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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Oct 22. 2020

엄친아(딸)를 위해 부모는 불행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어떤 신이 자신의 피조물을 만들었다.

하루는 진흙을 빚고 하루는 모양을 만들고 다시 하루는 숨과 온기를 불어넣었다. 다시 하루는 피조물의 머릿속에 각종 영감을 불어넣었고, 또 다른 하루는 인내심과 온갖 감정들을 집어넣었다.(의도는 될성싶은 어린 떡잎이나 늦게라도 큰 그릇이 되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빼먹은 것이 하나 있었다. 뭐였을까?

.

.

.

그것은 신에 대한 존경심... 그래서 어리석은 신은 자신이 줄 수 있는 대부분을 주고도 끝내 존경을 받지 못했다는 슬픈 얘기다. 아차 싶었지만 뒤늦은 후회는 늘 늦는 법이다.(물론 변명보다는 조금 빠르지만)


이것은 창세기에 대한 불경스러운 농담이 아니라 그냥 웃자고 한 얘기다. 수없이 많은 가정을 창조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보통의 부모들에 관한 가엾은 신화... 아이들을 잘 키우고자 하는 보통 부모들의 보통의 욕망...(다만, 칼릴 지브란의 말처럼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왔으나 부모의 것은 아니다. 부모를 신으로 비유한 것은 쓸데없는 비약이니 신경 쓰지 말자.)


맞벌이를 하면서 아이 둘 학원비를 빼고 생활비 명목의 카드비를 공제하고 나면 남는 게 없더라는 동료의 얘기는 이제 흔한 얘기다. 그다지 큰 보람도 일말의 감동도 못 느끼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전등불 하나도 누군가의 노력과 고통 없이는 켜지지 않는다.


우리가  듣는 엄친아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진실이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라는 일부분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엄친아 한 명을 키우기 위해 부모가 받았던 불편과 불행에 대해서는 회자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결과가 좋으니 과정에서의 부정적인 면은 감수해야 한다는 신념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 귀에 주로 들리는 소문은 아름다운 결과와 거기에 만족해하는 가족의 얘기뿐인지도 모르겠다.


부러운 동료들과 친구들이 있다. 자식이 유명한 외국어고등학교를 나오고 인서울의 이름만 말하면 모두가 아는 대학에 진학해서 고시에 합격하거나 의사가 되는 과정... 을 생각보다 쉽게 거쳐서 부모들의 어깨에 힘을 주게 다는 아이들.


수학 공부를 잘해야 가능한 의사 한 명을 만들기 위해 학원비만 억대가 넘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 식으로 키워진 의사와 전문직 자식들을 둔 부모들의 입꼬리는 한층 치켜 올라갈 수밖에 없다.


"자식농사 별거 없는데 말이지, 지들 스스로 알아서들 잘해서..." 최대한 겸손하게 말하면서. 이런 얘기를 듣고 있는 상대방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눈꼬리가 올라간다.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스카이캐슬>... 같은 드라마에 나오는 얘기가 아니다. 이런 스토리를 가진 부모가 간혹 주위에 있다. 그들은 아닌 척하면서 부러움을 탈만한 소재를 곳곳에 뿌려놓아 주위 동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거나 질투를 제공하기도 한다.


일단 부러우면 진다는 말은 자식농사에서도 50%는 맞는 얘기다. 하지만 그 속내를 알고 보면 훨씬 덜 부러워진다는 것도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그래도 부럽다.



자식 자랑 중에 불행한 자신을 드러내는 이들은 없다.

그 자식이 성장하기까지 성장통에서 느꼈던 짜증과 분노를 자랑과 더불어 말하는 이들도 거의 없다. 솔직하게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의 부모 자신의 고통과 고난을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극히  소수다.(그 이유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자신들의 불편한 무언가를 드러내서 그러지 않을까 싶지만.)


소수가 말하는 불편함마저 소망스러운 결과에 의해 일정 부분은 미담으로 남는다. 대부분은 티브이나 신문에 나오는 전국 1등의 얘기에 가깝다.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교과서 위주로 공부하고 하루 8시간씩 충분히 자면서도 공부를 어쩔 수 없이 잘할 수밖에 없었던 전설 같은 얘기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진실도 있다. 그런 스토리 속에 숨어있는 반전도 알고 있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처음부터 끝까지 역경과 고통 없이 성장하는 이야기는 매력도 없고, 현실성도 없다. 그런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런 자랑이 내심 불편하다는 것  또한 팩트다.


이런 유형의 얘기 속에는 대부분의 부모들이 당하는 힘듦과 어려움이 미화되거나 삭제되어있다. 단지 결과만 바라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보통의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들과 비교하다 보면 초특급 고혈압 환자가 되거나 급성 심근경색에 가까운 가슴통증과 호흡곤란을 겪을 수도 있다.  


어쩌면 엄친아 한 명을 키우기 위해 그 부모는 불행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그 불행에 대하여... 자발적 비자발적이든 간에 선택의 문제라서 당사자들은 애써 외면할 수도 있지만.(선택에 의한 고통을 "보람"으로 부를 수는 있겠다.)


남들이 뭐라 하든 간에 우리 아이들이 엄마(아빠)랑 친한 아들과 딸이길 바라는 작은 소망은 있다. 흔히 말하는 엄친아는 못되더라도... 가만히 보니 우리 얘들도 우리 기준으로는 엄친아(딸)네... 이것 또한 자랑거리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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