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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재와시간 Oct 15. 2022

윤리학이 주는 위로 - 가까운 이의 죽음에 대한 위로

죽음에 대한 위로

  죽음 그 자체를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죽음에 따라오는 이별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와 가까운 이가 내 곁을 영영 떠난다는 사실은 깊은 절망을 안겨주지요. 사랑하는 이와의 시간은 기억에 깊게 남아 있는데, 앞으로 영원히 만질 수도 목소리를 들을 수도 미소를 볼 수도 없다는 사실은 견디기가 힘듭니다. 이것이 죽음이 남겨진 이에게 주는 고통입니다. 떠난 이는 의식도 형체도 없이 사라지지만, 남은 이는 이별의 잔상을 스스로 주워 담아야 합니다. 이것이 죽음이 피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나의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이유일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은 각자의 인생 계획과는 무관하게 찾아오곤 합니다. 나와 관련된 일이지만, 그것도 아주 중대한 일이지만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찾아오지요. 그렇게 우리는 아무런 준비 없이 사랑하는 이와의 영원한 이별을 온몸으로 감내해야 하곤 합니다. 이처럼 모두에게 공평하지만 배려 없는 죽음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위로받을 수 있을까요?





  가까운 이의 죽음에 대한 위로는 우리의 사고에 있습니다. 또 생각을 고쳐먹으라는 것인가?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죽음이 그냥 멸이 아니라 절망인 이유는 우리가 죽음을 절망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절망이 우리의 사고에서 뿌리를 내린 것이지요. 하지만 죽음은 우리의 인식과는 달리 절망이 아닐지 모릅니다. 아직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면, 중국 고대의 도가 사상가인 ‘장자’의 이야기를 살펴볼까요?




  우리가 가까운 이의 죽음을 이별로 인식하는 것은 생과 사를 구분하기 때문입니다. 죽은 이가 생인 시작에서 사인 끝으로 넘어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별로 인식하지요. 하지만 장자는 삶은 죽음의 또 다른 모습이고 죽음은 삶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즉 삶이 곧 죽음이고 죽음이 곧 삶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생과 사는 무궁한 변화일 뿐, 끝과 시작이 아니라는 관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장자는 장자의 아내가 죽고 처음에는 슬펐다고 말합니다. 슬픔 속에서 아내의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해, 인간의 존재에 대해 고찰합니다. 생이 무엇일까 사가 무엇일까 고민한 것이지요. 장자는 존재의 기원을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립니다. ‘태초에 혼돈 가운데 기가 생겼고, 기가 변하여 형체가 생겼고, 형체가 변하여 생명이 생겼다. 그러다 그것이 다시 변하여 죽음으로 간 것이다. 이는 춘하추동 사계절의 운행과 같은 것이다.’ 즉 생과 사는 기의 변화, 자연의 변화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생과 사는 서로 상반되는 것일까요? 시작과 끝일까요? 아닙니다. 그저 끊임없는 변화의 한 과정일 뿐입니다. 장자의 관점에 따르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생의 시작에서 사의 끝으로 넘어간 이와의 이별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근본적으로 같은 것의 변화일 뿐이지요. 따라서 장자는 아내가 우주의 대저택에 편히 잠들어 있으니 울며 절망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즉 장자는 아내가 사의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큰 변화 속에 있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장자에게 아내의 죽음은 더 이상 이별이 아닌 것입니다.


  아내가 죽었을 때 나라고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문제의 시원을 고찰했는데, 태초에 아내는 생(生)이 없었고, 생이 없었을뿐더러 형체도 없었고, 형체가 없었을뿐더러 기(氣)도 없었네. 그러다가 혼돈 가운데 섞여 있다가 변하여 기가 생겼고, 기가 변하여 형체가 생겼고, 형체가 변하여 생명이 생겼다가, 이제 다시 변하여 죽음으로 간 것인즉, 춘하추동 사계절의 운행과 같은 이치가 아니겠는가? 그 사람은 지금 우주의 대저택에서 편히 잠들어 있거늘, 나는 소리쳐 슬피 곡했으니, 스스로 자연법칙에 무식함을 선언하는 것 같아 그만둔 것이네.


 



  장자가 우리에게 건네는 위로가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결코 경험할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경험할  없는 죽음을 마치 경험한 것처럼 사고합니다. 삶은 좋은 것이며, 죽음은 좋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생만을 경험했지, 죽음은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삶을 미루어서 죽음을 짐작할 뿐이지요. 장자는 우리에게 화두를 던집니다. 생은 정말 좋은 것이고, 죽음은 나쁜 것인가? 죽음의 세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쁘지 않다면? 아니 어쩌면 생보다  좋은 것이라면? 장자는 고대 중국 3 미인   사람인 여희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여희는 고향을 떠나 진나라에 잡혀갑니다. 진나라로 잡혀가 왕의 처소에서 왕과 함께 지내게 되지요. 여희는 고향을 떠나 잡혀갈 때는 울며불며 눈물로 옷깃을 적셨지만, 왕과 함께 지내는 일상을 맛보고서는 울고불고했던 날을 후회합니다. 죽음이라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가까운 이의 죽음은 절망이 아닐  있습니다.  좋고 편안한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이에게 우리는 축복하며 인사합니다. 죽음을 맞이한 사랑하는 이에게도 우리는 축복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죽음의 세계는  멋지고 편안할 수도 있으니까요. jtbc 드라마 한여름의 추억에서 주인공인 한여름은 자신의 장례식에서 사람들이 웃으면서 인사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안녕! 그동안 고마웠어!  지내!’ 이렇게 인사하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장자에 따르면, 장례식장은 슬픔의 공간이 아닌 축복하는 인사의 공간이   있을  같습니다. 우리가 장례식장에서 떠나는 이에게 해줄 것은 생의 시간에서 함께한 순간에 대한 고마움과  좋은 곳으로 떠나는 것에 대한 축복을 건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삶을 좋아하는 것이 미혹은 아닌지 내 어찌 알랴? 죽음을 싫어하는 것이, 마치 어려서 길을 잃었기 때문에 평생 고향을 찾을 줄 모르는 사람의 경우와 같지 않은지 내 어찌 알랴? 여희는 애(艾) 땅의 국경 관리인의 딸이었다. 처음 진(晉) 나라에서 그녀를 데려갈 때 그녀는 옷깃을 적시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왕의 처소에서 왕과 함께 고급 침대에서 자고 각종 진미를 먹게 되자 애초에 섧게 울었던 그 사실을 후회했다고 한다. 그러니 죽은 사람이 처음에 삶에 애착했던 사실을 후회하지 않을지 내 어찌 알랴?




 

  장자의 이야기가 나와 가까운 이의 죽음에 대한 위로가 되나요? 장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모든 존재 방식은 좋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죽음이라는 존재 방식도 삶이라는 존재 방식도 모두 좋지 않다, 좋다로 나눌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 우주의 대저택으로 여행을 떠나는 이에게 축복하고 사랑의 언어를 한번 더 건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슬픔 대신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참고 - 풍우란, 중국철학사, 박성규 옮김, 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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