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성파파 Jan 10. 2020

가장(家長)의 무게는 생계의 저울 위에서 가장 무겁다

아버지의 존재 증명서는 기억 속에서만 발급된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살아가는 게 어떠냐는 질문을 받았다. 대답보다 먼저인 것은 어떤 기억들의 소환이었다.


모두가 가난한 시절의 여름 한낮이었다. 삼복더위에 매미소리마저도 정적에 숨죽이고 더디 가는 시간은 정물화 속 풍경으로 멈춰있는... 뙤약볕 아래 바람 한점 불지 않은 들판에는 허수아비처럼 밀짚모자를 쓴 아버지가 있었다. 한참 커나가는 벼가 병충해로부터 피해받지 않고 잘 자랄 수 있도록 농약을 하고 비료를 뿌리던 굵은 힘줄의 검게 탄 손길이 있었다. 논에서의 노동은 장딴지까지 빠지는 뻘속을 헤쳐 나아가야 하는 고됨의 연속이었다. 한쪽 다리가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이논 저논 옮겨 다니며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그런 아버지를 보고는. "아! 농사를 짓는 일은 진정 힘들구나. 나중에 절대 해서는 안 되겠다"는 못된 생각도 했었다. 변변한 샤워시설도 없던 우물가에서 구멍 난 메리야스를 벗고 엎드려 등목을 하시던 아버지. 깊은 우물로부터 차가운 물을 퍼올려 빨간 바가지로 물을 뿌리시던 어머니. 혹여나 너무 차가울까 봐 아버지의 등을 부지런히 만져주시던 작고 야무진 어머니의 손길. 아버지는 잠시 동안이나마 등에 뿌려진 물로 인해 더위로부터 상처 받은 몸과 마음을 달랠 수 있었을까? 우물가에서 들리던 물소리와 작은 소란들. 행복이나 낭만이라는 말들은 어느 시인의 시구에서나 나왔을까. 그런 감정들을 말하는 게 사치스러웠던 시절을 지나왔던 아버지.... 세상의 많은  아버지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삶을 버티며 다른 시간 속으로 살아갔을까.... 그 누구를 위하여.


그저 막걸리 한두 잔에 알타리 김치 한두 개로 허기를 달래고 다시 밭으로 발길을 돌리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두 눈에 선하다. 삽자루를 자전거에 끼우고 들판으로 향하던 아버지의 모습에 목가적이라는 표현은 가당치도 않았다. 어린 시절 유난히도 그런 노동이 싫어 세상에 있는 핑계를 다 대고 도망 다니기 일쑤였는데, 크게 화내시지도 않고 허허롭게 웃어버리던 아버지의 안쓰러움도 떠오른다. 그 웃음 속에는 공부를 통해 자식들이 입신양명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희망이 있었으리라.


그렇게 일을 하지 않으면 여섯 식구가 밥과 김치를 먹고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고 적은 금액이나마 등록금을 내기 힘들었던 것이다. 보리 한가마를 밀가루 두 포대로 바꿔 수제비로 끼니를 잇던 시절에도 현금은 필요했었다. 밭에서 나는 온갖 푸성귀를 오일장에 내다 팔고 마련한 몇 푼의 돈으로 아이들의 옷과 학용품을 샀다. 깨를 팔아 아이들 학교 보낸다는 시절이 그때였다. 붉게 그을리다 허물이 벗겨진 어깨와 콧등에 새겨진 아버지란 이름의 노고를 어찌 잊을까.


은하수가 소리 없이 흐르던 여름밤이면 잘 말려진 쑥 무더기에 불을 피워 모기를 쫓고, 마당 가득 쌓인 담뱃잎을 고르고 또 엮어서 말리는 작업을 했다. 독한 담뱃잎에 손바닥은 검게 물들고 졸음이 별비처럼 쏟아져도 힘들다는 내색도 하지 않으셨다. 밤이 이슥하도록 이어지는 담뱃잎 분류작업은 동네 어른들이 늘 함께 했었다. 그렇게 여러 손들이 모아지지 않으면 어느 집이나 여름밤을 헤쳐나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어른들의 얘깃소리는 밤새 이어졌고 담뱃잎이 바닥을 보일 무렵이면 샛별은 보이지 않았다. 마당 한구석에 놓인 평상에서 아이들은 부모들의 두런두런 얘기 소리를 들으며 쑥 향기 아래서 잠이 들곤 했다. 금성이 다시 보이는 새벽에 눈을 떠보면 언제나 모기장 속에 잠이 들어 있었다. 그 새벽녘에도 아버지는 다시 아침이슬과 함께 들판에 서계셨다.


그 시절을 살아온 아이들의 기억 속에는 자신의 삶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분투 중이던 아버지가 오롯이 남아있다. 물론 어머니의 모습 또한.....

해질무렵, 아버지들은 무엇을 가지고 집으로 향하고 있을까?

누군가 다시 물었다. 요새 사는 게 힘들지 않냐고....


나이 들어가는 것이 서럽지 않느냐고. 행복이라는 단어를 잊어버리지는 않았느냐고.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어떤가 하고 묻는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몇십 년 전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공존했던 우물가를 떠올린다. 넓은 들판에서 지나온 사계절의 풍경과 한쪽 구석에 놓인 막걸리 주전자를 기억한다. 다시 어디선가 마른 쑥향이 향기롭게 퍼져오고, 평상에서 방안의 모기장으로 아이들을 옮기던 아버지의 든든한 가슴이 생각난다.


먹고살 것이 풍성한 자식들의 세대도 삶의 고단함에 대해서 할 말이 많은데. 어찌 우리의 부모님들은 그 거친 세월을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마음을 삭히며 살아왔을까. 새끼들의 먹거리를 위하여, 아이들의 그럴듯한 학교 졸업장을 위하여, 새끼들은 당신들이 하시던 노동을 더 이상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위하여....


가장은 말 그대로 한 가정을 이끌어가는 사람을 말한다. 통상 부모나 부부 중 한 사람이 될 수 있겠다. 가장은 경제적인 벌이로 가족을 먹여 살리고 부양책임을 진다. 그래서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고, 자존심 상하는 상황도 견뎌야 하고, 인내심이 바닥을 보여도 버텨야 한다. 이것은 특정 세대의 얘기가 아니라 어느 세대나 늘 존재하는 가장들의 얘기다.


아마도 사는 게 힘들지 않냐고 묻는 이들은 자신들의 삶이 힘들어서일 수도 있다. 한 가정에서 가장으로서 역할이 버거운 것일 수도 있다. 동병상련의 심정을 타인으로부터 공감을 얻고자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 것일 수도 있다. 드러내지 못하는 상처가 무서운 법이다. 잘 아물지도 않을뿐더러 치유 가능한 영약도 없다. 어찌 힘들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우리의 부모님들이 살아온 것처럼 나름의 고통이 없는 삶이 어디 있을까?


우리들 대부분은 부모라는 이름과 가장이라는 역할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 역할은 자연법이 인정한 권리이면서도 의무다. 우리의 DNA 속에 각인된 숙명과도 같은 명령이다. 그래서... 힘들더라도 그냥 버티자. 즐기면서 버티자. 가장 숭고한 사명을 완수하고 있노라며 위안을 삼자. 우리의 영혼 속에는 부모로부터 이어받은 가족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있다. 아무리 세상살이가 힘들어도 포기해서는 안될 것이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가족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단어가 가진 선함과 존귀함의 힘을 믿는다. 가장은 그 힘을 스스로에게 가족 모두에게 선물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실패하지 않는 가족의 이력은 거기에서 나온다. 가장의 일방적인 희생이 아닌 가족 모두의 노력 위에 행복이 꽃피울 것이다.


경쟁이 살벌하기로 유명한 대기업 S사의 구조조정에서 몇 차례 살아남은 친구가 하는 말.

"두 아이들 대학 졸업 때까지는 무조건 버틴다. 어떤 굴욕을 당하더라도 스스로 그만두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이 친구에게는 부하직원도 없고, 제대로 된 업무도 주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누군가 보면 비굴해 보일 수도 있지만 가장의 무게란 그런 것이다. 비겁해도, 비굴해도, 서러워도, 일단 참고 버티며 나아가는 것. 아이들의 사진을 스마트폰 메인화면에 깔아놓고 그들의 웃음을 위해 가슴에 멍이 들어도 참는 것. 존재감 없는 의자에 앉아 잉여인간으로 살더라도 강제퇴직을 미루며 살아가는 것.


누가 뭐래도 가장의 무게는 생계의 저울 위에서 가장 무겁다. 그 여름 우물가에서 등목을 하던 아버지와 물을 뿌려주시던 어머니도 그랬을 것이다. 아마도...









이전 11화 교양 있는 부모는 가능할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