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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Oct 26. 2020

부모의 삶이 빛날 때 아이들의 삶도 피어난다

초가을의 어느 날 저녁. 초등학교 3학년인 막내가 엄마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엄마... 내가 백 살이 될 때까지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어."

막내아들의 뜬금없는 신파성 멘트에 생뚱한 표정으로 엄마가 묻는다.

"왜... 우리 콩새는 왜 그런 생각을 해?"


엄마의 호기심 가득한 물음에 아들은 좀 더 진지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보탠다.

"응... 엄마가 오래 살아서... 진짜로 오래 살아서 내가 백 살이 되는 것을 보면 좋을 것 같아서...."

(엄마는 조용히 아들의 표정을 살핀다.)

"그러니까 내가 탄생 백주년이 되면(음... 나중에 큰 인물이 되려나)... 엄마 나이가 몇 살이지... 그러니까.... 음..... 계산이 잘 안되네~~~" 어린 아들이 엄마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하는 말이다.


엄마의 "걱정하지 마!"라고 조용히 속삭이는 목소리가 아들의 귀에 들렸을까. 마치 갓난아이처럼 아들을 꼭 안아주는 엄마. 밤하늘이 별바라기를 포근히 껴안듯.


엄마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아들을 어루만져주다가... 어두운 창밖으로 눈길을 돌린다. 뜬금없이 비라도 내리는 걸까. 엄마의 맘속에 뜨거운 무언가 흘러간다.(내가 사랑하는 우리 막내를 위해서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라는 문장이 자막처럼 지나가지 않았을까.)


엄마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이 소용돌이쳤을까. 가슴속에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무언가가 올라와서 그랬을 수도. 아니면 그런 확정된 미래가 예정되어 있는 게 두려워서 그랬을 수도 있다.


엄마와 아들의 다음 대화가 침묵 속에 묻혔다. 두 사람의 대화를 어쩔 수 없이 엿듣고 있던 아빠 또한 마음 한구석에서 무언가 피어오르는 것을 막지 못했다. 잊고 있었던 울컥함이라는 낯익은 감정... 보고 있던 책을 다시 펴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슬픈 영화나 드라마 속의 한 장면이 아니다. 저녁을 먹고 난 뒤 우리 집 거실 소파에서의 상황이다. 아들의 세 자릿수에 대한 암산이 잘 안 되는 걸 보니 예비 수학포기자인가에 대한 비리적(?) 의심다.


이런 밤은 여러모로 인생의 선생이다.




아무리 초등학생일지라도 삶과 죽음의 의미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태어남이 주는 경이로움과 죽음과 소멸이 주는 안타까움을 구체적으로 느끼지는 못할망정... 특히나 부모의 존재가 일정 시기의 아이들에게 절대적이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일이다.


아들은 언제인가 엄마 아빠가 자신의 곁을 영원히 떠날 것이라는 것을 안다. 먼 훗날의 일이라서 당장 현실화되지는 않을지라도 막연한 두려움이 마음속에 일었을 것이다. 어떤 계기이든 간에.... 가을밤은 아이들마저 센티하게 만드는 마법이 있나 보다.


한 번을 살다가는 인생에서 누구든 간에 생사의 문제에서 초연할 수는 없다. 때로는 담담하게 미련이 없다고 얘기하는 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 마음속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삶과 죽음은 단지 추상적인 미련의 영역이 아니라 누군가를 두고 떠나는 구체적인 안타까움이나 아쉬움에 관한 실체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부모들 대부분은 이런 생각을 할 듯싶다.

'아이들이 부모를 편하게 떠나보낼 수 있는 날까지는 아이들 곁에 머무르고 싶다고. 아이들이 원하는 날까지...'


"이제는 됐어요. 엄마 아빠가 안 계셔도 우리 인생은 충분합니다.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답니다."라는 말을 아이들로부터 들을 때까지는 머무르고 싶은.(좀 더 빨리 이런 얘기를 해준다면 부모들이 더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 텐데... 혹여나 섣부른 기대는 실망을 배가시킬 뿐.)


하지만 그런 날이 언제 올까 싶다. 영원히 도래하지 않길 바라는 그 날은 불확정적 기한임이 분명하지만. 우리는 애써 사실을 부인하며 살아간다. 자식사랑이란 본능우리 스스로 이렇게 인생을 붙들게 만든다. 애처롭게도.


여하튼 부모는 아이들에게 무색무취의 존재다. 아이들이 상상하는 어떤 형태로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존재한다. 어떤 시기에는 미움과 원망이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부모는 아이들이 한없이 기대고 찾고 기다리는 존재인 것이다. 아이들의 부모에 대한 바람은 아쉬움과 부족함을 말할 수 있을지언정 그 관계에서 넘치거나 충분함은 없다. 사랑스러운 아이들에게 부모는 가장 비굴하면서도 용감한 존재가 된다.

 

아이가 성장하는 어느 순간. 부모 자식 간의 관계가 독립적으로 보일지라도 그 속내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실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아이가 나이가 들어 부모가 되어도 그 선은 다시 나뉘어 낡을지언정 끊어지지는 않는다. 자신의 부모가 사라지는 날까지.


부모의 삶은 자신이 살아온 세월의 더께와 아이들과 함께 해온 정(情)의 무게,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할 시간의 깊이로 결정된다.



어찌 됐건 부모에게 아이들은 숙명이며 전생의 업이다. 그 덕(탓일까?)으로 아이들 때문에 울고 웃고 분노하고 만족해하면서도 부단히 인생길을 살아간다. 자식을 위해서도 부모 자신을 위해서도 우리는 성공을 바란다. 여러 가지 의미의 성공을.


흔한 질문 중 하나. 과연 성공한 부모가 아이를 잘 키울까? 각 케이스마다 각기 다른 결론이 있어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여기서 성공이란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부를 주로 말하고, 잘 성장함이란 역시 좋은 대학과 선망하는 직업을 얻는 것을 말한다면. 이 질문은 우리가 궁금해하는 것의 절반만을 묻고 있는 것이다.


<성공한 부모>를 단지 세속적인 명예나 부의 축적이 아닌 아이들의 삶과 관련해서 평가한다면 그 답은 어떨까? <아이들의 성장> 또한 대학이나 직업을 포함해서 보다 전인격적인 만족도를 평가한다면 그 결론은 어떻게 될까? 


아마도 부모 자식 간에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다면(혹여 못했다면) 새로운 이 질문에 대해서는 모두 부정적인 대답을 할 것이다. 부모의 성공과 자식농사가 반비례 관계라는 연구도 있지만. 연구는 연구일 뿐, 현실 속의 부모 자식 간의 관계는 논제로섬 게임(nonzero-sum game)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아이들을 위해 부모가 존재하지만 아이들의 성공만을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들도 부모를 위해 존재하지만 부모의 소망을 위해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부모의 희생과 헌신으로 빚어진 자식의 성공도 의미가 있겠지만. 부모가 자신의 인생을 잘 살아가면서도 아이와의 바람직한 관계 속에서 성취를 가져오게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결국 부모의 삶이 빛나는 것은 세속적인 부분에서의 성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명예와 부의 획득이 부모의 자존감을 높여주기는 하겠지만. 아이들이 바라는 부모의 성공은 자신들과의 관계에 있음이 분명하다. 부모의 삶이 빛나는 것은 아이들의 눈동자와 아이들의 생활 속에서 부모가 살아 움직이는 현재 진행형 동명사일 때다. 서로 간에 갈등이 없거나 시행착오가 없는 부모 자식 관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서로 부대끼면서 아끼고 사랑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다.


부모는 더 이상 자신들의 부존재로 존재를 증명하지 말자. 부모라는 빛나는 존재로 더 확고한 존재를 증명하여야 할 일이다. 우리의 삶이 유한하기에. 다음 생은 우리 서로가 서로를 기억 못 할 것이기에...


아이들은 부모의 삶이 빛날 때 가장 활짝 피어나고, 부모들은 아이가 활짝 피어날 때 가장 빛난다. 그것만이 우리가 아는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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