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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름 Sep 16. 2024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불면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나의 불면증은 열아홉부터 시작됐다. 유난히 추운 겨울밤이었다. 당시 가족 중 누군가가 항암 치료를 시작하면서 혼자 지내는 밤이 많았었다. 어쩌면 인생에서 미래에 대한 고민이 가장 많을 시기에, 심란한 마음을 지닌 채 홀로 보내는 밤은 뜬 눈으로 지새우기 좋은 환경이었다. 그 해가 지나고 겨울이 되면 잠 못 드는 밤이 늘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겨울은 더 길어졌다. 어느 해부터는 계절에 관계없이 쉽게 잠에 들 수 없었다. 어쩌다 일찍 잠에 드는 날이면 평소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눈이 떠졌다.


대학 시절 내내 불면은 이어졌다. 아침 수업이 있는 날들은 밤을 꼬박 새우고 학교에 가는 날들도 더러 있었다. 낮에는 금방이라도 잠이 올 것처럼 피곤해도, 막상 잠자리에 들려고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정신이 말똥말똥 깨어났다. 모두가 잠든 깊은 새벽, 나는 음악을 듣거나 드라마를 보곤 했다. 음악을 들으면 한 가수의 모든 앨범을 다 들었고, 드라마를 보면 1화부터 16회까지 앉은자리에서 다 보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해가 뜨고 나서야 잠자리에 들곤 했다.


수면 부족은 피로로 이어지고, 피로감은 무기력 함으로, 무기력 함은 우울감으로 이어졌다. 당시에는 정신과에 방문한다는 것이 일종의 금기 와도 같아서, 나의 수면장애가 심각한 수준임을 알면서도 문턱을 넘어 볼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인터넷을 검색해서 잠이 온다는 것은 모두 시도해 보았다. 햇볕을 많이 쬔다거나, 땀 흘리는 운동을 한다거나, 잠드는데 좋다는 각종 건강식품까지 섭렵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직장 생활을 한 뒤에는 두세 시간 잔 이후에 출근을 하고 업무를 보는 것이 너무 어렵게 느껴졌다. 그래서 근처 가정의학과에 방문해서 멜라토닌이 들어간 수면유도제를 처방받게 되었다. 멜라토닌은 호르몬의 일종으로, 생체 리듬-이 경우에는 수면 리듬-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노인이 되면 잠이 없어진다는 말은 이 멜라토닌의 분비량이 감소하기 때문이다. 의약품 정보에 검색을 하면 "수면의 질이 저하된 55세 이상의 불면증 환자의 단기치료"에 쓰인다는 효능이 나와있는 이 약을 나는 몇 해나 복용했다.


멜라토닌이 들어간 약을 먹는다고 해서 쉽사리 잠에 들지는 않는다. 복용 후 1~2시간 정도가 지나면 약간의 나른함과 함께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그 시기를 놓치면 약을 먹지 않은 때와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다시금 각성하게 된다. (이 것은 약의 부작용은 아니며 개인적인 복용 후기임을 분명히 밝힌다) 약을 먹어도 잠에 들지 못하는 밤이 되면 나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잠자리에 누워서 보내는 시간은 끊임없이 진격하는 생각과의 전투이다. 이때의 생각들은 도무지 멈출 생각이 없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시간은 훌쩍 지나가고, 어느덧 동이 트는 아침을 맞이하게 된다.


이때쯤 나는 남들만큼 잠을 자는 것을 포기했다.




주위에 불면증이 있다고 말하면 대부분은 "활동량이 너무 없는 것 아니야?"라고 원인을 찾아 주려고 하거나, "자기 전에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해 봐."하고 해결책을 제시해 주고 싶어 한다. 오랜 기간 불면증을 비롯한 수면 장애를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한 원인을 한 번쯤은 떠올려 보았고, 제시된 해결책은 한 번쯤은 시도해 보았을 것이다. 내가 속이 좁아서 인 지는 모르겠지만 반복적으로 듣는 걱정과 조언은 오히려 "네가 뭘 알아." 하는 반감을 들게 할 때도 있다. 그래서 양질의 수면을 포기한 뒤로는 밖에서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다시금 불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게 된 것은 다른 문제-정확하게는 강박 장애-로 정신과에 다니게 되면서, 자연스레 불면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선생님과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 몇 가지 있었다. 그것은 내가 지닌 강박적 성향이 역시 수면을 방해하는 요인 중 하나라는 것이다. "내일은 몇 시에 나가야 하니까, 적어도 몇 시에는 잠이 들어야 해"하는 강박적인 사고방식이 깊은 수면을 방해하는 원인이 된다.


때로는 어떠한 생각-주로는 불길한 일이 벌어진 것 같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 잡혔을 때, 그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는 것도 불면의 또 다른 원인이 된다. 불안한 생각의 늪에 한 번 빠지게 되면,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최악, 최최악의 상황까지 모두 생각하고 나서야 겨우 잠에 들 수 있게 된다. 특히 겨울이 되면 해가 일찍 떨어지고 밤이 길어지면서, 불면을 경험하거나 증상이 악화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나처럼 혼자 사는 젊은 여성의 경우에 불면을 앓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불안감이라고 생각하는데, 잠이 든다는 것은 곧 자신에게 벌어질 수 있는 나쁜 상황으로부터 무방비한 상태가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사람들은, 특히 여성의 경우에는 알게 모르게 항상 조금씩 긴장하고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에서 불면증을 앓고 있던 독신 여성들은 결혼 생활 이후에 자연스럽게 불면이 치료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불면증을 궁극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솔직히 모르겠다. 다만 내가 제시할 수 있는 불면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불면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앞서 말한 수면을 포기하는 것과는 비슷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가짐이다. "나는 원래 못 자는 사람이야. 그러니 자지 않아도 돼."가 아닌 "아직은 잠이 오진 않지만, 괜찮아. 잠은 올 때 자면 되는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불면에 대처하는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보통 잠 못 이루는 밤에 무슨 활동을 하고 있는가? 잠을 자기로 결심하고 침대에 누웠을 때 잠이 오지 않아도 억지로 잠들려 두 눈을 꼭 감고 있지는 않았는가. 밝은 빛은 수면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핸드폰도 멀리 던져두고 양을 천천히 세거나, 혹은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는 이유들을 생각하며 본인을 채찍질하지는 않았는지 묻고 싶다. 그러한 강박적인 생각을 가질수록 당신은 잠의 주인이 될 수 없고, 잠이 당신의 주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잠이 오지 않으면 그냥 할 일을 하면 된다. 드라마를 보거나, 혹은 책을 읽거나. 개인적으로는 책을 읽는 것을 추천하는데, 되도록 소설이 아니라 경제/경영서나 전문 지식을 담은 책을 읽으면, 자연스레 학창 시절처럼 졸음이 쏟아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설령 책이 너무 재밌어서 잠을 자지 못하고 밤을 꼬박 새운 날에도, 책을 읽다 지새운 밤은 "못 자서 안 잔 밤"보다 훨씬 더 값어치 있게 느껴진다. 책이 싫으면 당신이 좋아하는 취미 생활을 하면 된다. 요즈음의 나는 뜨개질을 하고 있다.


불면에 끌려다니지 않으려면 당신이 잠을 자는 것을 제외하고 가장 원하는 것을 해야 한다. 수년간, 혹은 수 십 년 간 불면을 겪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아무것도 못하고 뜬 눈으로 지새운 날 떠오르는 아침 해가 얼마나 원망스러운 지. 새 날의 시작을 만족스럽게 하려면, 그때까지의 시간을 오롯이 당신을 위한, 당신이 원하는, 당신의 활동으로 채우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잠을 잘 자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다. 아직까지도 수면제가 아닌 수면유도제를 처방받아먹고 있는 나는 여전히 약을 먹어도 계획된 시간에 잠에 들지 못하는 날들이 더 많다. 하지만 불면에 대한 일종의 불안감이나 두려움은 많이 해소되었다. 잠을 꼭 잘 자야 한다는 강박이 사라진 뒤, 나는 하루종일 사람들과 부대끼고 퇴근한 이후의 시간을 무척이나 즐기고 있다.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부분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서 밤에 할 수 있는 거창한 할 일을 만들지는 않길 바란다. 정말 단순한 활동-그냥 소파에 앉아 TV를 보거나, 밀린 설거지를 하는 수준-의 가벼운 활동으로도 당신의 시간을 충분히 가치 있게 흐르고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잔잔한 음악에 맞춰 와인을 한 잔 즐기는 것, 그것은 더 이상 불면의 밤이 아니며, 소중한 나와의 오붓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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