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여름 Sep 09. 2024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에게 좋은 사람인가요?

요즈음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면 자기소개에 꼭 빠지지 않는 것이 MBTI다. 그중에서도 사고(Thinking) 형과 감정(Feeling) 형은 서로 이해가 불가능한 수준으로 큰 성향의 차이를 보이는데, "나 오늘 너무 슬퍼서 빵 샀어"와 같은  답이 명백하게 엇갈리는 질문들은 이미 너무 유명한 밈으로 자리 잡았을 정도다.



F 유형의 사람들, 즉 감정형 사람들은 판단의 근거가 인간관계에 있다. 물론 그들에게도 논리와 이성이 존재하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나 어떠한 선택을 내렸을 때의 주변 반응 등을 고려하여 판단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는 완벽한 F 유형 인간이다. F 유형으로 삼십 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가장 힘든 일을 꼽으라면,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일이 아닐까 싶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이유는 지구에 존재하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하겠지만, 나와 같은 타입의 사람들은 대게 그 원인을 자기로부터 찾고자 노력하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나의 마음에는 한 가지 -가장 완벽해 보이는- 해결책이 떠올랐다. 바로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무에게도 '나쁜 사람'이지 않으려면, 모두에게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결국 정답이 아니겠는가?




인간관계에서 항상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상대의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점심 메뉴를 정할 때에도 '난 아무거나 괜찮으니까 네가 먹고 싶은 걸 먹자'라고 한다거나, 피곤한 한 주를 보냈지만 주말에 술 한 잔 하자는 친구의 물음에 '미안해, 이번 주는 좀 쉬고 싶어'라고 말하지 않는 것. 때로는 어울리지 않는 친구의 헤어스타일도 밝게 웃으며 '새로운 스타일 너무 잘 어울려!'하고 선의의 거짓말을 해주는 등 나는 그런 방식으로 모두에게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이 되었다.


모두에게 다정한 사람이 될수록 역설적이게도 나에게는 가장 무심한 사람이 되었다. 다른 사람과 시간을 보낼 때 나의 기호나 선호는 전적으로 배제되었으며, 친구들과의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려는 나지만 당일 아침에 약속을 취소하는 친구에게도 괜찮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그런 방법이 오히려 나의 마음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괜스레 미안한 마음을 만드는 것이 불편한 감정을 더 오래 가져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짜 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지금 이용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친구는 내가 그 아이를 생각하는 만큼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게 분명해.'


그리고 그 생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결국엔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받게 된다. 인간관계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물론 대화일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나와 같은 유형의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에게 미운 받는 것만큼이나 힘든 것이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이다. '너는 왜 나와의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혹은 '너는 왜 항상 양보하지 않아?'와 같은 말들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은 거의 금기와도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은 이러한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까? 정답은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 찾는 것이다. '네가 우유부단했기 때문에 친구가 선택을 도와준 거야'라거나 '너는 친구의 진심을 매도하고 있어' 등 나의 잘못된 판단으로 (속으로는 늘 본인이 감정적인 것을 알고 있기에) 무고한 친구를 미워하고 있는 자신에게 자책감을 느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행동 했지만 결국 나쁜 사람이 되어버린 나는 더더욱 남의 눈치를 보게 되고, 나의 자존감은 더더욱 낮아지는 최악의 결론으로 치닫게 된다.




세상의 모든 갈등이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사실 이것도 강박장애의 일종이다. 일명 착한 사람 증후군(Nice Guy Syndrome)이라고 불리는 이 사람들은 타인에게 지나치게 친절하고 그들의 의견을 전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자신을 인정받기 원하는 강박적인 행동 패턴을 보인다. 어렸을 때 '너는 정말 착한 아이구나'라는 칭찬을 반복적으로 들은 아이들이 자라나 착한 사람 증후군(혹은 착한 아이 컴플렉스)에 빠지기 쉽다고 한다.


이 증후군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칭찬은 '너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라는 말이며, 가장 싫어하는 말은 '너 그렇게 굴면 사람들이 싫어해'라는 말이다.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인 그들에게 타인은 모두 자신을 평가하는 면접관이며, 이에 따라 늘 타인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게 된다.


이 과정이 지나칠 경우, 위의 사례처럼 갈등 상황을 이성적 혹은 논리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원인을 찾으려는 경향이 강화된다. 결국엔 자신이 갖는 불편함에 대해서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다른 사람만 배려하다가 상처만 받게 되는 결과를 얻게 된다. 상처를 받는 경험이 반복되고 지속될수록 자존감은 더 낮아지고,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합리적인 판단도 불가능해진다.


우리는 감정형 인간을 이야기할 때 흔히들 '공감을 잘한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공감(感)은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주장 등에 자신도 그렇다고 느끼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장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대상은 누구일까? 정답은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바로 알 때, 타인과의 공감도 가능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주장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먼저 귀 기울이고 들여다볼 때 타인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착한 사람 증후군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타인의 감정을 우선시하며 자신의 나쁜 감정은 감추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실은 제대로 된 공감을 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몇 해 전 심리 상담을 받으면서, 상담사 분이 한 말씀을 옮겨 본다.


- OO님은 혼자 있을 때 '자기'가 없어요. 다른 사람과 함께할 때만 존재하는 사람이에요.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먼저 스스로에게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휘둘리며 자신을 속이고 맞춰나가는 것은, 반대로 이야기하면 나 자신에게 아주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내면에 상처가 곪으면 인간관계에 대한 허무로 더 큰 슬럼프가 찾아올 수도 있다. 나 자신과의 관계가 건강하게 유지돼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나 자신이 하는 말들에 먼저 귀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소비하는 시간과 감정을 당신을 위해 사용하라.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면 우선, 당신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니까.





 


이전 03화 당신은 쓰레기집에 살고 있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