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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재와시간 Oct 14. 2022

윤리학이 주는 위로 - 죽음 자체에 대한 위로

죽음에 대한 위로

  죽음은 고통스럽다는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깨닫더라도, 죽음은 달갑지가 않습니다. 죽음은 고통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죽음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고통만이 아닙니다. 죽음은 상실, 소멸, 이별, 잊혀짐 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내가 가진 것을 두고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의 육체와 의식이 소멸되기 때문이지요. 소멸됨으로써 사랑하는 이들과 이별해야 하기 때문이며, 그들로부터 잊혀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죽으면 지금 하는 고민들을 의식조차 할 수 없으므로,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 간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은 죽음을 의식할 수 있기에, 죽음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필멸의 존재인 인간은 죽음이라는 것 자체로 인해 살아있는 동안은 괴로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음 그 자체에 대해서는 위로받을 수가 없는 것일까요? 다행히도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위로는 필멸 그 자체에서 주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를 괴롭힌 진리. 필멸. ‘인간은 반드시 멸한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위로는 주어질 수 있습니다. 인간은 반드시 죽습니다. 그것을 피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뿐입니다. 생하고 멸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을 통해 우리는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스토아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이자 로마제국 제16대 황제인 ‘아우렐리우스’는 받아들임을 통한 마음의 평안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필연적인 사실을 우리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강조했습니다. 히포크라테스, 알렉산드로스, 헤라클레이토스, 데모크리토스, 소크라테스까지 모두 죽었다고 강조합니다. 많은 사람의 병을 고치는 사람도, 많은 사람을 물리친 장수도, 훌륭한 이성을 지닌 철학자도 모두 죽음은 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히포크라테스는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었지만 자신은 병사하였다. 칼다이아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예언했지만 그들 자신이 죽음의 운명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알렉산드로스, 폼페이우스, 가이우스·카에사르는 수많은 도시를 연달아 완전히 파괴하고 전쟁터에서 수많은 기병과 보병을 무찔렀지만 그들도 결국은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자연과 우주의 변화에 대하여 그처럼 많은 사색을 하였지만 배속에 물이 가득 차서 더러운 진흙을 뒤집어쓰고 죽었다. 그리고 이(虱)는 데모크리토스를 물어 죽였고 또 다른 이는 소크라테스를 물어 죽였다.


  그렇다면 예외 없이 공평하게 우리를 대하는 죽음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우렐리우스는 죽음이란 본질상 생과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의 신비라고 말합니다. 죽음이 왜 생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까요? 그것은 죽음이란 동일한 원소의 분해이고, 생은 동일한 원소의 결합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죽음이란 그저 원래의 것으로 복귀하는 것일 뿐입니다.


  죽음은 그 본질상 출생과 마찬가지이며 자연의 신비이다. 동일한 원소의 결합과 동일한 원소의 분해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죽음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이성적 존재의 본질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며 우리들 인체 구조의 원리상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자연에 따라서 생기는 여러 가지 일을 체험하다가 마침내 대지에 쓰러져서 영원히 쉬는 것이다. 나의 호흡은 내가 매일같이 들이마신 그 원소로 반환되고 나의 육체는 분해되어 대지로 반환되는 것이다.


  원래의 것으로 복귀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을 두고 우리는 갖가지 마음을 지닙니다. 나는 잊혀지고 싶지 않다. 내가 가진 명예를 두고 떠나고 싶지 않다. 내가 지금 죽지 않는다면 더 나은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 우리에게 괴로운 이유는 바로 이러한 마음 때문입니다. 아우렐리우스는 말합니다. 당신이 3천년을 산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지금 살고 있는 현재의 삶 이외의 다른 삶을 잃거나 현재의 삶 이외의 다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고. 인간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누군가가 빼앗아 갈 수는 없다고. 오직 현재만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과거와 미래는 인간이 지금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잃어버릴 수도 없겠지요.


  당신이 가령 3천년을 산다 하더라도 아니 3만년을 산다 하더라도 당신이 지금 살고 있는 삶 이외의 다른 삶을 잃거나 지금 잃는 삶 이외의 다른 삶을 사는 것이 아님이 명심하라. 그러므로 아무리 길게 살던 짧게 살던 똑같은 것이다. 소멸되는 것은 똑같지 않더라도 현재는 만인에게 똑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멸되는 것은 단지 한순간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은 과거나 미래를 상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누가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두고 떠나고 싶지 않은 명성이라는 것도 그 운명이 확실하지 않은 것입니다. 현재의 명성이 미래에도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확언할 수 없습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잊혀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어떨까요?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바로 나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예외 없이 얼마 안 가서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괴롭히던 것은 죽음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 자신의 마음일지 모릅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시간은 점이고, 실체는 흐르는 것이며, 지각은 혼탁하고, 육체의 구성은 썩는 것이며 영혼은 회오리바람이고, 운명은 예측할 수 없으며, 명성은 확실치 않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마음의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짧은 시간이나마 자연에 따라 살다가 여생을 마치는 것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나의 호흡은 원소로 반환되고 육체는 대지로 반환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우렐리우스가 말했듯이, 올리브가 익으면 자연을 찬양하고 지금까지 자기를 키워준 나무에 감사하면서 떨어지는 것과 같이.


  결국 인간사란 얼마나 덧없고 보람 없으며, 어제의 자그마한 점액이 내일은 미라가 되거나 재로 변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리하여 이 짧은 시간이나마 자연에 따라 살다가 만족한 가운데 우리의 여생을 마쳐야 하는 것이다. 올리브가 익으면 자연을 찬양하고 지금까지 자기를 키워준 나무에 감사하면서 떨어지는 것과 같이.


  또한 아우렐리우스는 정의로운 사상, 사회적인 행위, 거짓 없는 말, 그리고 모든 일을 자연이라는 근원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성을 통해 정의로운 행동을 해야 하고, 거짓 없는 말을 해야 하며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현재의 삶 속에서 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실까요? 바로 이성을 바탕으로 인간으로서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즉 선(善)을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비인간적인 사람들에게도요. 이 얼마나 억울한 말인가 싶겠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이성이 원하는 것은 선(善)이며, 모든 인간이 그것을 인식하고 행하는 것이 자연이 바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내면을 살펴보라. 그 내면에는 선(善)의 샘이 있고 이 샘을 아무리 길어내도 마르지 않을 것이다.

  비인간적인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대하듯 비인간적인 사람을 그러한 감정으로 대하지 말도록 하라.


 작은 식물, 작은 새, 개미, 거미, 꿀벌 등은 우주 안에서 각자 자기들에게 맡겨진 일을 수행하기 위해 일을 합니다. 식물, 동물 그리고 곤충도 자신의 맡은 바 일을 하는데, 인간인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되겠지요.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대신 해야 할 일은 선(善)을 인식하고 행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인간 존재에 대해 그리고 삶에 대해 집요하게 탐구한 사람들이 내놓은 결론인가 봅니다. 죽음은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현재 삶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천년 만년 살것 처럼 행동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지 모릅니다. 우주 안에서 내 존재가 해야할 일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아침에 일어나기가 귀찮거든 ‘나는 인간으로서의 일을 하기 위하여 일어난다’고 생각하라. 나의 존재하는 의의이며 내가 이 의의 때문에 세상에 태어났고 그 의의를 실행하려 한다면 하나도 불만을 느낄 까닭이 없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잠옷을 입고 누워서 편안히 지내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다는 말인가? 물론 이렇게 지내는 것이 편안하기는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자신의 쾌락만을 취할 뿐 어떠한 행동도 노력도 하지 않고 존재하려 하는가? 당신은 작은 식물, 작은 새, 개미, 거미, 꿀벌 등이 우주 안에서 각자 자기들에게 맡겨진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일하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



*참고 -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김주형 옮김, 성공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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