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위로
죽음에 대한 공포는 보통 죽음이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생각에서 시작합니다. 죽음의 순간을 한번 떠올려 볼까요?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이 떠오르나요? 아니면 차에 치여 아스팔트 위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이 떠오르나요? 또는 잡무와 못된 상사에게 시달리다가 스트레스로 쓰러지는 모습이 떠오르나요? 죽음의 순간을 떠올리면, 경험해본 적도 없는데 상상만으로도 고통을 느낍니다. 이처럼, ‘죽음은 고통’이라는 공식은 우리의 뇌리에 깊게 박혀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편안하게 잠을 자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소원으로 이야기합니다. 고통스러운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는 죽음의 시점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쉬운 이해를 위해 시간을 선으로 표현해봅시다. 그리고 선 위의 한 점을 죽음의 순간이라고 생각해봅시다. 하나의 점으로 표시된 죽음의 순간은 분명 삶은 아닙니다. 삶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의 육체와 의식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죽음 안에서 고통을 느끼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순간은 죽음이라는 점 이전의 시간들 위에 있겠지요. 고통은 죽음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 삶 위에 있는 것입니다. 죽음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는 ‘죽다’와 ‘병들다 또는 사고를 당하다’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사실 죽음이 아닙니다. 이게 무슨 말장난인가 싶겠지만, 이러한 사고의 전환을 통해 마음의 평정을 추구한 옛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입니다. 에피쿠로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으면 감각을 잃게 되는데 뭐가 고통스러워?”
“죽음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믿음에 익숙해져라. 왜냐하면 모든 좋고 나쁨은 감각에 있는데, 죽으면 감각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에는 몇 가지 전제가 숨어 있습니다. 첫째, 우리 인식은 감각 인식이라는 것입니다. 에피쿠로스는 인식은 감각기관을 통한 인식이라고 보았습니다. 둘째, 인간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각기관도 원자로 구성된다고 보았습니다. 셋째, 죽음은 원자의 흩어짐이라는 것입니다. 이 전제들을 모아서 생각해보면, ‘원자로 구성된 인간이 죽으면 감각기관도 소멸하므로 고통을 느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죽음이 고통스럽다는 우리의 생각은 사실 착각인 것이지요. 이렇게 따져보니 위안이 되나요? 물론 인간이 원자니 이런 소리를 통해 어떻게 위안을 받겠어?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전환하여 조금 더 생각해보면 위안이 될 수 있습니다. 에피쿠로스가 죽음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삶을 죽음에 대한 공포에 휩싸여 보내는 것은 헛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두려운 일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살아가면서 두려워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을 때 고통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죽게 된다는 예상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헛소리를 하는 셈이다. 왜냐하면 죽음이 닥쳐왔을 때 고통스럽지 않은데도 죽을 것을 예상해서 미리 고통스러워하는 일은 헛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두려운 악인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산 사람에게는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은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이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면 삶에 눈을 돌릴 수 있습니다. 고통은 죽음이 아니라 삶 위에 있습니다. 따라서 삶 속에서 발생하는 고통을 잘 다스리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병듦이라는 고통이 두렵다면 병들지 않도록 건강한 삶을 만들면 되는 것입니다.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삶에서 해야 할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즐거운 시간을 향유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이제 죽음이 주는 고통에 대해 조금 위로가 되나요? 고개를 끄덕인다면 다행입니다.
현자는 삶을 도피하려고 하지도 않으며, 삶의 중단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삶이 그에게 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삶의 부재가 어떤 악으로 생각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음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현자는 단순히 긴 삶이 아니라, 가장 즐거운 삶을 원한다. 그래서 그는 가장 긴 시간이 아니라 가장 즐거운 시간을 향유하려고 노력한다.
그렇다면 가장 즐거운 삶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에피쿠로스는 육체나 마음의 고통이 없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에피쿠로스는 이를 위해서 사치스럽지 않고 단순한 음식에 길들여질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빵과 물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 즉 배고픈 사람에게 가장 큰 쾌락을 제공하기 때문이지요. 에피쿠로스는 모든 자연적인 것은 얻기 쉽지만 공허한 것은 얻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가장 적은 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사치에 가장 큰 기쁨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한번 생각해볼까요? 저는 떡볶이를 좋아합니다. 떡볶이를 집어서 처음 입에 넣었을 때는 큰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배가 점점 불러올수록 떡볶이가 주는 즐거움은 사라지고 토할 것 같은 고통이 찾아옵니다. 이처럼 큰 즐거움을 추구하고 그것을 성취하고자 하면 고통이 따르지요.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연적인 상태에 만족하도록 길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고통을 느끼지 않고 즐거운 시간을 길게 향유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지요.
결핍으로 인한 고통이 제거된다면, 단순한 음식도 우리에게 사치스런 음식과 같은 쾌락을 준다. 또한 빵과 물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쾌락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사치스럽지 않고 단순한 음식에 길들여지는 것은 우리에게 완전한 건강을 주며, 우리가 생활하면서 꼭 필요한 것들에 주저하지 않게 해준다. 그리고 나중에 우리가 사치스러운 것들과 마주쳤을 때 우리를 강하게 만들며, 우리가 행운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만들어준다.
또한 에피쿠로스는 사려깊고, 아름답고, 정직하게 살지 않고서 즐겁게 살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려 깊고 아름답고 정직하게 살기 위한 척도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즐겁게 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에게는 지혜(sophia)가 필요하고, 지혜를 바탕으로 사려깊고 아름답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 즐거운 삶으로 가는 통로라 말합니다. 에피쿠로스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말합니다. 바로 우정입니다.
일생 동안의 축복을 만들기 위해서 지혜가 필요로 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우정의 소유이다.
함께 뭉쳐 사는 우리에게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우정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죽음에 대한 공포로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것보다, 나의 곁에 있는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는 것이 즐거운 삶에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입니다. 나의 곁에 있는 사람들과 소박한 음식을 먹으며 사려깊고, 아름답게 그리고 정직하게 우정을 나누며 사는 것. 그것이 삶의 시간 위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일지 모릅니다. 에피쿠로스가 전하는 위로가 어떤가요? 죽음이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생각이 잘못된 착각이라는 것에 위안이 되나요?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리니 위안이 되나요? 위안이 된다면, 당신의 앞으로의 삶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참고 - 에피쿠로스, 쾌락, 오유석 옮김, 문학과 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