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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정여 Sep 23. 2019

잔소리 대마왕

그만하자, 그만하자

"욕조에 시금치가 있네?"


아기 목욕을 마치고 옷을 입히는데 남편이 내게 말했다. 아기가 태어난 뒤 우리 부부는 분업 체제를 꽤 성공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내가 아기에게 밥을 먹이고 목욕을 시키면, 남편은 아기가 음식을 흘린 바닥을 닦고 화장실을 정리하는 식이다. 부쩍 힘이 세진 아기와 옷을 입히면서 씨름을 하는데 남편의 말이 귀에 몹시 거슬렸다. 유아식을 시작한 아기의 저녁 반찬이 시금치 당근 감자가 들어간 채소볶음이라는 걸 모를 리 없는 남편이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해?"


나는 쏘아붙였다. 남편은 "그냥 팩트를 말한 거야"라며 당황했다. 나는 "그냥 치우면 되지 그걸 왜 나한테 말하냐고"라며 신경질을 냈다.


내가 남편의 말에 예민하게 반응한 건 사실이다. 몸이 고되 짜증이 섞였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그가 이따금씩 하는 말이 내게 잔소리로 들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얼마 전 남편이 냉장고에서 계란을 깼다. 냉장실 아래쪽에 계란을 뒀는데 남편이 그 위로 용기를 떨어뜨렸다. 그는 계란을 깨자마자 "아 뚜껑 좀 덮어놓지"라고 말했다. 뚜껑이 덮여 있으면 계란이 깨지지 않았을 거란 얘기였다. 용기를 떨어뜨리지 않는 게 먼저 아닌가. 나는 나를 타박하는 소리로 들렸다. 흥분하는 내게 남편은 "그냥 공유하자고"라며 태연하게 말했다.


먹다 남은 사과는 진짜 보기 싫다.(출처=pixabay)


나는 잔소리를 잘 안 하는 편이다. 남편이 사과를 다 먹고 테이블에 사과심을 올려놔도 그냥 버린다. 단 한 마디 잔소리 없이. 그가 자꾸 젖병 소독기의 문을 닫아 놓는 것도 내버려 둔다. 젖병 소독기 내부가 축축해 문을 열어둬야 하는데 내가 닫힌 문을 볼 때마다 열면 되기 때문이다. 남편이 젖병의 꼭지 부분을 깨끗이 씻지 않았을 때에는 "이거 알고만 있으라고"라고 말하며 꼭지를 보여줬을 뿐이다.


잔소리가 체질이 아닌 이유는 이미 벌어진 일을 후회하거나 탓하지 않는 성격 때문이다. 안 좋은 일이 겼을 때에는 좋은 방향으로 생각한다. 남편이 직장 상사의 결혼식 시간을 착각해 한 시간 일찍 결혼식장에 도착한 적이 있다. 미안해하는 남편에게 나는 "여유롭게 와서 좋지 뭐"라고 말했다. 우리 부부는 예식이 시작하기 전 커피를 마시면서 편하게 기다렸다.


내 성격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다. 남편은 내가 잔소리가 없어서 좋다고 말한다. 내가 한 번은 "당신 같은 사람이랑 결혼했으면 어땠을 거 같아?"라고 물었다. 남편은 "하, 진짜 힘들었겠지"라고 답했다. 진심이었다. 나는 "좋겠다, 나랑 결혼해서"라고 생색을 냈다.


남편은 다르다. 그는 굳이 안 해도 될 말들을 해서 나를 불편하게 한다. 명절 때 시댁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타고 기차역으로 갔다. 넉넉하게 출발했는데도 길이 막혀 기차 출발 시간이 다가왔다. 남편은 "왜 이렇게 막히는 거야"라며 신경질을 냈다. 지하철을 타고 가자는 남편의 제안을 뿌리친 와이프에 대한 에두른 힐난이었다. 남편은 기차에 올라타고 나서야 내게 사과했다.


한 번은 내가 시댁 행 기차 티켓을 잘못 예매한 적이 있다. 티켓에 적힌 좌석에 앉아 있는데 어떤 여자분이 본인 자리라고 했다. 그제야 내가 하루 전 티켓을 예매했다는 걸 알게 됐다. 다행히 의도적인 부정승차는 아니었기에 요금을 배로 물지는 않았다. 더 다행인 것은 우리 부부가 이 사실을 기차에 올라타고 나서야 알았단 거다. 만약 기차를 타기 전 알게 됐다면 남편의 끝도 없는 잔소리에 시달렸을 테다.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나는 기차를 타고 가는 내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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