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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Oct 05. 2020

교양 있는 부모는 가능할까?

중2 아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아이들이 커나가면서 생기는 고민 중 하나.


아이들에 대해 세상에 대해, 품격 있는 부모는 가능할까? 교양 있는 부모는 가능한가?


우리 집에 신성처럼 등장한 트러블메이커... 전형적이며 고질적인 중2의 특징을 그대로 가진 셋째이자 큰아들. 엄마 누나 둘, 그리고 초3인 동생까지 이들 모두와 이유를 알 수 없는 전투 중이다. 그 원인과 결과 분석이 안 되는 것은 여느 집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누나들 중2 때와는 전혀 다른 양태를 보여서 신비롭기까지 하다. 좌충우돌 히스테릭하고 진흙탕 개싸움을 마다하지 않고, 스스로 중2병이라 진단할 줄 아는 현자의 출현이다.


이 눔의 현자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한숨과 짜증의 쓰나미가 몰려온다. 문득 "회초리"의 소재가 궁금하고, 주먹이 운다는 말의 의미를 새삼 깨닫는다. 때론 "쌍욕"의 문법적 구성과 사회학적 맥락을 분석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가벼운 체벌,
애교에 가까운 협박이나 욕 같지도 않은 욕설을 듣고 자라지 않은 어른들이 있을까?
............
만약 존재한다면... 그 부모는 성인(聖人)이거나 자식을 포기했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물론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집집마다 부모마다 다양한 성향과 자녀교육에 관한 철학(?)이 있을 것이므로... 부모의 입장과 아이들의 입장의 상대적인 관점의 차이도 있을 것이며... 어떤 집에서는 체벌이 될 수 있는 것도 다른 집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경우도 있을 수 있다.(그렇다고 그 다양성이 현행법이나 상식의 선을 넘어서는 안된다.)


언론이나 대중매체에 아주 화목하게 그려진 어느 특별한 가족의 예를 일반화시키기도 어렵다. 그런 특별한 케이스는 가능성의 문제이기도 하거니와 과대 포장된 이미지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아이들이 자유롭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이들의 일상을 바라보지만... 아이들에게 허용된 자유로운 시간이 정작 그들의 인생에 장애물이 된다고 생각되면... 현실 속 부모의 마음은 불안해지고 불편해진다. 요새처럼 경쟁이 심화된 사회 시스템 하에서는 좋은 대학과 양질의 직업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운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처해있는 현실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해보려고 하지만 그것 또한 쉽지 않다. 서로가 세상에 대한 시각 차이, 경험과 개인의 쓸모에 대한 차이, 말 그대로 세대 차이가 그 방해물이 된다. 아이들이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도 어렵지만 부모가 어른스럽게 부모 역할하는 것도 쉽지 않다.



영화나 드라마 속의 인자하고 참을성 많은 부모의 모습에서 현실의 부모들의 모습을 투영해보면... 진정 고민스러운 것이... 교양 있는 부모는 가능한 문제일까... 만약 가능하다면 어떤 수준의 교양이 요구될까. 혹은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영역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부모의 특별한 관여 없이도 잘 자라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부모가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훈수를 두고 잔소리 폭탄을 던져도 자신의 갈길을 가버리는 아이들도 있다. 어느 쪽이 더 타당한지에 대한 답은 없다. 부모에게 순응하는 아이들이라고 해서 그 과정이 막연히 순탄한 것도 결과가 좋을 수는 없다. 반대로 부모와 갈등을 겪고 자라난 아이들이라고 해서 그것이 상처가 되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자라나지는 않는다. 말 그대로 인생의 아이러니다.


최근 민법상 징계권(민법 제915조) 삭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민법 제915조(징계권) 친권자는 그 자를 보호 또는 교양하기 위하여 필요한 징계를 할 수 있고 법원의 허가를 얻어 감화 또는 교정기관에 위탁할 수 있다.

이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친권자에 의한 아동학대의 근절방안에 관한 논의와 맥락이 같다.


가정교육이라는 상황에서 부모의 역할과 아이들과의 관계를 고민해본다.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가벼운 체벌이 아동학대의 얼굴을 가질 수 있다는 의견에 동조한다. 친권의 남용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모의 감정적인 행동이 가진 부정적인 면을 인정한다.


사랑의 매와 등짝 스매싱에 대해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말들이 많다. 절대 해서는 안된다는 입장부터 아이들의 올바른 성장과 교육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허용될 수도 있다는 견해가 대립된다. 한때 아이들에 대해 꽃으로도 때려서는 안 된다는 말이 회자되었다. 그 정당성을 부정할 수 없다. 모든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말도 늘 있었다. 이 또한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가정 내에서 아이들을 양육하면서 발생하는 부모의 대응방식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가끔씩 부모 자식 간에 벌어지는 체벌행위 때문에 부모가 가정폭력으로 고소당하기도 하는 현실이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아이들이 부모들에게 고소하겠노라고 진지한 농담을 던지는 세상이다.


문제는 상식적인 가정교육의 테두리와 자녀 징계권과 체벌의 경계가 애매모호하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회초리를 당연시했던 문화가 존재했었고, 선생님의 슬리퍼에 싸대기를 맞았던 기억이 존재하고, 아이들이 부모의 소유물이라는 관념도 존재했었다. 그 당시의 관념과 어른들이나 부모들의 생각 속에는 그러한 행동들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고가 내재되어 있지 않았다. 담배의 해악에 대해서도 뒤늦게야 경고를 받았듯이 부모의 폭력행위나 폭언에 대해서도 부모의 권리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말로 설득되지 않는 아이에 대해 대부분의 부모는 분노하고 다양한 행동방식을 보인다. 말로 설득하거나 혼내거나 아이들에게 공포심을 가지게끔 언어나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도 스스로 감정에 대한 제어가 안되거나 아이의 도발적인 발언에 급 분해서일 수도 있다. 물론 감정적인 반응과 그로 인한 결과는 바람직하지도 소망스럽지도 않다.


이러한 관점은 부모의 일방적인 폭력으로 인해 더 비극적인 사태를 초래하는 사건들을 바라보면 더 복잡해진다. 아직까지도 아이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해서 자신의 생각대로 처분하는 부모들도 있다. 부모가 원하는 대로 성장 해나가지 않았을 때 느끼는 좌절감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는 부모들도 있다.


크고 작은 비극과 웃지 못할 희극 사이에서 집집마다 부모의 처신은 어려워진다. 부모도 평범한 감정을 가진 보통의 인간으로서 희비극 상황에서  냉정과 이성은 다가가기 힘든 이상향일 수도 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끼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는데... 어쩌면 그런 어려운 부자 되는 것이 교양 있는 부모 되기보다는 더 쉬워 보인다. 부자는 부를 포기하거나 버리면 되지만, 부모는 자식을 포기하거나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부모는 영상 속의 부모가 될 수 없고, 바람직한 부모의 이상과 실제 가능한 부모의 모습은 전혀 다른 것일 수 있다. 우리가 바라는 아이들과의 관계는 늘 사막의 오아시스 신기루처럼 손에 잡힐 듯하다가도 손을 빠져나가는 바람과 같다.


중2 아들과 비교적 거친 대화를 마무리하면서 다시 한번 질문을 던져본다.


"교양 있는 부모는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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