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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정여 Sep 16. 2019

남편살이

시집살이도 안 하는데

올 추석에는 시댁에 내려가지 않았다. 얼마 전 아기가 태어나고 첫인사를 하기 위해 남편 친척들과 가족 모임을 한 데다 지난주에는 서울에서 돌잔치를 치렀다. 시부모님은 나와 아기가 먼 거리를 또 올 필요가 없다며 마다하셨다. 남편만 추석 하루 전 기차를 타고 시부모님 댁으로 갔다.


보통의 명절에는 시댁에서 이틀, 친정에서 하루를 잔다. 회사 동기는 내가 명절 때마다 시댁에서 이틀 자는 것을 두고 엄청난 시집살이를 하는 거처럼 안타까워했다. 나는 남편 집에서 두 밤 자는 데 전혀 불만이 없다. 시댁이 멀고 자주 방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항상 남편 집부터 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요새는 명절에 순서를 정해 서로의 집을 번갈아 먼저 가기도 한다는데 먼 곳부터 다녀오는 게 더 편하다.


나는 되려 시댁에 가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시부모님은 나를 며느리로서 존중해 주신다. 시어른 노릇을 한다며 말로 상처 주거나 기를 죽이는 일 같은 건 절대 안 하신다.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더더욱 시부모님의 성품에 감탄했다. 시부모님의 배려로 예단 예물은 다 생략했다. 친정의 지원 없이 월급을 모아 결혼 비용을 마련한 나로서는 감사한 일이었다. 집을 구하는데 시댁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를 볼모로 며느리 다움을 강요하는 일도 없다. 나는 진심으로 시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 즐겁다. 지난 6월에는 남편이 일주일 동안 해외 출장을 간 사이 혼자 아기를 데리고 시댁에 다녀왔다. 시부모님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정말 행복했다"며 내게 고마워하셨다. 육아휴직이 끝날 때까지 한 달에 한 번은 꼭 시부모님을 뵈려고 한다. 연세가 많으신 두 분이 손자를 자주 보셨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그렇다. 시댁 문제가 없으니 우리 부부만 잘 살면 된다. 하지만 이 철없는 아들 부부는 있는 싸움, 없는 싸움을 만들어 내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나는 시집살이 아닌 남편살이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친정 가는 기차 안에서 남편이랑 또 싸우고 말았어.(출처=pixabay)


결혼하고 처음으로 명절을 지냈을 때다. 이틀 밤을 쇠고 설 당일 오후 3시 기차를 타고 올라올 예정이었다. 친정집에서는 부모님이 딸 부부를 기다리고 계셨다. 기차역에 오후 5시쯤 도착하면 차를 가지고 1시간 거리에 있는 친정집으로 가서 저녁을 먹고 하루 자고 온다. 이것이 우리가 사전에 합의한 계획이었다.


시어머니가 바리바리 싸주신 음식을 양손 가득 들고 기차에 올라탔다. 옆자리에 앉은 남편의 표정이 아까부터 어두웠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걱정하는 내게 남편이 말했다.


"너무 후다닥 온 거 같아."


총각 시절 남편은 명절 당일까지 집에서 푹 쉬다가 다음 날 늦잠까지 자고 설렁설렁 올라오곤 했다. 결혼을 하고 나니 처가댁에 가기 위해 연로한 부모님을 두고 급히 떠나야 한다. 못내 안타까워하는 남편이 나는 황당했다. 명절 당일 친정으로 출발하는 며느리에게 "너무 일찍 가는 거 아니니? 시누 오면 가라, 얘"라며 뻔뻔한 말을 하는 시어머니가 있다는 글을 맘 카페에서 본 적이 있다. 남편한테 이런 비슷한 소리를 들을 줄이야.  


"그러면 우리 부모님은?"


딸만 둘을 둔 우리 부모님은 명절 당일 저녁까지 두 분이서 지내는데. 나는 이틀 밤이나 자고 올라가는데. 내가 시어머니를 도와 밥상을 차리고 치울 때 건넌방에서 영화나 보고 있었으면서. 효자 났네, 효자 났어. 시댁에 있으면서 한 번도 곱씹지 않았던 섭섭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처가댁 가는 길에 꼭 그렇게 죽을 상을 해야 해?"


자기감정에만 충실한 어느 집 아들과 그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조차 안 한 어느 집 딸이 기차 안에서 얼굴을 붉혔다. 이후로도 우리는 꽤 오랜 기간 동안 온전한 부부가 되지 못한 채 누군가의 아들과 딸로 기싸움을 하는 일이 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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