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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정여 Oct 02. 2019

수도권 여자의 말투와 지방 남자의 어휘

이런 일로 싸웠다(2)

몇 해 전 일이다. 새해가 시작하고 얼마 안 됐을 무렵 남편이 텔레비전을 켜더니 연말 가요대전을 검색했다. 테이블에 맥주와 땅콩을 올려둔 채였다. 나는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이 "그런 걸 재방송으로 봐?"라고 말했다. 그러자 남편의 얼굴이 굳었다. 내 말투가 기분 나쁘다나 뭐라나.


남편이 가요대전을 보는 것에 대해 나는 맹세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가 아이돌 덕후인 걸 알지만, 재방송으로 연말 가요대전까지 챙겨 보는 게 신기했을 뿐이다. 남편은 내가 "한심해 보인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고 한다. 나는 내 말을 자기 멋대로 곡해하지 말라고 맞섰다.  


남편과 대화를 할 때 뜬금없이 말다툼을 시작할 때가 있다. 아무도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 서로를 탓하면서 말이다. 나는 수도권, 남편은 지방에서 자라서인가. 지방색이라고 하지 않으면 이해가 어려울 정도로 곤혹스러운 적이 종종 있었다.


남편이 내 말투를 지적할 때가 대표적이다. 남편은 내가 가끔 기분 나쁘게 말한다고 공격한다. 나는 말투를 지적하는 것은 비겁하며, 당신이 꼬여서 기분 나쁘게 듣는 거라고 되받아친다.


남편은 내가 "맘대로 해"라고 말할 때 특히 기분 상한. 내가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신경 안 쓴다"라는 투로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단다. 난 정말 "당신 뜻대로 하세요.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라는 의미로 말할 뿐인데. 몇 차례 싸움 끝에 나는 이 말은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억울해 미칠 노릇이지만 남편이 "제발 부탁한다"라고 사정하니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이 사람은 악을 쓰는 게 아닙니다. 소리를 지르는 겁니다.(출처=pixabay)

반면 나는 남편의 부적절한 말 때문에 속을 썩었다. 둘이 싸우다 목소리가 높아질 때면 남편은 나에게 "악을 쓰지 말라"라고 했다. 세상에. 아무리 소리가 크다 한들 어떻게 와이프에게 악을 쓴다는 말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남편은 이 말이 왜 문제인지 모르겠다며 답답해했다. 나는 그 말은 굉장히 증오 서린 표현이며, 나를 미친 여자 취급하는 것 같다고 따졌다. 결국 나의 거듭된 문제제기 끝에 남편은 악 쓴다는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몇 년 뒤. 아기와 함께 방문한 시댁에서 "악을 쓴다"는 말을 다시 들었을 때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요새 아기가 목소리 내는 법을 알아가는 중이라 소리를 자주 지른다. 그런 아기에게 시아버지가 "우리 OO가 악을 쓰네. 그래 잘한다. 더 악 써 봐 봐"라고 말씀하셨다. 시아버지는 함박웃음을 지으시면서 세상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아기를 보고 계셨다. 남편은 나를 향해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분명 얼굴로 "거봐, 내가 맞았지? 공격하는 말 아니라니까"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어리둥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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