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성파파 Dec 13. 2019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는 말을 해야 할 때

저녁 식사 후 막내를 데리고 아내랑 산책을 하다 보면 운동하는 주민들과 반려견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그 시간대에 아파트 출입구 쪽에는 중고등학생들이 우르르 귀가하는 것을 본다. 십중팔구 학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리라.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안쓰럽기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고 있구나 하는 마음에서 뿌듯하기도 다.


우리 아이들 또래들을 슬며시 쳐다보면 드는 생각들이 있다. 


아이들의 백팩에는 무슨 책이 담겨 있을까.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어떤 지식이 살아 숨 쉬고 있을까. 아이들의 가슴속에는 어떤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을까. 아이들의 시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고 있을까. 아이들은 무엇을 위해 살며 무슨 생각을 하며 하루를 보냈을까. 아이들은 이 시간이 즐겁고 행복할까. 혹여나 고통이 있다면 무엇을 위하여 인내하고 있을까.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선택의 기회를 넓혀주는 도구라는 것을 알고는 있을까.


삼삼오오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뒷모습과 대화를 엿들으며 동네길을 걷다 보면 달빛이 살며시 길을 내어준다. 그 길 아래 길게 드리워진 아이들의 그림자 속에는 희망과 설렘과 부담이 있었다. 아이돌 그룹 이야기나 랩가수의 최신곡을 이야기하며 까르르까르르 는 아이들은 배고픔을 잊은 것일까. 편의점이나 김밥집에서 나눠먹은 라면이나 떡볶이가 전부였을텐데. 집에서 엄마들은 어떤 저녁을 준비하고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을까. 아빠들은 집에 들어왔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우리 아이들은 지금 뭐 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다 보면 달빛이 어두워져 보인다. 여느 아이들처럼 학원에 열심인 것도 아니고, 집에서 인터넷 강의에 집중하는 것도 아니면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학원과 도서실에서 하루 공부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행렬에 우리 아들과 딸은 보이지 않는다.


부모가 보기에는 주로 혼자서 공부하는 아이를 보면 걱정이 앞선다. 그 염려의 실체는 단지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서이다. 혹여라도 알 수 없는 미래에 아이가 예상치 못한 삶을 살아가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기도 하다.


출근하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영어단어를 외우고 수학 문제를 풀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다. 속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짧은 토막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머라 해도 미래는 준비하는 자의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고리타분하게 인내의 효용론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지만, 아무도 인내의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인내의 결과물의 정당성과 기회의 균등성에 대한 사회적 평가만이 문제가 될 뿐이다.  어찌 되었건 열심히 살지 않고서는 원하는 결과를 얻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박차를 가해야 할 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경쟁자들에게 뒤처질 수밖에 없는 것이 정글의 법칙이다.


그런 밤 집으로 돌아왔을 때 게임이나 피규어(조립장난감)나 어설픈 화장에 열심인 아이들을 볼 때면 그동안 축적된 분노들이 분화구로 이동한다. 애써 자제를 해서 분출하지는 않더라도 '왜 저렇게 살고 있을까'라는 의구심 때문에 아이들에게 차가운 눈빛을 보낼 수밖에 없다. 다른 친구들은 저녁 늦은 시간에 학원에서 도서실에서 공부를 하고 집에 돌아오며 열심히 살고 있는데(겉으로 보이기에는).... 왜 어떤 이들은 자신이 무언가를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지도 않고 집중해서 시간을 보내지도 않을까.


부모 입장에서 다른 집 아이들과 비교하지 말자고 늘 맹세했건만. 그 맹세가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앞으로 지켜질지가 의문이다.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순간순간 드는 감정은 반대의 측면에 가깝다. 아이들끼리 비교하지 말자고 해놓고도 막상 수시로 비교하며 자책하는 게 부모들의 현실 아니던가. 여유 있게 학교생활을 하고 부담을 갖지 말라며 학원에 다니는 것도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 다른 아이들을 보면 그런 선택에 회의가 밀려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다고 현실에서 아이들의 성적이 비관적이다던가, 미래가 어둡다던가 그런 것만은 아니다. 아이들의 가능성을 싸잡아서 비난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현재의 순간에 학생이라는 자신의 직분에 맞게끔 행동하고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서 걱정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노력과 인내의 통계론적 결과는 늘 참고 견디는 자들의 승리로 점철되어 있다. 부모는 그 점을 경험칙상(혹은 많이 보고 들어서) 잘 알기 때문에 낙관적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 아이의 현재가 미덥지 못할 뿐이다.


답답한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들에게 딱 한마디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아들아/딸아, 지금 이럴 때가 아니고 뭔가 열심히 해야 할 때다. 너희의 인생을 위해서."


하지만,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는 말을 해야 할 때"가 지금 이 순간일까. 살면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타이밍인데 이 순간최적의 타이밍일까. 만약 그 말을 해야 한다면 가장 바람직한 순간을 알수 있일까. 아이들이 거부감이 들지 않도록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어떻게 아이들을 설득하고 달래며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시간을 살아갈 수 있게끔 동기부여를 해줄까.


아무리 좋은 말도 들을 준비가 안되어 있거나 거부하게 되면 그 효용가치는 급격히 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이들의 머리와 가슴과 귀가 열리기를 기다리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또 그때는 언제일까.


부모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과 인생살이가 아이들에게 그대로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을 것인데... 부모가 느끼는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부모의 고민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정해지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답을 찾아 헤매며.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는 말을 아이들에게 해야 할 때. 그때가 언제일지 몰라도 가장 렵고 힘들다.






이전 02화 세상의 매운맛이 필요한 아들에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