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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Zhu Aug 16. 2022

그분이 오셨습니다.

코로나 투병기

0일 차

휴가 후 복귀 첫날이었으니 바쁜 게 당연했다. 쌓인 메일이 적지 않았고 긴급히 처리할 일과 여유를 가져갈 수 있는 일로 대강 분류하기만도 머릿속은 분주했다. 오후에 회의를 할 때 목이 좀 칼칼한 듯했는데 대수롭지 않았다. 평소에도 자주 잠기는 편인 데다 아마도 ‘증상’으로 가늠할 정신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퇴근 후에야 그 정신을 챙겨 ‘아픈가?’ 했는데 밤늦게 J에게서 톡이 왔다. 오후부터 목이 아픈데 나는 괜찮냐며. 우리는 휴가의 마지막 이틀을 함께 보낸 터였다.

‘올 게 왔구나!’

얼마 지나지 않아 J는 의심의 여지없는 ‘두 줄’ 사진을 보내왔다. 나는 음성이 나왔지만 아닐 리 없어 보였다.


1일 차

잠을 설쳤다. 다음날 중요한 시험이나 회의 등 긴장되는 일이 있어도, 천둥번개에 빗소리가 요란해도 잠만큼은 푹 자는 나로서는 아주 별일이다. 깊이 잠들지 못한 건 미리부터 걱정해서가 아니라 그냥 ‘아파서’였다. 인후통이 제대로 시작됐다. 걸어서 5분 거리에 종합병원이 있고 동네에 한정하여 선별 진료소와 진료병원을 검색하면 그곳이 최상단에 조회됐다. 문제는 종합병원의 까다로운 절차는 코로나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단 것. 당일 검사도, 진료도 안 된다며 “가까운 병원 가시지 왜 여기로 오셨어요?” 하길래 “여기가 집에서 제일 가까워요.” 대답은 그리 했지만 거리가 아니라 빠른 판정을 받는 게 중요해서 바로 나와 반대 방향의 이비인후과를 찾았다.

“네? 음성이라고요?”

숱하게 신속항원검사를 받았는데 음성이라는 결과를 듣고 안도가 아닌, 그 반대의 마음이 들긴 처음이었다. ‘확진이어야 격리를 할 수 있는데......’ 단순히 회사 가기 싫어 하는 말이 아니라 정황상 90% 이상 확신했기 때문에 누군가와 접촉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의사 선생님께 PCR 검사 의뢰서를 부탁했고 선생님 역시 코로나가 맞을 거 같다며 동의하셨다.


2일 차

검사를 받은 지역구 보건소는 결과 통보가 비교적 빠른 곳이었다. ‘OO구 보건소가 결과가 빠르다고 해서......’란 문구가 인터넷에 종종 보이기도 했고 서너 번 직접 경험한 이력이 그랬다. PCR만 통용되어 새벽부터 길게 줄짓던 시절에도 당일 저녁 6~7시면 문자가 왔었다. 그런데 도착부터 검사까지 5분이 채 안 걸렸을 만큼 사람도 거의 없었건만 전날 늦게까지 PCR 결과가 오지 않았다. 혹시 전화번호를 잘못 적은 게 아닐까 불안했다. 이때도 양성일지 음성일지가 궁금한 게 아니라 출근 시간 전에 ‘공식 확진’을 받느냐 마느냐에 맘을 졸였다. 통보까지 공지된 24시간을 꼬박 채울 경우를 대비하여 새벽에 코를 한 번 더 찔렀는데 드디어 두 줄. 좋을 일이 아닌데 마음이 놓이는 건 대체 뭐람. 번호 오기입은 아니었다. 아침 7시 오피셜리 ‘양성’.


농땡이를 굉장히 바랐던 것 같지만 거듭 말해 스스로 바이러스 덩어리라고 믿는 자의 심리였을 뿐, 실상은 휴가 후 연이어 자리를 비우는 꼴이라 심히 눈치가 보였다. 전에는 열흘에서 2주까지도 공가를 줬고 밀접 접촉인 주변 동료까지 집으로 보냈는데 지금은 혼자만 딱 일주일 격리인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불편한 마음은 그대로였다. 상사에게 보고를 할 때마다 말끝에 ‘죄송합니다’를 붙이면서 생각했다. 참 여러 가지로 몹쓸 병이다.


3일 차

회사에 끼친 폐는 폐도 아니라고 느끼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진짜 폐를 끼친 곳은 ‘내 몸’이었다. 둘째 날 새벽 열감이 느껴졌을 때 37.8℃가 최고였으니 미열 수준이었고 오한이나 근육통 같은 몸살도 크게 없었다. 다만 목이 너무, 너무너무너무, 아팠다. 감기와는 확연히 다르다더니 정말 그랬다. 오징어 손질하듯 목구멍 내벽에 잘게 칼집을 내어놓고 뜨거운 물을 아랑곳 않고 부어대는 것 같았다. 침을 삼킬 때마다 그 쓰라림이 말도 못했다. 그런 목을 뚫고 기침이 올라오면 가슴 전체에 지진이 난 줄 알았다. 참말로 내 몸에 못할 짓을 했다 싶었다. 지난봄 앞자리, 옆자리 가리지 않고 우후죽순 동료들이 확진되던 시기를 무사히 통과했다. 마스크 없이 두어 시간 마주 앉아 식사를 했던 지인이 확진 소식을 전해왔을 때도 안 걸렸다. 이렇게 저렇게 접촉이 의심되어 검사도 참 여러 번 받았는데 재차 음성이었다. 그래서 안일해졌었나 보다. 다시 유행 중이나 한번 느슨해진 방역이 도로 조여지길 바라긴 어려운 상황이다.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 개인이 조심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몸을 사렸으면 안 걸렸을까도 싶지만 칠렐레팔렐레 사람 많은 곳을 쫓아다닌 것도 분명한 사실이라 반성이 되었다. 부디 후유증만 남지 않기를.


4일 차

절망이다. 격리는 절반이 넘어가는데 차도는 일도 없다니! 견딜 만한가 그렇지 않은가와 별개로 첫날부터 쭉 증상이 전혀 ‘변화 없음’에 두려웠다. 과연 이 고통의 끝이 있긴 한 걸까? 지인들이 아니었으면 진정 낙담했을 것이다. 코로나를 겪었던 이들은 경험담으로 나를 안심시켰고 겪지 않은 이들은 나름의 위로를 건네며 마음을 써줬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다시금 의지를 다잡았다. 입맛도 없고 만사 귀찮지만 또 주방으로 갔다. 평소 집에서 식사를 거의 하지 않고 요리는 더욱 안 한다. 간장, 식초 같은 기본양념도 없다. 그러나 격리가 시작되고 ‘잘 먹어야 한다’를 무슨 사명감처럼 붙들었다. 요리알못이지만 집에서 혼자 뭐라도 해 먹어야 하는 지금의 나에게 레토르트와 밀키트는 정말 사랑이었다. 미역국, 낙지전골, 떡볶이...... 부지런히 해 먹었다. 너무 부지런했을까? 아픈 사람 치고 어째 살이 더 오른 것 같다.


5일 차

어제의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었다. 목 안 이물감은 여전하지만 쓰라림은 없어졌다. 완전히 멎진 않았지만 기침도 줄었다. 대신 콧물과 코막힘이 시작됐으나 ‘변화’가 생겼으니 됐다. 함께 또 따로 투병한 J도 기운을 좀 차렸다고 한다. 다행이다. 후각, 미각을 잃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아주 심하게 앓은 건 아닌 듯하다. 격리를 시작했을 땐 그때대로 업무 공백이 걱정이더니 서서히 복귀가 걱정이 된다. 남은 이틀은 일주일 지지고 볶은 집안을 정리하고 복귀를 위한 시동을 슬슬 걸어야겠다. 코로나로 확실히 배운 건 두 가지이다. 하나, 무조건 안 걸리는 게 좋다. 둘, 사람들한테 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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