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에세이
2021년 7월 엘지전자 휴대폰 사업본부가 사망한다.
이제 엘지 휴대폰이 염라대왕 앞에 서게 되었다.
염라대왕은 저승왕들에게 명하여 엘지 휴대폰이 이승에서 행한 일들을 업경대에 비추어 살펴보도록 한다.
각 저승왕이 보고하는 동안 업경대에는 엘지 휴대폰이 자신의 연구개발자, 디자이너, 그리고 소비자들에게 저지른 모든 행적이 하나의 거짓도 없니 고스란히 비친다.
다음은 저승왕들이 보고하는 엘지 휴대폰이 잘못한 세 가지 행적이다.
휴대폰을 개발하는 무선사업부 본부건물은 물론 연구동 건물의 사무실에는 '일등 LG'와 같은 구호가 적힌 현수막들이 걸려있다. 더구나 엘지의 브랜드 색깔이 빨간색이다 보니, 더 개성공단 공장 내부처럼 보인다. 최첨단 소비자 IT제품인 스마트폰이 70년대 구로공단 공장에서나 볼 법한 분위기에서 연구되고 있다.
엘지는 '인화(人和)'를 경영이념으로 삼는다. 이것이 엘지 스마트폰 사업의 발목을 잡는다. 그 '화합'은 어떤 기능과 디자인을 개발하는데 합의와 동의의 형식으로 모두가 만족해야 일이 진행이 되는 형식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전략과 속도가 중요고, 자동차나 패션 상품처럼 개성이 중요한 스마트폰을 만드는데, 모두의 합의를 통해야 하므로 빨리 나갈 수 없다.
동일한 사업을 하던 삼성전자 무선 사업부의 의사결정 구조를 보면 자신의 업무에 자신이 책임과 권한을 가지고 결정을 한다. 속도가 빠르다. 디자인은 디자이너가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결정을 한다.
삼성을 비유하자면, 트램폴린 위에 놓인 쇠구슬들과 같다. 구슬들이 울타리 안에 있어서 밖으로 떨어지진 않지만 구슬들 간의 연결이 유연하고 느슨해서 각자가 마음껏 튀어 오를 수 있다. 튀어 오르지 못한 구슬들은 이미 높이 튀어 오른 구슬을 보면 더 튀어 오르려고 한다.
반면, 엘지 무선사업본부는 트램폴린 위에 끈적한 풀을 발라놓고 그 위에서 테니스공들을 튀기게 하고 있다. 그 공들 사이에는 두껍고 무거운 밧줄로 서로 연결되어 있어, 어느 한 공이 튀려고 하면 주변의 다른 공들이 무게로 끌어내린다. 결과적으로 다 같이 낮게 튀거나 다 같이 가만히 있어야 하는 구조이다. 삼성에서는 이것을 '뒷다리 잡기'라고 부르며, 신입사원에게 삼성에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라고 교육한다.
엘지전자에서는 돌다리를 건너는 사람들 모두 함께 돌다리를 두드려봐야 하고, 건너고 나서도 제대로 건너온 건지 확인하기 위해서 다시 돌다리를 두드려본다. 그렇다. 엘지전자는 끈적한 조직 문화가 있다. 덕분에 '좋은 게 좋다'라는 암묵적인 습관이 생겼다.
누구 하나 튀어서도 안되며, 모두의 의견이 반영되어야 한다. 발표자료('장표'라고 그들은 부른다)에 개인의 이름을 넣지 않는다. 팀의 이름만 넣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의사결정이 느리고, 개인은 없으며, 책임은 팀 안에서 분산된다. 그래서 뾰족한 의사결정이 아닌, 무난한 의사결정을 하게 된다.
빠른 실패를 통해서 배우는 것도 쉽지 않은 구조이다.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은 기존의 사람들이 엮여있는 밧줄에 동화되지 않고는 자리를 잡을 수 없는 형태이다. '순혈주의' 때문에 그 밧줄을 내어 주지도 않는다.
정말로 끈적한 전우애가 아닐 수 없다.
염라대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속도가 생명인 스마트폰 사업에서, 이 구조로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하였구나."
스마트폰을 '기술'로 본 죄
'사용자 인터페이스 연구실'이라는 조직 명칭을 가진 팀이 가산디지털단지 ('가리봉동' 바로 옆) 내에 있다. 이들은 '디자인' 소속이 아니다. 엘지전자의 다른 사업부 사용자 경험 디자인팀들은 양재에 있는 디자인 센터에 있는 반면 무선사업부에서 사용자 경험을 디자인하는 인력들은 '사용자 인터페이스 연구실'이라는 이름으로 엔지니어들과 함께 '디지털' 단지 내에 흩어져있는 건물 중에 하나에 일하고 있다.
스스로를 '경험디자이너'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도 한참 뒤의 일이긴 하지만, 그 디자이너들이 건물 밖을 나가서 볼 수 있는 것들은 정부의 지원으로 싸게 공장부지를 마련한 중소기업들, 아웃렛에 저렴한 옷들을 사러 온 시민들과 중국이민자들이 장악한 차이나타운이다.
염라대왕은 생각한다. "이것들에 영감을 받아 아이폰과 갤럭시 S의 디자인과 경쟁하겠다고?"
날짜를 알 수 없는 어느 점심시간이다. 근로복지공단 아파트 건너편의 무선사업부 건물에서 어느 한 체격 좋은 중년 직원이 걸어 나와 건물 앞쪽 골목에 있는 곰탕집으로 걸어 들어간다. 곰탕집 골목 맞은편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스탠딩 카페에서 들고 나온 커피를 직원들이 문 앞에 서서 마시며 끝나가는 점심시간의 아쉬움으로 대화를 하고 있다.
곰탕집에 들어갔던 그 중년의 직원은 점심식사를 끝낸 듯 이쑤시개를 하나 물고 가게를 나온다. 손에는 곰탕집에서 서비스로 제공한 듯한 커피를 종이컵에 들고 있다. 그 사람은 엘지전자의 직원점퍼 (소위 말하는, 진청색 공장잠바)를 입고 있다.
카페 앞에서 커피를 마시던 한 직원이 이번에 새로 입사한 직원에게 얘기한다. '저분이 마케팅 임원이셔'
구로, 가리봉은 70년대 한국의 소비재 산업을 이끌었던 성지임에 분명하다. 나름 섬유산업의 메카였으므로 이후 패션단지로 변모한 것까지는 이쁘게 봐줄 수 있다. 패션의 '시작'이 아닌 '종착지' 이긴 하지만. 이후에 '디지털 단지'라는 이름이 붙어 이미지 쇄신을 하고 있다지만 여전히 '인터넷쇼핑몰'의 메카이지 정작 '디지털'의 무엇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더구나 스마트폰은 '디지털' 기술이 사업의 핵심이 아니다. 앱 생태계위에서 새로운 사용자 경험을 만들어 제공하는 플랫폼사업이다. 연구원들이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환경이 '소비자를 위한 좋은 경험'을 만들어내기 위해 필요한 '좋은 경험'을 하기에 매우 부족한 곳인 것이다.
같은 시간, 삼성전자 디자인실에는 전용 사운드스튜디오에서 휴대폰에 들어가는 모든 소리를 디자인하고 있다. 그리고 스 스튜디오에서 디자인실 직원들이 직접 노래를 불러서 레코딩한 앨범도 만든다.
반면, 가산동에서는 많은 테스트기기가 쌓여있고, 다른 직원들이 오가며 내는 소음이 있는 사무실 한쪽에서 한 연구원이 휴대폰에 들어갈 사운드 소스를 만들고 테스트하고 있다.
사장은 임원들과 주요 프로젝트 진행자들이 함께 하는 오전 미팅에서 얘기한다. '우리는 대기업처럼 일해서는 안 된다. 중소기업처럼 민첩해야 한다'. 정말이다. 엘지전자 엘지마크만 떼고 사무실 사진을 보여주면 '어느 중소기업'의 기술 개발 사무실과 다를 바 없다.
연구소 건물을 나와 2분만 걸어가면 패션쇼핑몰의 거리답게 커다란 광고들이 많이 있는데, 그중 체조의 여왕 '손연재'의 사진이 크게 나온 엘지 옵티머스 뷰 2의 광고가 눈에 띈다. 여자 스포츠선수 선호도 1위는 김연아이고 손연재는 2위이다. 사람들의 눈에는 이렇게 비친다. 김연아는 삼성이 데려갔으니 남은 게 손연재? 이것이 '일등엘지'의 만년 이등 이미지이다.
광고 모델인 두 선수 모두 실력과 미모를 갖추었다. 하지만 사람의 상호작용에서 그 매력을 볼 수 있는 그 김연아 선수의 스마트한 성격이 삼성 브랜의 이미지를 잘 말해주는 반면, 손연재 선수의 강점이던 밝고 사랑스러운 외적이미지만큼 까지는 '옵티머스'라는 트랜스포머에나 나올법한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는 엘지전자 스마트폰이 잘 부합하지 못한다.
TV는 개인의 개성을 연장하는 물건이 아니지만, 휴대폰은 사용자의 개성을 연장하는 몸의 일부분이다. 기술만으로는 소비자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엘지전자 휴대폰 사업부는 고객의 마음을 읽는 게 아니라, 고객의 입을 바라보고 있다.
어느 날 회의시간이다. 실장부터 이하 팀장과 주요 담당자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주요 안건을 서로 이야기하며 40분의 시간이 흘러간다. 모두 한 마디씩 하지만 어느 하나 자신의 입장과 결론을 명쾌히 얘기하지 않는다.
그때 순서가 된 한 프로젝트 담당자가 새로운 콘셉트를 소개한다. 그러자 팀장 한 명이 발표자에게 되묻는다. '누가 그렇게 한 회사가 있습니까?'. 담당자가 대답한다. '아직 없습니다.'. 어느 팀장이 말한다. '아무도 안 한 데는 다 이유가 있을 텐데, 왜 그렇게 하려고 하는 거죠? ROI (투자대비회수)가 불분명한데....'. 팀장은 말끝을 흐린다.
이렇게 결정이 필요했던 몇 가지 이슈들이 결론도 없고, 다음 액션도 정해지지 않은 채 회의는 끝났다. 한 시간 동안 모두들 각자의 아이디어만 한 마디씩 얘기하고 끝난 것이다. 실장도 어떤 방향을 주지 못했다. 의견 충돌도, 강한 주장도 없다. 매우 공평하고 민주적인 회의처럼 보인다.
사업부 내에는 많은 위원회가 있다. 사용자 인터페이스 연구실외부에도 엔지니어가 리드하고 있는 UX(사용자경험) 관련 태스크가 있고 상품기획팀에서도 사용자경험을 주제로 상품을 기획한다. 그럼에도 그 어디에도 '사용자 감성'에 대해 얘기나 '외부 기술/비즈니스 연합'을 체계적으로 얘기하는 곳은 없다. 모두들 경쟁사의 새로운 기능을 분석하고 갭(다른 점)을 찾기에 바쁘다.
그래도 연구실에서는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이벤트를 주기적으로 진행한다. 심지어 순수히 특허 출원만을 위한 아이디어를 뽑아내는 태스크도 진행을 한다. 이렇게 뽑아진 아이디어들은 인화(人和)를 중요시하고 합의가 중요한 조직문화답게 투표를 통해서 실제 개발시킬 것을 뽑아낸다. 아이디어를 뽑아내는 데는 진심이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다른 경재사와는 완전히 차별화되는 것들이다. 3:4 화면비율의 Vu(2007), 뒷주머니에 최적화된 곡선몰입형 디스플레이의 G Flex(2013), 모듈식 하드웨어 구조를 가진 G5(2016), 폴더블스크린 보다 더 실용적인 V50 DualScreen (2019), 콘텐츠 자체가 가로로 돌아가는 세상에 실제 액정화면을 돌릴 수 있게 만든 Wing(2020), 출시는 못했지만 기본 화면에서 20% 더 화면을 키울 수 있게 만든 롤러블폰까지, 소위 '기상천외'한 제품들을 쏟아내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소비자의 욕망을 만족시키지는 못하고 사라진다.
염라대왕은 이 대목에서 잠시 마음이 흔들린다.
"생전보도 못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열심히 만드는 연구원들의 노력이 기특하구나. 하지만 소비자들의 마음을 움직여 상품적으로 히트시키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는지고"
스마트폰산업은 사업부 내에서 만들어낸 소소한 기술적 아이디어들 간의 전쟁이 아니다. 규모와 생태계 선점을 목표로 하는 그룹차원의 전략이 필요한 비즈니스의 속도 전쟁이다.
연결하고 확장하고 선점하여 소비자들이 그들의 생태계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게 해주어야 하는 고도의 장기적 전략싸움인데 엘지전자 휴대폰은 정말로 휴대폰 안에만 갇혀있다. 엘지그룹차원에서 휴대폰사업에 대한 전략은 약하고 사업부자체의 독립적 전략에 의지한다.
그런데, LG가 주장하는 ‘일등 LG’가 되기까지의 단계적 목표와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과 실행 방안이 보이지 않는다. 스마트폰 사업은 디스플레이, 배터리, 화학처럼 끈질긴 연구와 장인 정신으로 앞서갈 수 있는 소재 산업과는 성격이 다르다.
또한, 가전제품처럼 이미 안정화된 하드웨어 기술 플랫폼 위에서, 상대적으로 변화가 느린 트렌드에 맞춰 성능과 편의성만을 개선하며 안전한 결정을 내리는 방식으로 생존할 수 있는 사업도 아니다.
빠른 속도를 위해 그룹, 전사차원의 전략과 리드가 필요하지만 엘지의 창업배경에 개별 사업부의 독립적 의사결정을 존중하는 문화가 있기 때문에 엘지전자차원의 전략 없이 개별 사업부만의 리드로는 속도에 한계를 보인다. 이것이 단지 무선사업본부만의 잘못으로 본부가 해체된 것이 아닌 이유다.
저승왕들의 보고가 모두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심판의 시간이 다가왔다.
엘지 휴대폰은 눈물을 흘리지만 이미 늦은 것을 알고 있다. 최후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염라대왕은 최우의 판결에 앞서 안타까움과 동시에 분노에 찬 목소리로 판결을 내린다.
"스마트폰은 매우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정보기술과 소비자트렌드를 미리예측하고 경쟁과 연합으로 시장선점을 위한 전략적 결정들을 해나가야 함에도 열심히만 했지 스마트하지 못하게 사업을 운영하였다.
경영진들은 방향성 있게 장기적 전략적 투자를 하는 대신 다양한 라인업을 만들어 어느 것 하나만 걸리기를 기대하며, 제품의 감성적 소구점을 발전시키는 대신 스펙으로 정리하기 좋은 기능과 성능을 앞세우는 바람에, 어떠한 브랜드 메시지도 고객의 기억에 남기지도 못했다.
그로 인해 적어도 중국보다는 더 좋은 스마트폰이라고 믿고 엘지폰을 사주었던 엘지전자 스마트폰 소비자들에게 실망감과 심지어 아이폰 앞에서 엘지폰을 꺼내 놓기도 부끄럽게 만드는 일을 저질렀다. 동시에 엘지전자가 스마트폰을 계속 만들었다면 누릴 수 있었던 고객을 위한 IT 생태계의 중요한 부분을 놓쳤고 브랜드 신뢰도에도 영향을 주었다."
염라대왕은 잠시 생각한다....
"그러함에도, 엘지전자의 무선사업본부의 많은 개발자와 연구자들은 최선을 다하여 기술개발에 노력하고, 껍질만 보기 좋게 상품을 포장하여 소비자들에게 높은 가격을 받으려고 하지는 않았으며,
특히 다른 사업부 디자인팀들에 비해 좋지 않은 환경에서도 묵묵히 매년 다양한 디자인을 내놓으려고 노력한 사용자인터페이스 연구실 직원들의 노고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무선사업본부를 해체하여 엘지전자 전체의 순 영업이익을 막대하게 증가시키는 최후의 희생을 보여주었음을 정상참작하여, 무간지옥으로 보내지 않으려고 한다."
"너희들을 다시 환생시켜 주도록 하겠다. 다시 기회를 주겠단 말이다."
"너희들은 이제 '자동차 전장 사업부로' 다시 태어나도록 해라.
럭키금성 시절 때부터의 특기인 화학, 소재, 부품사업에서 다시 시작하여 이전불명예를 씻고 진정으로 엘지전자에 그동안 진 빚을 갚는 것은 물론이고, 이제까지 쌓아두고 자랑하지 않았던 그 많은 기술과 지식을 사용하여 이제 바퀴 달린 스마트폰인 전 세계 전기 자동차 구성품의 90%를 장악하여 이루지 못한 일등의 꿈을 이루도록 명하노라."
저자생각:
엘지전자 무선사업본부가 해체된 지도 이미 몇 년이 지났다.
만약 이 글을 그 당시에 썼다면, 무선사업부에서 일했던 분들 중 일부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지금, 그분들 또한 각자의 자리에서 새롭게 자리 잡았을 것이기에, 이제야 약간의 각색을 통해 이 얘기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앞서 다소 비꼬는 방식으로 표현했지만, 나는 사실 엘지전자에서 휴대폰을 만드던 연구원이었다. 그전에는 삼성전자의 휴대폰을 만드는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두 기업에서 직접 경험했기에 브랜드는 다르지만 동일한 사업을 하던 두 조직이 어떻게 달랐는지를 명확히 알고 있다.
엘지전자가 말하는 '혁신'은 IT분야에서 흔히 말하는 '파괴적 혁신(Distructive Innovation)'과는 다르다. 엘지의 혁신은 기존의 사고방식을 바꾸는 기술을 통해 고객의 실생활을 더욱 편리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게 기존에 없던 완전히 새로운 제품 군이라 하더라도, 고객이 받아들일 수 있는 속도에 맞추어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엘지식 혁신이다. 반면, 경쟁 기업들이 보여주는 미국식 혁신은 고객의 니즈를 두세 배 앞질러 산업의 기존 생태계를 파괴하고, 모든 시장을 장악하는 방식이다.
엘지전자에서는 삼성전자보다 먼저 수평적 의사결정 구조를 정착시켰다. 또한, 애플보다 9년이나 앞서 '아이패드'라는 동일한 이름으로 스마트패드를 만들었고, 세계최초로 롤러블 TV를 개발하는 등, 아이디어를 기술로 실현하고, 기술을 실제 상용화하는 능력을 갖춘 기업이기도 하다.
그러나 엘지전자는 안드로이드와 같은 플랫폼 시장에서의 비즈니스 전략을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전략을 세우는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록 플랫폼이 시장을 차지해나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IT기술과 생태계의 속도는 한번 놓치면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데, 엘지전자는 그런 '속도'의 기업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보면 엘지전자는 여전히 자신의 영역에서 앞서나가고 있다. 현대차가 '추진력', 삼성이 '전략'이라면 엘지는 '뚝심'이다.
구호나 칭찬, 민주적 디자인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엘지전자 무선사업부는 나와 잘 맞지 않았던 애증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함께했던 훌륭한 기술자들과 디자이너들이 더 중요한 사업부에 이식되어 활약하며, 엘지에서 만든 제품이 전 세계 모든 곳에서 사용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