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자이거나 혹은 강박성 성격장애이거나
수 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초등학교 입학식 날이 생각난다. 2월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또래보다 한참 작은 키, 한 살 어린 나이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아직은 엄마 품이 더 편할 작은 아이들로 복작거리던 교실에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입학을 축하합니다. 담임 선생님과 인사가 끝나면 운동장으로 모이세요.' -사실 방송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방송이 끝나자 웅성거리는 아이들 틈으로 선생님이 질문을 던졌다.
"지금 방송에서 뭐라고 했는지 들은 친구?"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담임 선생님은 나를 바라보며 기대의 눈빛을 보냈다.
- 인사가 끝나면 운동장으로 나오라고 했어요.
교실 창문 밖에 모여있던 엄마들 사이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당연히 우리 엄마도 있었다. 우리 엄마는 그날의 일화를 직장에서도, 길 가다 마주치는 이웃주민에게도 했다. '우리 애는 유치원을 다니지도 않았는데, 벌써 한글도 잘 알고, 입학하자마자 발표도 하고, 담임 선생님한테 칭찬도 받았다니까?' 그 이야기를 십 수번은 들을 때쯤, 내 마음속에는 작은 고래가 생겨났다. 잘하면 칭찬을 받는다. 그리고 칭찬을 받으면 엄마가 기뻐한다. 그리고 엄마가 기뻐하면 나도 기쁘다. 그런 마음으로 스물몇 해를 더 살게 되었다.
30대가 된 나는 건강에 관심이 많다. 처음에는 건강 관리를 위해 헬스를 시작했다. 운동을 가르쳐 주던 친구가 매일매일 칭찬으로 격려했다. 운동을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친구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100일 뒤로 바디프로필 촬영을 예약했다. 이왕 촬영을 하기로 한 것 허투루 할 수는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퇴근하면 헬스장에 가서 두세 시간을 보냈고, 직장 동료들과의 점심은 멀리 하고 매일 닭가슴살에 현미밥을 먹었다. 어느 날은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렇게 운동을 열심히 하는 걸까? 그런데 그런 생각은 금세 '아니야. 누가 봐도 멋진 모습으로 바디프로필을 찍고야 말 거야.' 하는 생각으로 뒤덮이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100일이 지났고, 바디프로필 촬영을 하루 앞두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오른 인바디 시험대에서 나는 체지방률 10.5%라는 위대한 성적을 받았다. 하루 전에는 되도록 무리한 운동을 하지 말라는 트레이너 선생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맨몸 머슬업을 한 시간 진행하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이미 일주일 전부터 단수를 위해 급수 조절을 하고 있었고, 그날 내가 마신 물은 한 모금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지난 100일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오가던 헬스장 주차장에서 나는 뒷문짝과 휀더를 기둥에 갈아버렸다.
날이 밝자마자 촬영을 하기도 전에 서비스센터에 갔다. 문짝의 상태가 심각하여 교체를 하는 것은 당연하고, 휀더를 살릴 수 있을지 여부도 불투명하다고 했다. 차를 센터에 맡겨두고 바디프로필을 촬영하러 갔다. 멋진 성적만큼 만족스러운 사진을 찍었지만, 새로운 도어가 한국에 도착하는 약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문짝이 찌그러진 차를 타며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할 일이었나."
바디프로필을 찍고 난 이후엔 그동안 하고 싶었던 다른 운동들을 했다. (다음 날 헬스에 방해가 될까 봐 다른 운동은 참았기 때문이다.) 러닝 크루에 가입하고, 아이러니하지만 크루원들과 실내 클라이밍에 갔다. 크루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꽤나 등급이 높은 암벽 앞에 섰다. 탑까지 딱 한 팔이 남았을 때,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뒤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나를 계속해서 응원하고 있었고, 처음 본 그들에게 실망감을 주고 싶지 않았다.
두 팔로 대롱대롱 탑을 찍었을 때, 사람들의 박수소리와 함께 나는 추락했다. 불시착을 하는 순간 뭔가 잘못되었음을 예감했다. 그 길로 택시를 잡아타고 응급실에 갔는데, 발등 세 곳이 골절되었고 그중에는 리스프랑이라는 아주 골치 아픈 관절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그렇게 운동을 할 수 없는 몸, 아니 정확하는 세 달간 제대로 걸을 수도 없는 몸이 되었다.
운동을 하지 못하는 동안에는 오히려 살이 빠졌다. 보행이 자유롭지 않으니 전처럼 외식을 할 수도 없고, 실상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회복 이후에 빠른 속도로 살이 불어나면서 나는 스스로의 바디프로필 사진을 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다. 병원에 갈 때마다 언제부터 운동을 할 수 있겠냐고 물었고, 의사 선생님의 권유로 재활 목적의 수영을 시작하게 되었다.
수영을 하면서도 나의 완벽주의자적 성향은 변함이 없었다. 평소 물공포증이 있었던 나는 평생을 내 의지로 물속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운동으로 다져진 나의 기초체력을 믿으며 곧바로 잠수와 물 차기, 팔 젓기를 하루 만에 배웠다. 수영 선생님은 나를 '수영 천재'라고 불렀다. 그런데 한 달쯤 지나고 나서도 나는 맨 몸으로 자유형을 할 수 없었다.
앞에서 말했던 운동을 가르쳐 준 친구-그는 수영도 잘한다-에게 매일 카카오톡을 보냈다. '오늘은 사이드 킥을 배웠는데 왜 자꾸 물을 먹는 거야?' '자유형 할 때 대체 숨을 언제 쉬는 거야?' '고개를 어깨에 붙이라는데 그러면 당연히 물이 코로 들어가는 거 아니야?' 등등. 쏟아지는 나의 질문세례를 받으며 그는 '너 이제 겨우 고작 한 달 배웠잖아. 제발 차분하게 생각해.'라고 이야기했다. 내 머릿속에는 이러한 의문이 몽실몽실 떠올랐다. '왜? 나 수영 천재라고 했는데.'
그로부터 1년이 지난 나는 아직도 제대로 된 자유형을 하지 못한다. 오늘도 자유수영 레인에 방해가 될까 봐 유아풀을 빙빙 돌고 돌아오면서, 나는 문득 생각했다. "왜 나는 잘하는 사람이어야 해?" 불과 1년 전만 해도 물에 들어가기도 무서워서 친구들이랑 빠지에 갈 때도 아무 레저도 하지 못했는데, 왜 내가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어야 해? 수영 대회에 나갈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완벽주의적 성향이 업무에는 도움이 될지언정, 취미로 시작한 헬스, 클라이밍, 수영에는 되려 독이 되었던 것이다. 초등학교 입학식 이후로 줄곧, 나는 잘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수능이나 토익 점수 같이 계량화되어 상대 평가가 되는 종목 이외에 나는 늘 괴로워하는 엔딩이 되었던 것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 왜 스스로를 계속 옥죄었던 걸까?
강박 장애와 강박성 성격 장애(또는 강박성 인격 장애)는 다르다고 한다. 물론 강박 장애를 동반하는 경우가 많으며, 우울이나 불안 장애를 동반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강박성 성격 장애는 생각보다 흔한 인격 장애이며, 미국 내 인구 중 100명 중 4명에서 8명에게 발견된다는 추정치가 존재할 정도이다.
이제는 너무 잘하려는 마음이 오히려 독이 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너무 잘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마음은 우리를 예민하게 하고 또 쉽게 지치게 한다. 때로는 되려 불필요한 실수를 만들어 자존감을 낮게 하고, 가장 안 좋은 점은 우리는 그 목표를 이루기도 전에 포기하게 된다는 점이다. '나는 안 되는 사람이야'라는 자책감은 결국 우울이나 불안 장애로 이어지게 만드는 악순환이 된다.
우리는 그리고 나는 사실 잘하는 사람일 필요가 없다. 회사에서는 받은 만큼 열심히 일하면 되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서로가 원하는 만큼만 가까워지면 된다. 너무 팽팽하면 끊어져 버리는 고무줄처럼 우리는 중도(中道)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치우치지 않는 균형이란 너무 잘하려는 욕심도, 너무 포기하고픈 무기력도 아니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즐길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왜 잘하는 사람이어야 할까? 그것은 결국 나의 강박이었다.
이제 나는 잘하는 사람 말고, 좋아하는 사람을 하려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마음껏 즐기고, 못하면 못하는 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그래도 안 되면 적당히 포기할 줄도 아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나는 잘하는 사람일 필요가 없다. 나는 그냥 무언가를 하는 사람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