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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재와시간 Oct 23. 2022

윤리학이 주는 위로 -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것

죽음에 대한 위로

  죽음이 고통도, 소멸도 그리고 이별도 아니라면, 무엇일까요? 우리는  죽음을 의식하고 상상하는 걸까요? 모든 존재자에게 의미가 있다면,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아니, 무엇이어야 할까요? 죽음은 죽음일 ,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죽음에 대해 상상하고 그것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사정이야 상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인간  존재자들은 자신이 해야  일을 하다가 죽음이 다가오면 그대로 맞아들입니다.  시간 안에서 죽음이 자신들에게 주는 의미에 대해서 사고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현재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죽음을 현재 안으로 끌고 들어와 생각합니다. 인간은 의식이 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죽음은 아직 존재하지 않지만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죽는다는 것으로부터 의식을 가진 우리는 어떤 의미를 발견할  있을까요?




  ‘모든 인간은 필연적으로 죽는다’는 것은 삶의 유한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현재 의식하고 있는 나의 삶이 언젠가는 끊어진다는 것이지요. 장자처럼 삶과 죽음을 끊임없는 변화라고 생각한다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현재 의식하고 있는 삶, 나의 현 의식이 존재하는 삶은 끝이 나게 됩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지금 삶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지? 나를 뒤로 제쳐두고 살면 내가 잊혀질 것 같지? 그렇지 않아’라고 말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죽음이 나의 눈앞에 현실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 삶에서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 학자가 있습니다. 바로 ‘하이데거’입니다.




  하이데거는 죽음이란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이데거의 이 유명한 문장에는 죽음의 속성 3가지가 담겨있습니다. 첫 번째는 고유성입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명제는 죽음의 보편성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각자에게 죽음은 각자의 것이므로 죽음은 고유성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퍽퍽한 세상을 타인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자신의 두발만으로는 삶의 중력을 오롯이 버티기 힘든 세상에서, 타인의 어깨에 기대어 버티지요. 하지만 이 죽음이란 것은 타인에게 기댈 수가 없습니다. 누구도 나의 죽음을 대신해줄 수가 없지요. 내가 오롯이 그에 대해 사유하고,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참 섭섭하고 외롭고 섬뜩하기도 한 이 죽음의 속성을 견디는 것이 우리 존재가 삶 안에서 해야 하는 일 중에 하나입니다.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다.



  두 번째는 확실성입니다. 하이데거가 죽음을 가능성이라고 표현한 이유지요. 죽음은 필연적인 가능성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죽음을 등 뒤에 숨겨놓고 앞을 보며 삶을 살아도 죽음은 불현듯 찾아오는 가능성입니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죽음의 보편성에 기대어 죽음으로부터 회피한다고 말합니다. 나만의 고유한 죽음이 모든 사람의 죽음으로 보편화되면, 죽음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죽음은 나만의 것이며, 그리고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극단적 가능성입니다.


  세 번째는 비규정성입니다. 고유하며 확실한 죽음은 언제 찾아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죽음은 우리에게 화두를 던집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나를 모른척하고 살 거야? 지금 삶이 진짜 너의 삶이 맞아? 내가 찾아오면 그 삶은 끝날 텐데? 너의 예상과 달리 난 곧 널 찾아갈지 몰라.’




  이러한 죽음의 속성들로부터 우리는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익명성에서 벗어나 고유한 나를 회복하는 것이지요. 인간은 생물학적 죽음을 경험하지 않더라도, 죽음에 대해 사유할 수 있습니다. 이때의 죽음은 사유 속의 죽음이지요. 우리는 고유하며 극단적 가능성인 죽음에 대해 사유하는 것을 통해, 혼자 서게 됩니다. 즉 사유 속 죽음 앞에 홀로 서게 되는 것이지요. 하이데거는 이때 우리의 일상적 삶이 ‘무화’된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군중 속에서 살아왔던 자신의 삶이 낯선 것이 되어 사라지게 되는 것이지요. 일상적인 삶이 ‘무화’된 빈자리에는 ‘본래적’인 내가 드러납니다. 고유하고 진실된 내가 고개를 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경험을 보통 타인의 죽음을 목격할 때 하게 됩니다. 타인의 비규정적인 죽음을 목격하면서 나의 죽음도 비규정적이며 확실한 가능성으로 자신에게 찾아올 것을 깨닫는 것이지요. 그때 섬뜩한 기분과 함께 일상적 삶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죽음이 저렇게 허망하게 오는 것이라고? 나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 내가 누구이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유된 죽음을 통해, 우리는 진실된 삶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본래적’인 나를 발견하는 것은 진실된 삶의 첫걸음입니다. 삶을 살아가는 주체는 나이고, 그 주체가 본래적이며 진실되다면 그러한 주체가 사는 삶은 진실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하이데거는 본래적인 주체를 확립하는 것을 강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미리 달려가 보는 것은 현존재가 ‘그들-자신’에 상실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이며, 현존재를 … 그 자신의 가능성 앞으로 데려온다. 이때의 ‘자기-자신’은 ‘그들’의 환상으로부터 해방된 … 죽음을 향한 자유 속에 있는 자신이다.





  우리는 죽음이 갖는 의미를 ‘하이데거’뿐만 아니라 ‘레비나스’를 통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레비나스는 우리에게 타인의 죽음에 대해 주체성을 버리고 생각하도록 합니다. 하이데거에게 타인은 대상화되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말합니다. 타자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타자의 죽음 가능성 앞에서 타자의 실존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즉 타자의 죽음은 나의 일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은 보편적이지만, 죽음의 양상은 다양합니다. 편안하게 잠을 자듯 이루어지는 죽음이 있는가 하면, 억울하고 잔인하며 폭력적인 죽음도 있습니다. 우리는 타자의 억울하고 잔인하며 폭력적인 죽음 앞에서 타자에 대한 책임을 느낍니다. 이때 타자의 죽음은 더 이상 타자의 죽음이 아닙니다. 나의 죽음이 되는 것이지요. ‘나는 저렇게 죽어서는 안 된다. 아니, 누구도 저렇게 죽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타자에 대해 책임을 다해야 한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타자를 통해 나의 주체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지요. 타자의 실존으로 뛰어들어감을 통해, 나에게도 나의 삶에게도 타자에게도 우리 삶에게도 진실되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안에서 타자의 죽음은 나의 일이 된다.

  죽어 가는 타자의 죽음은 ‘응답할 수 없는 나’라는 나의 정체성 속에서 나에게 영향을 끼친다.





  이제 의식을 가진 존재인 우리가 왜 죽음에 대해 사유해야만 하는지 깨달으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진실된 내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타인에 대해서도 진실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나의 죽음을 통해서도 가능하며, 타인의 죽음을 통해서도 가능합니다. 나의 죽음 앞에 홀로 서는 것을 통해서, 그리고 타인의 죽음 가능성 앞에서 타자의 실존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진실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죽음이라는 존재자가 갖는 의미일지 모릅니다. 진실된 나와 진실된 관계 그리고 진실된 삶. 이 것을 유한한 삶 속에서 획득하는 것. 그것이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숙제일 것입니다.


* 참고 - 최상욱, 하이데거 vs 레비나스, 세창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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