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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미 선 Nov 26. 2023

조선남자 엿보기(1화)

여필종부

우리 집엔 조선남자 한 명이 있다.

조선 무.

조선간장.

조선 된장.

이런 거 말고 조선 남자 말이다. 

내가 조선 남자와 동고동락 한지는 41년째다. 


참 길게도 함께 살아왔다.

나보다 연장자 되시는  할아버지가 들으시면 " 예끼, 그까짓 거 가지고 뭘 오래 살았다고 그래."

하실지 모르지만 짧은 세월은 분명 아니다. 


조선남자는 동네 언니를 통해 만났다.

동네언니와 지금의  시누이가 윗집 아랫집에 살았는데 어느 날 중매 얘기가 나오게 되었단다.

마침 참한? 아가씨가  있으니 한 번 보자고 한 것이 그물코에 걸리고 말았다. 

이것이 일사천리로 결혼까지 이어지게 될 줄이야. 


80년대는 조혼 경향이 있어 스물 다섯 안팎으로 결혼들을 했다. 

나는 스물일곱 살이 되었어도 결혼에 대해 도통  관심이 없었다.

엄마가 내 스무 살 되던 해에  돌아가시고 혼자된 아버지 수발을 들어야 했던 상황이었다.

아버지는 그게 늘 마음에 걸리셨던 모양이다.


"너만 결혼하면 난 당장 죽어도 괜찮아. "

아버지는  조급증으로 나를 채근했다. 

아마도 아버지는 엄마의 부재와  보장할 수 없는 당신의 앞날을 불안해하셨을 것이리라. 

그전에 어떻게든 막내딸의 결혼을 성사시켜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 저런 이유로 나의 결혼은 성급하게 서둘러야만 했다.  

결혼은 그리 호락호락하면 안 되는 것임에도 나는 아버지에게 등을 떠밀리고 말았다. 

늦잠 자고 일어나 기차 시간을 보고서야 후다닥 뛰어가는 심정으로. 


선을 본 지 2개월.

겨우 두 달 만에  결혼식장의 신부가 되다니.

모든 일엔 완급이 있고 특히나 결혼은 신중하고 무거운 것임에도 이렇게 

구멍가게 뻥튀기 사듯 덜렁  결혼을 해버렸다. 


강원도로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시댁 용인으로 첫인사를 드리러 가게 됐다. 

낯선 땅 용인 그리고 시댁이라는 딜레마. 

그래도 어쩌랴!


시부모님께 절을 올리고  앉았는데 갑자기 

시아버님이  "여자는 여필종부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오래된 말씀이건만 지금도 그 말이 귀에 살아서 맴돈다. 

女必從夫  라? (여자 여, 반드시 필, 쫒을 종, 지아비 부)


친정아버지 보다 연세가 일곱 살 적으셨던 시아버님이 우리 아버지도 안 쓰시던 말씀을 하시니,

조선시대로의 회귀는 벌써 점쳐지고 있었다. 

그 말씀에 나는 시아버님이 어렵기도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예?"

하면서 반감을 표시할 처지도 못됐기에  "네 , 아버님."

고개를 깊게 숙여 그 말씀에  동조 아닌 동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시아버님의 공자왈 맹자왈  여러 말씀은 이어졌지만 그 내용은 지금 내 머리에 없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할 만큼 조선시대 세도가였던 안동 김 씨의 자부심을 현대까지 끌고 오셨던 

아버님은 늘 여자는 `종`이라는 개념을 아들들에게 주입시키셨다. 

그런 시아버지의 밥상머리 교육은 내게 그대로 파급효과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오늘의 조선남자는 어떤 말이든 자기 말에 토를 달면 안 되는 거였다.

"네 알았어요."

이렇게 순응해야만 그날이 평화롭다. 

거기다 뭐라고 한 마디라도 하면 그날은 회오리바람이 분다. 

어찌 사람이 옳을 때만 있을 것이고 못마땅할 때가 없을 것인가.


그것에 대한 반격도 있어야 반성도 하고 성장도 할 터인데 그게 주어지지 않아서 내 뱃속은 항상

부글부글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이제는 코딱지만큼이라도 반감을 표시하고 살지만 숱한 곤욕을 치르고 난 결과가  고작 이것이라면 

너무 억울하지 않나!


그는 집에 어떤 살림살이가  새로 들어왔으며 냉장고에 어떤 먹거리가 있는지 전혀 모른다.

냉장고를 연다는 것, 부엌을 얼씬거린 다는 것, 음식을 한다는 것,

음식 쓰레기를 버려준다는 것,  그것은 철저히 금기된 그의 행동 강령 속에 내장되어 있다.


집에 일단 들어오면 양말을 벗고 벌러덩 누워 tv를 켠다.

그리곤 뭐 먹을 거 없나  나를 쳐다본다. 

뭐라도 가져오란 표시다.


과일이든, 떡이든, 빵이든 있는 거 가지고 가면 손으로도 안 받고 입을 벌린다. 

어떨 땐 목이 막히도록 콱콱 처넣고 싶을 때가 있지만 `여필종부`라고 하셨잖은가.

아버님의 그 말씀의 최대 수혜자는 조선 남자다. 


그는 작은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이다. 

대인관계를 안 할 수 없는 입장이다. 

사회에서도 조선으로 안주할까?

아니다.


남자들끼리의  관계는 어쩌면 그리도 융통성 있고 유연한 건지.

다 먹고살자고?

분위기 맞추려고?

어쩔 수 없다고?

아무리 그렇다 쳐도 어쩌면 안과 밖의 사고가 그렇게 분리될 수 있는지 연구 대상이다.

집에만 들어오면 또다시 조선시대로 돌아가는 이유를  논문으로  쓰고 싶을 정도다.


그저 어떤 사람을 만나든 허허 거리는  성격 좋은 남자이고,

여자를 대할 때도 예의 바른 젠틀맨이다. 

오로지 만만한 콩떡.

먹다만 식은 죽.

닳아빠진 양말 뒤축인 마누라가 그의 부담 없는 도구가 되는 거다. 

부작용 없고 뒤탈 없는 천연재료인 것이다. 

그에게 나는.


 그는 아침에 사무실로 출근할 때는 스포티한 옷을 입고 나서지만  행사장이나 중요한 자리에 갈 때는 

꼭 양복을 입는다. 

그럴 때는 내가 양복을 골라 입혀야 하는데 스스로 해보라고 내버려 둘 때도 있다.

한참 뒤적거려 입고 나와서는 "이거 상하 색깔이 안 맞는 거 같아." 들여다보면 

상의는 갑순이표, 하의는 갑돌이표를 입고 어정쩡하게 서있다. 

"이거 아니잖아. 다른 걸 입었잖아."

그렇게 줄 세워 맞춰놨음에도 왜 굳이 다른 걸 골라 입는지.


저번에는 울산으로 조문을 간다길래  옷을 갖춰주고 넥타이만 놔뒀더니 뭐냐 이건 또.

어디서 오래전 쑤셔 박아 놨던 겨울 넥타이를 매고 나왔다.

아휴!

뛰어들어가 새 걸로 갖다 주면서 하여튼, 하여튼 (못마땅할 때 하는 소리)을 들으며 황소만 한 등짝을  보이고 나갔다. 


남자들은 핸드백이 없다.

작은 소품등은 대개 양복주머니나 바지 주머니가 수납장이 된다. 

손수건이나 핸드폰 자동차 키 등을 잊고 나갔다가 다시 들어올 때가 있다.

그것을 갖다 달라고 현관에서 구두도 안 벗고 명령을 떨군다.


"손수건 가지고 와."

손수건을 갖다 주면 손으로는 안 받는다.

옆으로 비스듬히 비켜서서 양복 주머니를 보여준다. 

여기다 넣으라는 지시다.

주머니에 악력을 가하면서 쑤셔 박듯이 넣고 "에구, 생전 손도 필요 없고 손가락도 필요 없어."

했더니  "이게 다 사람 사는 재미여."

그게 사람 사는 재미란다.

시켜 먹는 재미가 쏠쏠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역학관계를 되짚어 봐야 한다. 


며칠 전부터 거실 조명이 껌벅거린다.

좋게 말하면 나이트클럽의 분위기요, 나쁘게 말하면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이다.

조도가 너무 낮아서 신문조차 보기 힘들다. 

저걸 좀 어떻게 해보라고 했건만 조선 남자는 무감각이다.

움직이기 싫어하고 손으로 하는 건 굼뜬 그가  할 수 있는 건 "내버려 두라."이다.

일 년이 갈지 몇 년이 갈지 누가 와서 고쳐주지 않으면 조명은 맨날 나이트클럽 흉내를 내게 될 것이다.


그와 살아온 시간이 길다 보니 내장의 길이까지도 감이 온다지만 

아직도 그를 모르겠다.

외출을 할 때도 그는 항상 앞장서서 걸어가고 뒤에 마누라가 종종거리고 쫓아가는데 

뒤도 안 돌아보고 간다. 

보따리를 들고 가든 망따리를 들고 가든  상관없이 빠르게 걷는다. 

요즘은 그나마  "이것 좀 들고  가요."라고 잔소릴 하는데 조금 귀가 뜨이는 모양새다. 

받아 들고 걸어가다가도 가끔 뒤도 돌아보니 말이다. 


사람들은 이런 얘길 하면  우선 근본적인 잘못은 내게 있다고 핀잔을 준다.

그 버릇을 왜 아직까지 못 고치고 오냐 오냐 받아 준거냐고 따진다. 

스스로 구덩이를 판 거라고 오히려 화를 내면서 나를 공격한다. 

그럴 때면 억울하기 짝이 없다. 



두 달 만에 결혼.

짧은 데이트 기간에는 조선시대가 보이지 않았다. 

예의 바르고 점잖은 모습이 좋아 보였다. 

그것이 화근이다.

탐색 실패다.


갑자기 결혼을 하고 21세기를 살고 있으면서 탕건을 쓰고 도포를 입은 조선시대 남자가 보이면서 

나는 참으로 난감했다.

의사 표현이 자유롭지 않은 환경을 견디다 보니  이불 뒤집어쓰고 울다가 

잠이 들 때도 많았다.

이대로 모든 걸 청산하고 싶은 충동도 왜 없었을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더구나  어린 시절부터  세뇌되어 온 남자라는 권위의식.

가부장제의 위엄.

이런 요소들은  여자와 대등한 것에 거부감을 먼저 느낀다. 

내가 돈 벌어다 주는데 이것도 못해?

밖에서 세찬 바람맞고 왔는데  집에서 뭘 했다고.

이런 의식이 지배적이다. 

이러다 보니 자기는 주인이고 나는 하녀 구조가 된 셈이다.


하녀가 쥔장에게 말대답하면 안 되는 거지.

옛날로 말하면 칠거지악이지. 

굳어진 생활 속에서 불편해도 참고 억울해도 참으면서 살아왔다.

아이들이 크면, 애들이 결혼하면, 좀 나아지리라는 희망으로.


이젠  조금 유연해지긴 했어도  정말 달라지는 건 불가능할까?

조선시대가 아님에도 조선시대의 남자로 또 그 마누라로  살아내면서 

내가 흘린 눈물은 몇 세숫대야가 될지 모른다.

눈구멍과 콧구멍으로 흘러나오던  프로락틴  순도 100% 농도에도 

그는 변하지 않았다.

본래 얼굴이 변하지 않듯이 그런 거다. 

이런저런 이유로  조선과 현대의 양태를 짊어지고 오늘도 내일도 나는  끙끙대고 언덕을  올라가고 있다.





인공지능 시대.

이런 시대에도 도포자락 펄럭이며 조선시대로 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도 있다고, 이런 사람과 지금껏 살아왔다고 이곳에 공개합니다.

여자라는 이유로 가부장제의 모순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살았던  삶의 얼룩무늬들을 쌉싸름하게 

무쳐낸 조선남자 엿보기.

조선 아닌 조선으로 살아온 한 여자의 독백으로 브런치 문을 힘껏 밀었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올립니다.

낯설고 물선 이곳이지만 앞으로 재밌고 훈훈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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