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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Dec 10. 2019

아이들은 믿었던 도끼일 수도 있다

#1.

자식이 자신의 부모에게서 들을 수 있는 최대한의 비난(혹은 불만이나 불평)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나중에 너하고 꼭 닮은 새끼 낳아서 키워봐라. 그때는 부모 맘을 이해할 거야"


이 말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이 문장을 참으로 많이도 들었다. 나중에 나는 그렇지 않으리라. 그토록 다짐했건만, 부모님의 말씀은 하나도 버릴 게 없었다. 우리 집의 딸들과 아들들 또한 부모의 마음 같지 않게 그대로 부모의 전철을 밟아 나아가고 있다. 이것도 기시감의 일종일까.


모든 자식들은 부모에게 기쁨 아니면 슬픔(?)이다. 조지훈 시인의 <사모>의 한 구절처럼. 오히려 기쁨을 주는 순간보다는 부담을 주거나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이 더 많지 않을까.


아이들을 대하다 보면 이런 원수가 따로 없다. 살갑던 아이가 어느 날부터인가 자기주장이 강해지면서 부모와 갈등을 빚는 경우가 허다하다. 부모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자식들도 많지만, 자식들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부모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누가 원인을 제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생에 서로 악연이 부모와 자식으로 만난다더니 그 말이 진실이 되는 경우도 많다. 전생의 인연이야 과학적으로 풀이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지만, 현실에서의 부모 자식의 관계를 들여다보면 일면 수긍이 가기도 한다.


가만히 보면 부모와 자식은 전생에서 서로 빚을 주고받은 관계가 아니었을까. 서로 간에 채권채무관계를 해결해서 좋은 관계가 되라는.


부모로부터 저 멘트를 들은 수많은 아들들딸들은 살면서 반드시 후회하는 순간을 마주한다. 그 시간이 언제일까 문제 되겠지만. 그때가 되면 피눈물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잖은 반성을 하면서 부모의 마음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혹시나 자신이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믿었던 도끼가 아니었을까 하면서...


그렇게 우리는 뒤늦게 철드는 자식이자 부모가 된다. 우리를 똑 닮은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2.

인류의 발생 이래로 출생증명서에는 아주 작은 글씨로 이런 투의 문구가 투명한 글씨로 쓰여 있다(아마도 있을 것이다).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보지 않으면 결코 보이지 않는다.

"이 생명에 대한 모든 투자는 굉장히 위험한 손실이 예상되며, 그로 인한 모든 책임은 부모에게 귀속됨을 알려드립니다."

"이 투자는 지구 상에 존재하는 가장 위험한 채권투자이며 수익률은 물론 손실도 전혀 예상할 수 없습니다. 후회하는 데 필요한 모든 비용은 부모의 부담입니다."


초겨울의 토요일 저녁, 거실에서 저녁밥을 먹다가 큰아들이 아빠에게 묻는다.


"아빠, 우리가 사는 이 집 얼마 정도 하지?"

(갑자기 별걸 다 묻는다는 투로 쳐다보며)"왜... 얼마면 하려고?"

(천진난만하게 웃으며)"아빠, 나중에 이 집 누구 줄 거야?"

"누나들은 결혼하면 따로 살 거니까..... 아무래도 큰 아들인 나에게 주는 게 좋겠지."


아들은 갑자기 자문자답하는 능력이 생겼는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까지 한다. 그 능력이 신통해서 놀란 아빠가 보태는 한마디.


"글쎄, 이 집을 너한테 줘야 되는 건데? 엄마 아빠가 살다가.... 나중에 막내한테나 물려줄까 싶은데"

"아니면... 아무도 안 주고... 엄마 아빠가 다 쓰고 재미있게 살려고....ㅎㅎㅎ."


아들은 깜짝 놀란척하며 한마디를 던진다.


"아빠가 나(우리)를 낳았으니까. 당연히 책임져야지. 그게 부모의 의무라고 생각되는데..."


아빠는 할 말을 잃고 혼자서 '부모의 의무라...' 중얼거리다시 젓가락을 든다.


아빠가 십 대일 때를 떠올려보면 지금의 아들과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때는 어린 마음에 했던 말들이 부모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특별히 생각하지도 못했다. 지금 아들이 그러하듯이.



#3.

자녀양육비용은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생활비, 교육비, 용돈 기타 필요한 비용 전부를 말한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자녀양육비용은 1인당 3억 9천여만 원 정도라고 한다.(비록 집집마다 큰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 집 같은 경우 네 명의 아이가 성인이 되기까지 필요한 비용은 대략 16억 원이 나온다. 부모가 맞벌이라 할지라도 과연 16억을 벌고 충당할 수 있을까?


이때 들어간 비용은 일종의 투자비용이지만 매몰비용의 일종이다. 이때 부모는 "매몰비용의 오류"를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이는 아이에게 들어간 기존의 비용에 대한 효용이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왕의 비용이 아까워서 계속 투자하는 것을 말한다.(아이들은 돈 먹는 하마일까)


자식농사는 아무리 잘 지어도 본전이다. 부모에게 돌아오는 건 잘 키웠다는 보람이나 감사인사 정도가 아닐까. 문제는 아이들을 양육하는데 들어가는 비용 대비 효과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투자가 투자자(부모)에게 회복불능의 손실을 가져올 수 있다는 거다. 자칫하면 아이들은 부실채권이거나 회수불능의 악성채권일 수도 있다.(물론 부모에게 돌려줄 생각도 없겠지만)


그렇다면, 부모와 아이들에게 바람직한 관계는 어떠할까?


부모와 아이들의 삶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각자 개별성을 띨 수밖에 없다. 아니, 반드시 독자성과 개별성을 가져야 한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는 삶을 살게 하고, 부모들도 아이들에게 부당하게 관여하거나 개입하지 않는 관계. 그런 삶을 서로가 살아가야 되지 않을까.


그렇기 위해서는 부모가 나이 들어서도 자식들에게 의존하지 않게끔 경제적인(심리적인) 독립성을 미리 만들어놔야 할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부모의 아이들에 대한 헌신의 경제학적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한다. 무조건적인 지원보다는 부모의 삶과 아이들의 삶 사이의 합리적인 균형을 꾀한다는 측면에서.

  

우리가 부모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아이들도 우리에게 믿었던 도끼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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