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정여 Oct 07. 2019

참기름 한 스푼

이런 일로 싸웠다(3)

나는 미각이 예민한 편이다. 삼다수는 입에 맞지만, 에비앙이나 진로 석수는 입에 안 맞는다. 코카콜라는 마시지만, 코카콜라 제로는 마시지 않는다. 오이소박이는 좋아하지만, 오이를 넣은 김밥은 싫어한다. 카스처럼(카스+처음처럼을 섞은 폭탄주)보다 구름처럼(클라우드+처음처럼)을 선호한다.


이런 내가 참기름을 잔뜩 넣은 미역국을 참고 먹을 리도 없다.


소고기 미역국을 끓인 주말 아침이었다. 냉장고에서 참기름을 꺼내 수저에 부었다. 다 끓인 미역국에 참기름 한 방울은 내게 찐빵 속 팥소와 같다. 남편 국그릇에 한 방울, 내 국그릇에 한 방울. 남은 참기름은 주저 없이 싱크대에 버렸다. 뒤이을 참사를 예상하지 못한 채로.


남편의 눈이 뒤집어졌다. 그는 "어떻게 참기름을 버릴 수 있느냐"라며 나를 파렴치한 취급했다. 남편은 마치 내가 싱크대에 참기름을 병째로 들이부은 것마냥 경멸하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봤다. 남편과 나는 공개적으로 설명하기 부끄러울 만큼 정말 심각하게 다퉜다.


우리 집 참기름은 남편의 시골에서 올라온다. 남편의 작은 아버지가 시골에서 직접 깨를 농사 지으시고 방앗간에 맡겨 짜는 진짜배기다. 참기름뿐 아니다. 우리는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가 담그신 고추장, 된장, 매실청, 복분자주 등 귀한 식재료를 얻어 먹고 있다. 작은 아버지는 명절에 내려갈 때마다 "복분자주 줄까, 참기름 다 먹었어?"라고 물으며 살뜰히 챙겨주신다.


남편에게는 참기름 한 스푼이 작은 아버지의 땀방울과 다름 없었다. 작은 아버지의 땀방울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버리는 와이프가 야속했을 테다. 남편은 직접 말을 하지 않았지만, 아내가 자신의 집을 무시한다고까지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 나는 이런 남편을 이해하지 못했다. 고작 한 스푼도 안되는 양이었다. 미역국에 그냥 넣어 느끼함을 참고 먹어도 됐지만, 그저 맛있게 먹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나는 남편이 자기 가족 울타리 밖에 나를 두고 비난을 퍼붓는 것처럼 느꼈다. 그의 친척과 가족이 된 지 1년도 안된 나에게는 가혹한 일이었다.


시댁 김치는 최고다.(출처=pixabay)


김치를 대하는 그의 태도도 비슷하다. 해마다 시어머니는 작은 어머니와 함께 김장 김치를 담궈 우리 집으로 보내신다. 맞벌이를 하다 보니 매번 김치가 남는다. 친정에서 보내는 김치까지 더해지면 크지도 않은 김치 냉장고가 터질 거 같다. 시어머니는 김장 김치를 올려 보내실 때마다 오래된 김치는 버리라고 하신다. 하지만 참기름 한 스푼에 가슴 저민 이 남자는 절대 버리는 법이 없다. 김치찌개를 곰국 끓이듯 한솥 끓여 먹을지언정.  


이제는 이런 남편을 깊이 이해한다. 육아휴직에 들어간 나는 남편 덕분에 묵은지를 끼니마다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나는 복날에 작은 아버지댁에 전복을 보내거나 작은 어머니에게 화장품 세트를 선물하는 것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이전 16화 수도권 여자의 말투와 지방 남자의 어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