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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정여 Sep 30. 2019

라면 한바탕

이런 일로 싸웠다(1)

우리 부부는 결혼 후 정말 많이 싸웠다. 30년 이상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남녀가 부부로 만나 싸우는 건 당연하다는 얘기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싸웠다. 나는 남편에게 "대체 왜 연애할 때는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거냐"라고 몇 번이나 따져 물을 정도로 속아서 결혼한 기분이었다. 남편 역시 잡아먹을 듯 따지는 아내가 낯설고 답답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싸움은 그때의 감정이나 특정 장면만 기억날 뿐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첫 휴가로 괌에 갔을 때 우리 부부는 크게 싸웠는데 도무지 왜 싸웠는지 모르겠다.(해외 원정 싸움에 대해서는 다른 뒷담화의 주제로 남겨두려고 한다.) 남편과 싸운 뒤 대한항공 애플리케이션을 켜고 항공권을 검색했던 건 기억이 난다. 나는 너무 분노가 치밀어서 혼자 한국에 돌아오려고 했다. 내가 가끔씩 남편에게 "우리 그때 왜 싸웠지?"라고 묻는데, 남편은 그럴 때마다 "내가 잘못했겠지 뭐"라고 답한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보면 우리가 대단치 않은 일로 싸우는 데 열을 올렸다는 뜻일 테다.


수많은 무의미한 싸움 중에서도 원인과 과정, 결과가 똑똑히 기억나는 싸움들이 있다.(참고 글=아침밥 전투)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내 머릿속에 각인이 됐나 보다. 돌이켜 보면 정말 코웃음이 나오는 일들이지만, 그땐 결혼을 후회할 만큼 땅을 쳤다.


백종원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 나는 라면에 콩나물을 듬뿍 넣고 해장라면을 끓였다. 전날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지 않은 탓에 식기가 마땅치 않았다. 볼이 넓은 국수용 식기가 하나 남아 있었는데 거기에 남편의 라면을 담았다. 김가루도 소복하게 올렸다. 비즈니스 클래스에서 나오는 라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비주얼이었다. 내 라면은 작은 밥그릇 두 개에 각각 면과 국물을 따로 담아내었다.


식탁에 앉은 남편이 물었다.


"넌 왜 그렇게 먹어?"


내가 답했다.


"아 나는 (라면이) 불은 게 싫어서."


그러자 남편이 하는 말.


"그럼 나는 불은 걸 먹으라고?"


??????????????????????????


(최대한 문장과 문장으로 글을 구성하려고 하는데 물음표밖에 그때의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다. 정말 눈 앞에 물음표 백만 개가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나는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해장라면을 끓였나.(출처=tvN)

나는 남편을 위해 아침에 일어나서 라면을 끓였다. 남편을 위해 그냥 라면도 아니고 해장라면을 끓였다. 남편을 위해 보기 좋게 예쁜 국수용 식기에 라면을 담았다. 그런데 뭐라고?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내 라면만 예쁘게 담아 놓고 남편 것을 대충 줬다면 욕을 먹어도 억울하지 않다. 하지만 나는 성의를 다했다. 느닷없이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머리가 얼얼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나는 남편이 퉁퉁 불은 라면을 먹길 바라는 못된 아내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나는 부르르 떨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내가 "그릇이 없어서"라고 말했다면, 이런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건 뒤늦게 아주 찬찬히 우리의 싸움을 복기한 끝에 다다른 생각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설거지 담당인 남편이 전날 설거지를 하지 않아 그릇이 없는 건 당연했고, 그가 왜 '그렇게' 먹느냐고 물었기 때문에 두 개의 식기에 나눠 먹는 기능적 측면에 초점을 맞춰 답한 것이다.


설령 내가 오해하게 만들었다 하더라도 "아 그래? 그럼 나도 그렇게 나눠줘. 나도 라면 불은 건 싫더라"라고 말하는 게 맞지 않나. 왜 와이프를 나쁜 사람으로 만드느냐 말이다.


"먹지 마!"


졸지에 남편이 불은 라면을 먹길 바라는 악처(惡妻)가 된 나는 그가 아예 라면을 먹지 못하게 만들었다. 남편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내가 라면을 먹는 걸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곧장 사과했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이후에도 종종 상상도 못 할 참신한 실언으로 내 속을 뒤집어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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