긴다면 뭘 바꾸고 싶어?"
"모든 사람들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게 하고 싶어."
투박하만 진심이 담긴 말. 후안은 모든 사람들이 삶을 똑바로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 자신, 타인의 삶, 나아가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눈 크게 뜨고 살펴봐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은 다들 관심이 없잖아. 다른 누군가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다 못해 매일 쓰는 컴퓨터가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그런 건 알려고도 하지 않잖아."
후안은 우리가 점점 멍청해지고 있다며 걱정했다. 하루에 한 명씩이라도 깨어있으려고 노력한다면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그래서 스스로도 과거나 미래보다 현재를 깊이 들여다보며 충실히 살아가려고 애쓰는 것이다. 미래에 대해서 꿈꾸진 않는다는 후안의 말이 이제야 납득이 갔다.
토요일. 메데진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그날도 밤 9시쯤 '후안과 게스트'들은 슬렁슬렁 걸어 후안의 아지트인 공원으로 맥주를 마시러 갔다. 얼마 안 있어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해 다시 집으로 가기로 했다. 그 순간, 멀리 폭죽소리가 들리고 하얀 빛이 하늘에서 얇은 기둥으로 흔들린다. 메데진에서 축제가 시작되는 소리였다.
후안은 달이 너무 맑다며 기분이 좋아서 밤새라도 걸어다닐 수 있겠다고 방방거린다. 꿈 같은 건 없다고 말하던 차가운 모습과 달리, 후안은 자주 해맑고 귀엽다. 꿈이 없다고 어두운 비관론자인 것은 아니니까. 미래를 그리지 않는 대신 오늘을 더욱 온전히 누리는 것. 오히려 오늘을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일지 모른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오늘을 걸어가는 메데진과, 미래에 저당잡히지 않고 오늘을 누리는 후안이 퍽 잘 어울리는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도, 모레도 언제나 이들이 오늘을 살며 벅차게 행복할 수 있기를.
- Medellin, Colombia
- 인터뷰 날짜 : 2015년 11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